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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종인님의 댓글에 감사드리며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두 가지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1. 호칭 문제: 제가 종중 어르신들을 대할 때마다 곤혹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호칭 문제입니다. 특히 항렬이 낮으면서 연세가 높으신 분들을 어떻게 호칭할 것인가는 늘 고민거리(?)입니다. 제가 이곳저곳 살펴보니 그런 경우에는 "족장(族丈)"이라고 호칭한다는 조언(?)이 있기에 그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듣기 거북하셨다면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 글의 의도: 제가 한우 종인님의 생각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글을 올린 것이 절대로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를 부탁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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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우 종인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반남박씨의 성관 변경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潘南 (4세 밀직공의 계축년 준호구에 표시되어 있음).
2. 羅州 (6세 평도공부터: 태종 12년<1412> 12월 13일자 기사).
3. 潘南 (계해보<1683>부터).
여기서 한우 종인께서는 2의 이유가 평도공께서 부친이신 문정공(휘 상충 尙衷)의 호(號)가 "潘南"이므로 이를 기휘(忌諱)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기서 생각과 주장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문제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제 판단으로는 그럴 개연성이 낮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 나주목의 임내 속현으로 있었던 반남현이 태종조에 와서 혁파(폐현)되어 나주목에 합쳐짐으로써 반남현은 독자적인 현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에 따라 평도공께서 潘南이라는 본관을 羅州로 바꾸어 줄 것을 태종에게 주청하여 허락을 받은 사실이 실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본관 변경의 직접적인 원인은 반남현의 혁파(폐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본관 변경이 "기휘(忌諱)"로 인한 것이라면, 하필 이때 본관을 바꿀 이유가 없고 이미 오래 전에 바꾸었어야 이치상 맞을 것입니다.
둘째, 만약 본관 변경이 "기휘(忌諱)"로 인한 것이라면, 문정공께서 후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潘南이라는 명칭을 호(號)로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즉 문정공께서 당신의 호를 潘南으로 하게 되면 후손들이 潘南을 본관으로 쓸 수가 없어지게 될 터인데 뛰어난 성리학자이시며 예(禮)에 밝으셨던 문정공께서 후손들에게 부담을 주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셋째, 만약 본관 변경이 "기휘(忌諱)"로 인한 것이라면, 계해보(1683)에 와서 왜 다시 潘南으로 환원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무리 다른 朴氏들과의 구분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忌諱는 거의 절대적인 것인데 어떻게 평도공께서 기휘 문제로 바꾸신 본관을 후손들이 다시 潘南으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조상을 능멸하는 행위로 지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셨던 서계공, 남계(현석)공께서 그러한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위의 세 가지를 근거로 하여 판단하건대, 평도공께서 본관을 潘南에서 羅州로 바꾸신 것은 기휘로 인한 것이 아니라 태종실록의 기사대로 반남현이 행정적으로 혁파되어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주읍(主邑)인 羅州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을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제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태종실록의 기사를 비롯하여 전후 상황을 고려할 때, 제 판단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한우 종인님의 깊은 연구에 다시 한 번 더 경의를 표합니다.
승혁 삼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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