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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공순공이 쎴다는 도소재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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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12-31 20:46 조회4,346회 댓글0건

본문

오늘 홈 페이지의 글을 읽다가 우연히 도소재 휘 의 임오보 기록을 읽게 되었다.

태서 대부께서 번역하여 실은 글을 여기 한번 다시 옮겨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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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보의 직장공 수단 글쓴이 : 관리자

  박힐 거 금산 子 沖 文科 子 麟 군수

신사년(1641) 여름 금산에 사는 생원 朴挺씨가 거듭 써 온 글의 대략은 이 고을에 전란의 화가 타 지역보다 더욱 심하여 보첩이 모두 없어졌으니 다만 선세의 부형으로부터 들은 것들을 모아서 기록하여 둔, 즉 박윤무로 부터 분파 했다고 말 한 것을 歷歷히 기록하였는데, 윤무 할아버지 이하 힐 할아버지 이상의 대 수가 하나같이 기록 되지 않았으니 또한 상고할 곳이 없을 따름이다.

골돌이 생각해 보건대 11대조 진사공 휘 윤무 밀직부사공 휘 수()께 형제가 있다면 박힐씨는 필시 밀직공 형제의 자손임을 의심할 것이 없고, 밀직공께 만약 형제가 없고 보첩에 기록된 바와 같다면, 밀직공 셋째아들 직장 상경의 후손이 없으랴, 모두 가히 알지 못함이라.
밀직공의 손 평도공 휘 은() ()변을 따랐고 힐()자 또한 변을 따른즉, 백세를 내려가도 비록 가늠하지 못할 것이라. 어떤 파를 따라서 나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고 하건대 박힐씨 曾孫婿 김구영이 과거에 급제 한 때인즉, 그로 더불어 평도공의 당형제 혹은 재종형제로써 또한 같다고 의심 할 것이 없는 고로, 삼가 죽계 안씨 족보에 의거하면 안석렬의 바깥쪽으로 평도공의 줄을 나란히 씌어있으니, 다른 날의 참고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번역서).     

朴詰 居 錦山
, 子 沖 文科, 子 麟 君守,

辛巳(1641),錦山居生員朴琴氏,複書略曰,慈邑兵燒,比他充甚,譜牒盡爲甚失, 只聞於先世父兄者聚以記得, 則自朴允茂分派之言, 則歷歷皆記而, 茂祖以下,詰祖以上,代數一不記,得亦無考廈云云,
察念十一代祖進士公諱允茂,子密職副使公諱秀有兄弟,則朴詰氏必是密職公兄弟之子孫無疑以, 密職公若無兄弟如譜中無疑則無乃密職公第三子直長尙之後耶,皆未可知也,
密職公之孫平度公諱訔字位言邊而,詰字亦後言邊則百世之下,雖未能的知其從慕派今來而,
傍考朴詰氏曾孫壻金九英登第時(1453)歲月其與,平度公堂兄弟或再從兄弟,以亦无歲古謹依竹溪安氏族譜中,安碩例詰字之上不書,子字而別以朴詰姓名二字付書于, 柳伯濡之外平度公行以侯他,日之參考焉.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은 오늘 읽은 다른 글 중에서 의아한 대목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恭順公께서 지으신 逃召齋 詰行狀이다.

언젠가 인천에 계신 찬승 족숙께서 쓰신 글 중에 恭順公逃召齋에 관한 글을 언제 지으셨나 하는 의문을 나타내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는 그것이 무엇에 관하여 누구와 논쟁을 하시는지 몰랐기에 무심히 넘어간 적이 있었는데, 오늘 이 자료를 읽으면서 그때 무슨 일이 왜 일었는지를 대충은 짐작이 갔다.

 이 글은 1937년에 大田에서 발행되었다는 박씨충의록, 逃召齋 詰行狀이 있었다.

글을 쓴 분은 再從孫 左議政 朴崇質逃召齋生卒이 나타나 있으니 다음과 같다.

  ==公以 麗朝恭讓朝 庚午(1390) 顯于歲以, 世宗乙酉103日卒.==

  문제는 그 行狀에 나오는 문장의 한 곳에 눈길이 가는 순간,
 
이 글은 공순공이 쓴 것이 아니고,
후대의 누군가가 공순공의 이름을 假託한 글이 분명하니,
이 글의 내용도 위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쓰인 해가 병인 3월이라고 한다.
 
공순공께서 좌의정에 오르신 것이 연산군의 말년이다.
그리고 丙寅年(1506)은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중종이 즉위한 해이다.

  문제는 도소재의 家系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密職公生三子. 長諱尙衷 世稱潘南先生諡文正. 仲尙眞判書. 季尙褧司醞職長.==
이상하지 않은가. 반남선생의 諡號가 기록되어 있다니.

이 글이 쓰인 년대가 1506년 병인년이다.
그 때에는 아직 우리 반남선생은 증직으로 領議政府事 만 있을뿐이고,
文正이라는 諡號를 받으시는 해는 그로부터 180여년이 흐른
肅宗 7(1681) 121이다.

 어떻게 1506년에 쓰인 글에 그 후로 180여년이나 지나야 받게 되는 諡號가 기록되고 있을까?
이 글을 한 자의 첨삭도 없는 글로 오로지 공순공이 쓰신 글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강하게 부정적인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충의록을 간행하는 발행자가 諡文正이라는 석자(三字)添入하였거나, 교정을 보면서 실수한 것이라고 변명을 한다면, 혹시 주저하며 그런가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공순공을 假託한 후대의 누군가가 그 시대의 습관적인 호칭으로 文正을 쓴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글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믿을 수 없으니 지은이와 글의 내용을 부정하고 배척하여야 하는가?

믿어야 하는가, 부정해야 하는가?

평택에서. 박 한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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