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위토를 장만하신 부사공 휘 운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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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府使公) 휘 운수(雲壽) 묘지명
양주(楊州)의 노원면(蘆原面) 봉화현(烽火峴) 인좌(寅坐)의 언덕에 노송이 무성하게 덮였는데 이곳은 옛 순흥부사(順興府使) 덕은(德隱) 박공(朴公)의 옷과 신이 안장된 곳이다. 맏아들 제근(齊近)이 공의 실기(實記)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내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무릇 남의 선(善)을 즐겨 말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은 인자(仁者)의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건대 어찌 감히 이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의리상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힘써 서술하는 바이다.
공의 휘(諱)는 운수(雲壽)이고 자는 경룡(景龍)이며 성은 박씨이니 선계는 반남(潘南)에서 나왔고 덕은(德隱)은 그의 호이다. 먼 조상인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은 학문과 절의로 고려 말에 이름이 드러났다. 조선에 들어와 평도공(平度公) 은(壻)은 공훈으로 이름이 올랐으며 그의 5대손 문강공(文康公) 소(紹)는 도학(道學)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들에게 추존되었으며 세상에서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고 부른다. 그의 아들 응천(應川)은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니 공에게는 9대조다.
그 후 필리(弼履)는 통덕랑(通德郞)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는데 공의 고조부가 되며, 사석(師錫)은 공주판관(公州判官)으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공의 증조부가 된다. 윤원(胤源)은 감역(監役)으로서 이조판서와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추증되었고 호는 근재(近齋)인데, 도덕과 절의와 문장으로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공의 조부가 된다. 선고(先考)는 종여(宗輿)니 서흥부사(瑞興府使)이며, 선비(先騙)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규복(奎復)의 따님인데 근재선생이 부인의 묘지명을 지어 부인의 효경(孝敬)을 드러내었다. 계비(繼騙)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니 정조 21년 정사년(1797) 12월 18일에 서울 정동(貞洞) 자택에서 공을 낳았다.
그날은 바로 입춘이라 조부 근재선생이 헌발(獻發)5591) 헌발(獻發) : 헌세발춘(獻歲發春)을 이름. 즉 정월 원일(正月元日)이란 말. 91)의 뜻을 따서 소자(小字, 아명<兒名>)를 지었다. 이보다 앞서 김부인은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공이 태어나자 용모가 특별하고 신기(神氣)가 밝았다. 충헌공(忠獻公)이 태어남을 축하하는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거북이와 학의 긴긴 수명을 너에게 주노니, 시례(詩禮, 학문과 예절)의 우리 가문을 진작하여라." 하였다. 어른들의 기대가 이러했던 것이다.
<中略>
백성에게는 자상하고 친근하게 대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살폈고 군포(軍布)가 유실된 것이나 거듭 징수한 것은 장부에 따라 정리하였으며, 비축한 곡식이 결손된 것은 방편에 따라서 보충하였고, 군기(軍器)와 관물(官物)이 망가진 것은 다 수선하고 보완하였다. 현에는 우물이 두 개가 있어서 문정(文井)·무정(武井)이라고 하였는데 오래도록 더러운 찌꺼기를 치우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의 전설에 우물을 치면 과거급제자가 난다고 하기에, 공이 비용을 내서 준설을 하고 제문을 지어 고사를 지내니 과연 신이
한 효험이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형벌을 남용하지 말고 국법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수년 동안 정치를 하니 길가에 송덕비가 세워졌는데, 공은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치적도 없는데 헛된 이름만 나는 것은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다." 하였다. 정무를 보면서 여가에는 간혹 두세 명의 문사와 더불어 구월산(九月山)을 유람하고 천석(泉石)이 좋은 곳에서는 시도 지었다. 문치(文治)를 숭상해서 고을 선비에게 공부를 시켰다. 재상이 간혹 편지를 보내왔는데, 공을 문옹(文翁)의 유화(儒化)5595) 문옹(文翁)의 유화(儒化) : 문옹은 한(漢) 나라 여강(廬江)의 서(舒) 사람. 경제(景帝) 말년에 촉(蜀)의 군수가 되어 인애(仁愛)하고 교화(敎化)를 좋아하여, 성도(成都)에 학교를 일으켜 입학한 자는 요역(徭을 면제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군현(郡縣)의 이(吏)로 삼았음. 촉군(蜀郡)이 이때부터 문풍(文風)이 크게 떨치고 교화(敎化)가 크게 일어났음. 무제(武帝)가 천하의 군국(郡國)에 학교(學校)를 세운 것은 문옹에게서 시작된 것임.95)에 빗대어 말하곤 하였다.
기축년(1829)에는 가평군수(加平郡守)로 갔는데 마침 큰 흉년이 들자, 공은 창고를 열어서 돕는 것도 부족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면서 친히 순시하였다. 어떤 백성이 공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 군수님은 질병이 없으십니까?"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약초 한 움큼을 드리는 자도 있었다. 사대부 중에 향촌에서 무단(武斷)5596) 무단(武斷) : 향촌에서 세력가들이 권세만을 믿고 백성들을 억압하는 것을 이름.96)하는 자는 비록 심히 억제를 했지만, 백성 중에 사대부를 능멸하는 자 또한 엄단하며 말하기를 "명분은 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계사년(1833)에는 거창부사(居昌府使)로 임명되었다. 이곳은 영남에 있는 도호부(都護府) 중의 하나로 또한 자주 흉년이 들고 질병이 심하였는데, 공은 이것을 막기에 이따금 침식도 잊을 정도였다. 굶는 가정을 널리 기록하여 자기 봉급을 내어 구제하니, 누군가가 편지를 올려 말하기를 "온 고을의 백성이 죽지 않는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어질게 다스리는 사또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은 수미(需米)를 헐값으로 팔면서 말하기를 "수령으로서 어찌 이익을 보겠는가?" 하였다.
어떤 백성이 신역(身役)으로 바치기 위해 포목을 시장에서 샀는데, 중개업자가 훔쳐가서 이를 비관하여 죽으려고 독약을 먹었다. 공은 급히 해독제를 써서 소생시키고, 엄중히 명해서 그 도적을 잡아들였으며, 백성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특히 처형에 신중하여 말하기를 "인명의 생사와 관련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였다.
을미년(1835)에는 왕의 부름을 받고 교체되었고 병신년(1836)에는 순흥부사(順興府使)에 임명되었다. 죽령(竹嶺)은 호서(湖西)로 통하는 영남의 대로이다. 죽령 아래에 있는 마을은 가난한데다 관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숙식을 제공하느라 살 수가 없었다. 공은 이런 고충을 모두 보고해서 폐해가 없게 하였다. 또한 서울로 공납하는 만여 금은 중간에서 아전들이 농간질해서 모두 없어졌다. 아전 중에 사망해서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여러 번 감영에 품의(稟議)하여 5천금을 빌려다가 공금에 충당하였고, 그 나머지는 해당 관청에서 몇 년에 걸쳐 납부하게 하니 번거롭지 않게 회수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체납된 2만 6천여 포의 환곡은 모두 없어진 것이 허위로 기록한 것이었다. 공은 사실대로 영(營)에 보고해서 조정에 알려 법에 따라 조치할 것을 청했다. 순찰사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와 극구 만류하였으나, 공이 뜻을 굽히지 않을 줄 알고 마침내 조정에 알려 결국은 탕감되었다. 5월에 병이 들어 사퇴하니 아전과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이에 송덕비를 세워서 공의 공적을 더욱 현창하고 칭송하였다.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살면서 서사(書史)로만 즐기면서 생을 마치려 하였다. 헌종 7년 신축년(1841) 11월 1일에 훈도방(薰陶坊) 죽전동(竹廛洞)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45세였다. 부인은 숙인(淑人) 기계유씨(杞溪兪氏)로 규문(閨門)을 정숙하게 하여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으며, 남편을 섬기는데 그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아들은 제근(齊近)이니 지금 군수이다.
<中略>
가정에서 특이하거나 풍속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윤리에 독실하여 재종형을 섬기기를 동기와 다름없이 하였는데, 비록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상의해서 실행하였다. 조상을 모시는 일에 독실하였다. 9대조모(原文은 13대 조모로 기록)신씨(愼氏)의 묘소가 삼가현 (三嘉縣)에 있었는데, 위토가 매우 적었으므로 공이 거창부사로 있을 때 제문을 지어서 제사를 드리고 위토를 장만하여 보수하는 데 보태었다. 또한 종족과 화목하게 지내서 만약 혼기를 넘기거나, 초상이나 제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외직에 있을 때 동성(同姓)인 어떤 사람이 찾아왔는데, 정성스럽게 접대해서 친의(親誼)를 말하였고 떠날 때 노자를 후하게 줘서 보냈다.
부부간에도 서로 손님처럼 대하여 친압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사귀는 데에도 오래도록 공경해서 외모를 꾸미는 것 따위는 하지 않았다. 노비를 거느리는 데에도 은혜와 위엄을 병행해서 혹 죄를 지으면 가볍게라도 매를 때리지 않았고 먼저 사리로 꾸짖어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남이 주는 물품을 받을 때는 엄격하여 받는 것이 옳은가 를 살펴 받지 않아야 되는 것은 받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보양하는 데는 매우 검소하게 하였으니, 조석의 식사에서 반찬이 다소 풍성하면 먹지 않았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청빈해 왔는데,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어찌 본분을 잊고서 이렇게 하느냐?"고 하였다. 따라서 의복이나 기명(器皿)도 검소하고 꾸밈이 없게 하였으며, 재산을 불리거나 땅을 넓혀서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삼지도 않았다.
거처하는 방에는 글씨나 그림을 걸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남의 집 벽에 영롱하게 붙인 것이 매우 눈에 거슬린다."고 하였다. 스스로 일종의 규범이 있어서 비록 옛날 친지라도 요직에 있으면 그 집에는 가지 않으니, 매일 왕래하는 자는 오직 빈궁한 친족뿐이었다. 공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서면 소연하여 마치 한미한 선비의 방과 같았다. 문장을 쓰는 데는 정약(精約)에만 힘을 써서 비록 하찮은 서찰이라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필법은 예법을 숭상해서 획이 웅건하고 세속적인 모양이 없었다.
일찍이 관혼상제의 예가 방대하여 실제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사례요람(四禮要覽)》을 지었는데, 고금을 두루 고증하고 근재(近齋)의 예설을 참작하여 강목을 세우려 했다. 그래서 먼저 상제를 뽑아 관련 자료를 모았으나 끝내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아아! 공은 근재선생의 훌륭한 후손이고 서흥공(瑞興公)의 아들로, 덕행이 높고 지조가 바르며 견식이 밝고 논의가 두루 통달해서 충분히 세도를 깨우치고 왕도를 빛낼 인물이었다. 여러 번 과거시험에 실패하고 마침내 한번도 포부를 펴지 못했으니, 이것이 진실로 지사들이 다 같이 안타까워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펴는 자도 드물다. 그러하니 급제하여 고관대작이 되어서 아무 공업도 성취하지 못한 것보다는, 차라리 역량에 맞게 지방 수령이 되어서 백성들에 도움을 준 것이 낫지 않겠는가?
우리 선사(先師) 문경공(文敬公) 매산(梅山) 홍선생(洪先生, 홍직필<洪直弼>)이 공을 위해 쓴 제문에는 "효에 돈독하고 예를 존숭해서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이에 말하려는 것은 선대의 뜻과 사업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하였다. 공의 평생을 보려는 자는 이 몇 마디에서 구함이 옳으리라. 옛날 구양수(歐陽修)가 범문정(范文正)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내주(來舟)의 사적5597) 내주(來舟)의 사적 : 범중엄이 배에 실은 보리 5백 석을 석만경(石曼卿)의 상(喪)에 부조한 것.97)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나도 가만히 이런 의미를 부쳐서 공이 남긴 업적의 큰 줄기만을 이상과 같이 썼으나, 지엽만 무성하고 실질은 빠뜨렸는지 걱정이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반남박씨 빛나는 가문 대대로 밝은 덕 있더니,
공은 정기를 모아서 가학을 전하였네.
들은 것을 존숭하고 법도를 어기지 않았으며,
충신(忠信)으로 갑옷 삼고 예의가 방패일세.
마음을 다해 펼쳐 가난한 집을 환히 살피니,
그림자도 음성도 아니고 마음과 눈이 모두 이르렀네.
아이가 젖 주는 어미를 잃으면 자신이 그러한 듯 슬퍼하였고,
백성들을 재난으로부터 구해내는데 마치 모두 못할까 걱정하였네.
네 개 군을 다스림에 그 덕화(德化)가 퍼졌으나,
그의 인생 단명하니 누가 길고 짧은 수명을 주관하나.
후손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불식지보(不食之報)5598) 불식지보(不食之報) :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잘 되는 보응.98)가 있으리니,
영명한 인재가 계속해서 태어나 영화의 길이 열리리라.
일생 사적 기록해서 이 무덤에 넣으니,
이후 모든 군자들이여 이 명(銘)을 보소서.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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