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천 할아버지 묘터와 우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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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5:20 조회1,834회 댓글0건본문
야천할아버지 공부하시던 석사암터.JPG
야천할아버지 사시던 석사암터 와 창서.JPG
야천 할아버지의 묘소에 관한 전설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윤씨땍 산소에 홍씨 할머니가 물을 채워서 윤씨댁
에서 못쓰게 했다는 전설
두째 벽진이씨댁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야천할아버지 친구이신 이광 선생님
이 묘터를 잡아주었다는 이야기
셋째 기제잡기에 나오는 이광선생이 묘터를 잡아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마 윤씨네 동네에서 자작(自作)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되고
두째 셋째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 이니 첫째의 이야기보다 신빙성이 높은 글로
기제잡기는 오창공(1569--1635)께서 야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1534년) 50~60 여년후 쓰신 기록이다.
그렇다면 어느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보면 알수 있는 일이다
다음의 글은 오창공 동량 할아버지께서 쓰신 '기제잡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의 할아버지(문강공 박소)가 파직되어 남양(南陽=현 화성시 남양면)에 물러가 계시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그 가까운데 있는것을 꺼리므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합천(陜川)으로 돌아가니, 합천에서 서울거리가 아흐레 길이였다.
중략(中略)
할아버지가 합천에서 5년만에 돌아가셨는데, 아들 딸들이 어려서 울음소리가 방에 가득하였으며, 큰아버지( 감정공 응천 )가 겨우 스무살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진주에 사는 생원 이광(李光)과 절친한 사이었다. 작고하신 것을 알리자 미투리 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20 여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찾아 왔었는데, 할아버지 댁 뒷산에 이르자 큰소리로 큰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 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너의 아버지가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 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구득하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구득하였다“
하고, 이내 내려와 통곡을 하고 갔는데 지금의 무덤이 즉 그가 정해 준 곳으로서 뒤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매우 좋다고 하여 동래 정씨의 산소에 다음 간다고 하였다.
야천할아버지가 살던 집터 이야기는
처음으로 2005년 3월 경 천안에 사는 창서씨(홈페이지 관리자)와 삼임유사를 지낸 춘서씨가 동네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찾아낸것인데
합천에 사시는 홍서씨의 아드님(찬호씨)은 공부하시던 암자터 라고 하니 .
우물터와 집터의 진위는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박 찬 문
위의 사진은 창서씨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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