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61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260

자유게시판

'노강서원의 近況'

페이지 정보

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9-09 10:38 조회8,083회 댓글0건

본문

노강서원 近況

많으신 종중 원로분과 종원님께서 노강서원에 대하여 오해 하고 있는 부분이 있고

카나다에 사시던 박찬웅(활당공파)씨가 쓴 ‘서울 1991년’ 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74쪽~75쪽)

박승남: 6.25 동란이 1953년 7월에 휴전될 무렵 노강서원의 고지기는 그

         의 부친 때부터 대를 이어 이를 맡아왔던 김영진이라는 사람이었다.
         원래 노강서원에는 천여 평이 넘는 땅이 딸려 있었는데 
        
         정재공(박태보)의 종손이
이 땅을 팔아 먹은 것을 
       
       민대식씨의 집안에서 (민영휘라고 추측됨) 다시 사준 것이다 

        
        그 이유인즉 정재공이 아니었다면 숙종비 민중전이 복위(
19641694)
         되지도 못했고 민씨 집안이 몰락했을것이기 때문이다.
         (300년 후에 은혜를 갚았다니 의리 있는 사나이다)
         그때 민씨네가 사준 땅이 370평 이었다. 6.25가
나자
         김영진이 노강서원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고 폭격을 맞았다고      
         꾸며댔다. 내가 가보니까 노강서원

자리에 하꼬방(무허가 건물)이 17채가 들어 서있었다. 노강서원에 보존돼었던 정재공의 영정도 어느 고마운

부인이 모시고 있다가 돌려 주었다.

이 노강서원 370평의 땅은 박씨네 60명의 명의로 등기 되었는데 그중 당시 생존했던 분이 두분계셨다. 한

분은 승서(承緖 전도유사. 현 변호사)씨 부친인 勝經(도정공파)씨 이고 한분은 목천(木川)씨 였다. 그래서 내가

이분들을 천안까지 찾아가서 위임장을 받아 승호(勝浩 세양공파)가 부장판사로 있을때 측량을 다시해서

삼년에 걸려 재판을 했다. 그 당시 종중은 무일푼으로 측량비도 없었다. 노량진 승철씨(극장옆에서 직조공

장을 했다. 현재 살아있으면 80정도) 집에서 총회를 할때 참석자들에게 십시일반으로 얼마씩 거두었다.

그후 종중의 경비를 위해서 勝男,남서,勝尋등 열명이 매달 2000원씩 냈다. 그수금은 머리가 하얗게신 鶴緖

老人(1889년생 부윤공파. 의정부 찬혁씨,찬오씨 부친. 현 부윤공파 총무 민우씨 조부)이 다녔다 지금 사셨다면 백살이 되셨

을 것이다.

호양씨가 도유사를 할 무렵에는 종중사무실도 없었다. 승하씨가 정릉자택에 서류를갖다 놓고 사무를 보고

회의 때는 보따리에 서류를 싸들고 나왔다. 勝萬 勝廈 호양씨가 다 다락원 서계자손 동갑내기(1904년생)

들이다. 다락원 박씨란 수락산 다락원에 살고 있는 西溪(박세당)의 자손들을 말한다.

노량진 노강서원 대지는 지금 다락원에 살고 있는 승호씨가 샀다

그가 승만씨와 가까운 사이였다. 승호씨가 그땅을 사서 17개 무허가 주택에 대해 하

나 하나 명도 소송을 하느라고 큰 손해를 봤는데 대종중은 그때 들어온 돈을 재무유사 명준씨가 잘 운영을

하여 들어온 이자를 갖이고 다락원에 서원을 새로 짓고 그 원금과 졸헌공(야천 4남) 위토에서 나온 돈 등

으로 중곡동 땅을 샀다가 재미를 보아 동교동 소재 현 대종중건물을 사서 이때부터 종중이 생긴것이다.




위의 글중에서

노강서원에는 천여 평이 넘는 땅이 딸려 있었는데 정재공(박태보)의 종손이 이 땅을 팔아 먹은 것을

종중 보관 서류에 의하면 정재공의 종손이 팔아먹은것이 아니고  1928년에 종손명의를  대종중 6분의 이름으로 명예 변경했다는 기록은 있다 (대종중은 1922년 처음 결성되었음)


이 땅을 팔아 먹은 것을 민대식씨의 집안에서 (민영휘라고 추측됨) 다시 사준 것이다.

라는 내용은

종중 기록에 의하면

을축년(1925년)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노량진 강가에 있던 노강서원이 침수(浸水) 퇴폐(頹廢)하여 1925년

민영휘(閔泳徽)씨가 5000원

민병석(閔丙奭)씨가 1000원

1925년  성금으로 본 서원(書院) 중수(重修)하였다.

민영휘(1852~1935)씨와

민병석(1858~1940 민복기 5,6代 대법원장의 부친)는

해방전에 작고 하신 분으로 6.25때와는 관계가 없음



정재공의 영정도 어느 고마운 부인이 모시고 있다가 돌려 주었다.

정재공의 영정이 아니고

1964년 10월경 선생의 신위가 鄭處理家에서 봉안되어 있음을 발견

신위를 돌려받은 것임




졸헌공(야천 4남) 위토에서 나온 돈 등으로

졸헌공의 위토에서 나온 돈이 아니고 도정공 위토를 처분한 돈이라는 것이 종중의 원로분들의 증언으로 알수 있다.

그러나 졸헌공의 묘역(=오창공의 종토)이 종중에 들어온 사실은 있으나 종중 사무실 취득하는데는 사용했다는 근거는 알수 없다.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종중의 기록과는 많은 차이가 있고
어느것이 진실인가는  종원여러분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