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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군 박정(朴炡) 진무원종 공신 1등에 공신호를 받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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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우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4:37 조회1,9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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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군은    
인조 1년(1623)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靖社)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인종 2년(1624) 이괄의 난 때 종사관으로 진무원종공신 1등의 공신호를 받음


※ 참고
1) 14세 휘 박정(朴炡) 금주군    1596(선조 29)~1632(인조 10).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 좌참찬 동선(東善)의 아들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었다가 아버지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자,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와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靖社)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같은해 홍문관정자 박사를 거쳐 다음해 사간 응교,장령,집의,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이 된 남이공(南以恭)을 부응교 유백증(柳伯曾), 교리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어 호패법을 강화하자고 주장하였고, 그뒤 대사간 병조참지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고 자기파를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좌천되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가 남원부사로 임명될 때에 새 수령을 영접하러 나온 아전이 그를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오똑하게 단정히 앉아 있어 그 마음속을 알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이 당시 그는 관내의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금주군(錦州君)에 봉하여지고
1631년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2) 정사공신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들.
김류(金찐)·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며, 이에 책록된 공신은 총 53명이다.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계해년인 1623년에 행하였으므로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3) 진무공신(振武功臣)
조선 인조 때 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공신호(功臣號)
정식 명칭은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이다. 1624년(인조 2) 32명을 3등으로 나누어 1등에는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의 3명, 2등에는 이수일(李守一)·김기종(金起宗)·변흡(邊源)·유효걸(柳孝傑)·김경운(金慶雲)·이희건(李希建)·조시준(趙時俊)·박상(朴疽)·성대훈(成大勳)의 9명, 3등에는 남이웅(南以雄)·신경원(申景瑗)·김완(金完)·이신(李愼)·이휴복(李休復)·송덕영(宋德永) 등 모두 22명이다.

4) 이괄의 난
1624년(인조2년)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관서(關西) 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고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兵營)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中和), 황해도의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佐)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5) 진무공신
1등 공신 장만 정충신 남이홍 등 3명
2등 공신 변흡 이수일 유호걸 김경운 이희건 조시준 박상 성대훈 등 8명
3등 공신 김완 신경원 이휴복 송덕용 최웅일 깅양언 김태흘 이신 오박 최응수             이락 지계최 이경정 안몽윤 이택 이정 등 1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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