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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門神 중국인의 저택을 지켜주는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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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8-13 16:35 조회3,619회 댓글0건

본문

門神. 中國人邸宅을 지켜주는 英雄.

 

북경 촌놈이 모처럼 섬 구경을 갔다가 아주 황당한 일을 당했다.

섬 주변에는 바닷물 대신 수림이 꽉 막아섰던 것이다. 아니, 이름이 섬이었지만 사실 섬이 아니었던 것이다. 잡목사이에 초병처럼 서있는 불조심이라는 경고판을 보면서 한순간 뭐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맞아요, 여기가 상운도인데요

버스기사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또 하차를 재촉한다. 얼결에 차에서 내렸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中國 唐山市 樂亭縣 翔雲島는 난하(灤河)가 바다에 흘러드는 강어구의 서쪽에 위치, 바다 기슭까지 아직 3~4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파도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알고 보니 상운도의 구경거리는 섬이 아닌 수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슨 사막의 駱駝라고 나무구경을 못해서 북방 어디든지 흔한 잡목림에 흥미가 일겠는가.

사실 樂亭은 방언에서 섬 도자를 그리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 현 경내에 있는 섬들은 섬 로 명명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낙정사람들은 섬의 이름을 소금을 쌓을 로 부른다. 상운도의 앞바다에 있는 섬도 月坨 石臼坨 하는 식이다.

섬 도자를 달고 있는 상운도가 오히려 섬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상운도 역시 천 년 전까지는 정말로 하나의 섬이었다고 한다. 낙정의 縣誌는 상운도를 두고 백 여자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상운도는 樂亭城에서 남쪽으로 40여리 떨어져 있다. 일찍이 삼면이 바다로 물에 둘려있었으며 한쪽이 육지에 이어져 있었다. 지형의 변천에 따라 바다 기슭이 점차 물러가고 내륙으로 되었다. 섬에는 비스듬한 모양의 우물이 있는데, 속칭 넘어트린 우물이라는 의미의 拌倒井이라고 부르며 龍興寺앞에 위치한다. 해변에 있는 우물은 거의 쓰고 짜지만 유독 이 우물의 물만은 감미롭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太宗 李世民東征에서 이곳을 지날 때 말과 사람이 모두 갈증에 시달렸지만 물을 뜰 그릇을 찾을 수 없었다. 대장 薛仁貴가 손으로 우물을 넘어뜨려 우물 벽이 비스듬하게 되었으며,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왔다.”

 

비공개 간행물인낙정 민간인이야기는 현지에서 수집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는데, 현지보다 소상하게 상운도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太宗 李世民은 직접 東征에 나섰는데 어느 안시성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세민은 병사들을 데리고 황급히 도망하였다. 그들은 이 일대에 이른 후 지칠 대로 지치고, 또 갈증에 시달려 한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당장 적(고구려군)이 들이닥치게 되었으며 당나라의 군대는 전멸의 위험에 박두하고 있었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渤海바다를 바라보면서 이세민은 탄식을 길게 했다.

오늘이 나 이세민이 죽는 날이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서남쪽에서 오색구름이 한 점 날아오더니 그의 앞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이 구름이 닿자마자 작은 섬으로 변했다. 이세민은 즉각 병사들에게 접안하여 섬에 오르라고 명령했다.

작은 섬은 사면이 물에 둘려있었고, 꽃향기가 그윽했으며 버드나무가 울울창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세민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天神에게 공경하게 절을 했다.

이윽고 적군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물과 하늘이 잇닿은 바다 위에는 꽃구름만 유유히 헤엄치고 있을 뿐이었으며, 당나라의 군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적군은 별수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되어 당나라 군대는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숨을 돌리게 되었다. 병사들은 밥을 지으려고 물을 찾다가 수풀 속에서 웬 우물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도무지 물을 퍼서 올릴 수 없었다. 우물이 너무 깊어 줄이 수면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설인귀가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우물 가장자리를 잡더니 끙 하고 힘을 썼다. 그러자 이 돌우물이 땅에서 뽑혀져 땅위에 넘어졌으며 뒤이어 맑은 샘물이 쏴쏴 흘러나왔다.

이 우물은 지금까지 여전히 우물 입구가 남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으며, 우물 입구의 네모 돌에는 설인귀의 다섯 손가락 자욱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오색구름이 날아와서 만들어 졌다는 이 섬은 황제를 구원한 상스러운 곳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구름이 날아온 섬이라는 의미의 翔雲島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아예 시말을 바꿔버린 새로운 전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세민이 동정을 하던 도중 이곳에서 대승을 거뒀으며, 그래서 상스러운 좋은 곳으로 간주되어 복 자를 쓴 祥云島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대로 상운도의 우물이름과 내력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이 반도정 에는 불과 수십 년 전 까지 맑은 샘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대혁명동란시기에 파괴되어 지금은 가뭇없이 종적을 감췄다.

 

이와 유사한 전설은 낙정 현성의 바로 동북쪽에도 마을 지명 하나를 만든다.

원래 이 마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촌락이었으며 그래서 無名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옛날 무명촌에는 사찰이 여럿 있었는데, 이 중에는 열여덟 나한이 八卦鎭을 만든 사찰이 제일 유명했다.

이런 불상은 살아 움직일 듯 핍진했으며 그야말로 활불이 현신한 듯 했다.

옛날 황제가 외적(고구려군)에게 쫓겨 허둥지둥하다가 이 사찰에 와서 불상 뒤에 숨었다고 한다. 적군은 사찰까지 와서 곳곳을 헤집고 다녔지만, 워낙 사찰이 어마어마하게 큰지라 황제를 쉽게 찾지를 못했다. 이때 험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열여덟 나한 불상은 하나같이 화를 내는듯한 표정이었으며, 단박 누군가를 덮치려고 힘을 쓰는 듯 이마에 땀방울까지 송골송골 배어나고 있었다 한다. 더럭 겁이 난 적군은 꼬리 빳빳이 도망을 하였다.

황제는 위험에서 벗어난 후 감격하게 생각되어 촌민들에게 마을 이름을 물었다. 마을에 이름이 없고 자기를 구한 게 팔괘진인 줄 알게 되자, 황제는 임금을 구원한 陣容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救君陣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이름은 훗날 약칭 救陣庄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명 전설에 등장하는 황제역시 상운도의 전설처럼 태종 이세민이며 외적은 고구려 군사를 이른다고 볼 수 있다.

구진장 마을은 얼마 전부터 철거를 시작, 대형 크레인들이 수풀처럼 마을 복판에 들어서 있었다. 마을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마을 토박이를 찾는 우리 일행에게 촌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철거작업으로 인한 이런저런 껄끄러운 사연을 취재하는 기자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곳에 아파트를 세운다고 합니다.”

아까운 땅을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거요?”

촌민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고향에 모두 연연한 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구진장 마을 이름이 생긴 연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옛날 마을에 있던 사찰도 이번 철거작업이 아니라, 이미 문화대혁명’(홍위병의 난)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들의 안내로 철거현장의 동쪽귀퉁이에 있는 촌민위원회 청사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한두 달 뒤늦게 왔더라면 구진장 마을의 이름마저 카메라에 담지 목할 뻔 했다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상운도나 구진촌처럼 황제가 적에게 쫓겼다는 적에게 쫓겼다는 고사 때문에 생긴 지명은 이 지역에 적지 않았다. 이세민이 직접 북을 두드리며 적의 군대를 막았다고 하는 擂鼓臺, 당나라 군대가 거짓 식량무지를 쌓아 뒤쫓는 적을 속였다는 謊粮坨, 등등.

그런데 당나라 패잔군이 고구려 군대에게 쫓기면서 연도에 남긴 전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灤河의 서쪽에 나타나고 있으며, 또 당산지역에 대량 집중되고 있다.

이런 전설은 결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645년 늦은 가을, 고구려-당나라 전쟁에서 패배하여 간신히 살아 돌아오는 그들을, 太子 李治가 마중한 곳 역시 낙정의 북쪽에 위치한 灤縣 일대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너덜너덜한 갑옷차림을 하고 있던 李世民은 이때 비로소 李治의 손에서 새 갑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은 발해 남쪽의 山東에도 나타나며, 또 황하를 지나 멀리 장강(양자강)일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의 체면을 땅바닥에 구겨놓은 敗退는 온 세간을 들썩하게 만든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지명 이야기에서 고구려 군대를 인솔하여 당나라 군대를 추격했던 적군의 주장 淵蓋蘇文의 이름은 자주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무서운 존재였다. 황제 이세민도 두려움에 벌벌 떨었으니 그야말로 속세에 강림한 악마 같은 인물로 비쳤던 것이다.

옛날 河北省의 많은 지역에서는 세 살 나이의 코 흘리게도 ‘()개소문이 왔다.’하고 한마디 외치면 울음을 딱 그쳤다고 한다. ‘자는 당나라 때 高宗 李淵의 이름자에 들어있기 때문에 금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때부터 연개소문을 개소문으로 부르는 풍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중국 민간의 풍습인 門神은 바로 이 연개소문과 한데 이어지고 있다. 문신은 중국에서 음력 정월에 집집마다 좌우 문짝에 붙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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