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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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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찬승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8-06 13:25 조회3,5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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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자료실
박찬승 | 등급변경 | 조회 0 |추천 0 |2013.07.05. 17:22 http://cafe.daum.net/parkchan41/1dYg/23 

辛壬士禍(신임사화)

歷史와 人物

要約(요약)
王位繼承問題(왕위계승문제)를 놓고 1721年과 22年, 2年에 걸쳐 老論(노론)과 少論(소론)사이에 일어난 禍難(화난).
說明
王位繼承問題(왕위계승문제)를 놓고 景宗(경종)1年(1721年)과 1722年에 걸쳐 老論(노론)과 少論(소론)사이에 일어난 禍難(화난). 辛丑·壬寅(신축.임인)兩年(양년)에 일어났다 하여 辛壬士禍(신임사화)라 한다. 當時)당시) 老論4大臣(노론사대신)이었던 領議政(영의정) 金昌集(김창집), 左議政(좌의정)李健命(이건명), 領中樞府事(영중추부사) 李頤命(이이명),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趙泰采(조태채) 等(등)이 景宗(경종)이 子息(자식)이 없고 病(병)이 많기 때문에 王世子(왕세자)를 定(정)해야 한다고 主張(주장)하여, 1721年 8月 延孕君(연잉군)[뒤의 英祖(영조)]이 王世弟(왕세제)로 冊封(책봉)되었다. 이에 少論派9소론파)의 右議政(우의정) 趙泰耉(조태구), 司諫(사간)柳鳳輝(유봉휘) 等(등)은 時機尙早論(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不當(부당)함을 上疏(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執議(집의) 趙聖復(조성복)의 上疏(상소)로 王世弟(왕세자)가 政務(정무)를 代理(대리)하게 되자, 少論(소론)인 司直(사직) 金一鏡(김일경) 等(등)이 趙聖復(조성복)과 老論4大臣(노론사대신)을 들어 <王權交替(왕권교체)를 企圖(기도)한 逆謀(역모)>라는 疏(소)를 올렸다. 이로써 老論4大臣(노론사대신)은 罷職·流配(파직.유배)되었고, 少論(소론)이 執權(집권)하게 되었다. 1722年 3月 睦虎龍(목호룡)은 肅宗(숙종)의 죽음 前後(전후)에 老論側(노론측)이 當時(당시)의 世子9세자)였던 景宗(경종)을 弑害(시해)하고자 謀議(모의)하였다는 告變(고변)을 하였다. 이 告變(고변)에 依(의)해 鞫廳(국청)이 設置(설치)되고 逆謀(역모)에 關聯(관련)된 사람들이 잡혀와 處斷(처단)되는 大獄事(대옥사)가 일어났다. 이들은 모두 老論4大臣(노론사대신)의 아들·조카와 그들의 追從者(추종자)들이었고, 老論4大臣(노론사대신)은 이 獄事(옥사)에 連累(연루)되어 賜死(사사)되었다. 이 事件(사건)은 老論(노론)과 少論間(소론간)에 景宗保護(경종보호)와 英祖推戴(영조추대)의 大義名分(대의명분)을 내세워 對決(대결)한 것으로 보이나 結果的(결과적)으로 黨人(당인)들이 國王(국왕)을 내세워서 政權(정권)을 獲得(획득)하고자 陰謀(음모)를 꾸며 反對黨(반대당)을 逐出(축출), 自黨(자당)의 勢力基盤(세력기반)을 確保(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辛壬士禍(신임사화)에 對(대)하여

朴翰敎 敎授의 論評

朝鮮朝(조선조)의 四色黨爭(사색당쟁)을 말할 때 辛壬士禍(신임사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이 士禍(사화)야말로 黨爭(당쟁)이 낳은 政治的事件(정치적사건) 가운데에서도 가장 惡名(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朝鮮(조선)의 黨爭(당쟁)은 이 辛壬士禍(신임사화)에서 그 絶頂(절정)을 이루었던 느낌이다. 이 辛壬士禍(신임사화)를 이야기할 때 金一鏡(김일경)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이 士禍(사화)의 主役(주역)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周知(주지)하는 바 그 金一鏡(김일경)이 우리 光金(광김) 出身(출신)이었다. 그의 派系(파계)를 萬成大同譜(만성대동보)에서 살펴보면 沙溪(사계)의 曾祖代(증조대)에서 갈리었으므로 沙溪派(사계파)의 人物(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肅宗(숙종)28年 文科(문과)에 壯元(장원)하고 同(동)33年 重試(중시)에 또한 壯元(장원)을 한 바 있는 英才(영재)였다.

景宗初(경종초)에 老論政權(노론정권)이 王(왕)의 病弱(병약)을 理由(이유)로 王世弟(왕세제)[王世弟(왕세제), 延仍君(연잉군), 後(후)에 英祖(영조)]의 代理聽政(대리청정)을 主張(주장)하여 實施(실시)케 되자 少論(소론)으로서 當時(당시) 吏曺參判(이조판서)이던 金一鏡(김일경)이 少論(소론)의 領首(영수) 趙泰耈(조태구)等(등)과 함께 王世弟(왕세제)의 代理聽政(대리청정)을 撤回(철회)케 하는 데 成功(성공)하고 뒤이어 老論四大臣(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노론사대신)-金昌集(김창집), 李頤命(이이명), 李健命(이건명), 趙泰采(조태채)]을 彈劾歸養(탄핵귀양)보냈다.

이에 趙泰耈(조태구)가 領議政(영의정)이 되어 少論政權(소론정권)이 成立(성립)되면서 大司憲(대사헌)을 거쳐 刑曺參判(형조참판)에 이른 金一鏡(김일경)은 老論(노론)의 大擧肅淸(대거숙청)에 앞장을 섰다. 景宗(경종)2年(1722) 그는 老論肅淸(노론숙청)의 口實(구실)을 만들기 爲(위)하여 老論派(노론파)에 屬(속)한 睦虎龍(목호룡)을 買收(매수)하는 데 成功(성공), 老論(노론)이 景宗(경종)을 弑害(시해)하고 王位(왕위)를 빼앗으려는 陰謀(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誣告(무고)하게 했다. 景宗(경종)은 卽時(즉시) 睦虎龍(목호룡)이 指目(지목)한 嫌疑者(혐의자) 60餘名(여명)을 鞠問(국문)하니, 이들은 王世弟(왕세제)를 謀陷(모함)하기 爲(위)한 少論(소론) 및 南人(남인)들의 造作劇(조작극)임을 主張(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써 老論四大臣(노론사대신)은 次例(차례)로 죽음을 當(당)하고 200餘名(여명)이 禍(화)를 입는 慘劇(참극)이 벌어졌다. 이 獄事(옥사)는 景宗(경종)1年 辛丑年(신임년)에서 同2年(동이년) 壬寅年(인인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辛壬士禍(신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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