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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평도공 사시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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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7-01 11:14 조회5,762회 댓글0건

본문

평도공의 집터


이규태 코너 ‘풍류마당’ 사적고(事蹟考) 중에서풍류의 마당으로 개방된 겨우

1km의 동숭동거리는 지금 흔적을 찾아 볼수없는 사적이 촘촘 하게 밀집된 역

사의 거리이기도 하다 굵직한것부터 가려보자.서울대 의과대학의 남쪽 경계

즈음이 태종의 외손자요, 간신 유자광의 모함으로 젊어서 죽은 남이 장군이

태어나 자라던 집터이다. 이집터에는 장군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남이탑이
서 있었다던데, 이미 복원돼야 했을 사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남이탑

의 바로 그 이웃에는 세조때 정승이며 풍류로 우상처럼받았던 이석형(李石

亨)의 초가집 계일정(戒溢亭)이 있었다.문헌에 보면 연못을 파 물이 넘치지도
또 마르지도 않게 자연조절하여 그의 자손이나 찾아 오는 손님에게 매사를

분에 넘치지 않게 하라는 훈계를 이 계일(戒溢)로 했다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연못의 연꽃이 너무 아름다워 연지동이라는 동네 이름까지 남아

있게된 것이다. 그 초정(草亭)과 연못이 복원된다면 얼마나 좋은까 하는 생각

이다.그 연못 맞바래기에 북벌 계획을 세웠던 용기있던 반사대주의자 효종과
그의 아우 인평대군이 태어나 자라던 조양루(朝陽樓)가 우애를 상징하며 맞

바라보고 있었다. 성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락으로 소문난 옛시에 자주 오

르고 있는 다락들이다.



태종때 청빈하기로 소문난 박은(朴訔)의 집도 바로 그

길가에 있었다.높은 정승이면서 못사는 사람에게 녹을 나누어

주고 가난한 초가에서 조밥을 먹고 사는 것을 직접 숨어보던 태

종을 놀라게 했다는 바로 청빈의 집인것이다.
(下略)



북바우가 鍾岩으로

종암동의 동명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종 또는 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한자로 鍾岩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NAVER 지식IN에서--

平度公과 고암전(鼓岩田)

조선초 문신 박은(朴訔1370-1422)은 좌의정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

고 가산을 생각하지 않아 자신도 조밥과 거친 옷으로 자족하는 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태

종이 사복 차림으로 그의 집을 찾았는데 마침 조밥 식사를 하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나와

손님을 맞이하지 못함에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던 태종의 안색이 자연 좋지 않았다.이를

송구스러워 하며 사실을 말하자 태종은 놀라 믿지 못하고 “경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밥을 먹다니 말이 되느냐”면서 사람을 시켜 안으로 들어가 알아보게 하였는데 사실이어

서 이때 태종은 감탄하며 특별히 명하여 동대문 밖의 북바위 부근의 논, 밭 몇 마지기를 주

게 하였다고 한다. 이 鼓岩田은 현재 안암동 1번지 부근에 있다.

--성북구청 홈페이지에서--

 

특사고암전(特賜鼓巖田) 太宗16年(丙申1416)

임금이 은(訔)의 집을 행차하시어 특별히 고암전(鼓巖田) 밭을 하사하시다.

공은 비록 조정과 지방을 드나들며 벼슬이 신하로서 최고(最高)에 달하였으나 검

소절약하고 친목이 돈독하였으며 국가에서 받은 녹(祿俸)을 다 가난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집안은 대단히 빈한(貧寒)하였다.

어느 날 태종(太宗)이 수행원과 같이 미행하여 박은을 방문하여 문전(門前)에 오

래 서있게 되었다. 이유는 주인이 빨리 마지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괴상

하게 여기어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마침 조밥을 입에 넣고 자주 씹으나 내려가지 아니하는 고로 조금 늦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어 황공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재상이 되었는데 어찌 조밥을 먹느냐? 하고 곧바로 수행원

을 시켜 들어가 보니 과연 이로다. 임금이 감격한탄하시고 이에 특별히 청문(靑問

(동대문)) 밖 고암(鼓巖) 밭 몇 이랑을 주니 자손대대로 지키라 하였다.

은의 집은 동부(東部) 쌍백정에 있었다고 한다.


대문호 연암 박지원(1737~1805) 과 같은 시대의 이긍익(1736~1806)이 쓴 연려실기술에 있는데 지금은 실전된 책으로 ‘박씨가승’에 있는 글을 인용한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우리아버지 박지원(과정록)’은

아버지의 일생과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평도공에 대한 이야기



<
평도공과 탈속반>

일찍이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

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

그리고는 집안에 전해오는 옛 일들을 다음과 같이 낱낱이 들어 말씀해 주셨다.

우리 선조 반남(박상충) 선생께서는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시다가 흉악한 무리들에게 핍박을 받아 청교

역에서 돌아가셨다. 고향으로 운구하지 못하고 그곳에 장사지냈으

니, 바로 개성 동문 밖이었다. 선생의 집안이 가난하여 어쩔 도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반남 선생의 아드님이신 평도공(박은)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에다 병까지 겹쳤지만 뜻과 의기만은 의연하였다."

공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계셨건

탈속반(첫번 찧은 쌀로 지은 밥. 아주 거칠다.) 먹는 신세를 면

하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공의 집은 낙산(지금의 동숭동

뒷산) 아래에 있었다. 하루는 태종께서 갑작스레 공의 집에 납시었다.

태종은 공이 얼른 나와 영접하지 않은 데 대해 노여워하셨다. 그러

자 공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마침 탈속반을 먹던 중이어서 그대로 나가 전하를 뵈면 실례

가 될 듯하여 양치질을
하고 나오느라 감히 늦었사옵니다."

임금님께서 그 밥을 가져오라고 하여 확인하고는 더욱 노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저 옛날 공손홍이 삼베 이불을 덮었던 일에 해당되지 않는

가? 어찌 조정 대신으로서 탈속반을 먹는 자가 있단 말인가?"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었다.

"대신을 의지해 살아가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워낙 많아 녹봉으로
받은 쌀이 그 날 저녁이면 다 흩어져버리옵니다."

임금님께서 무안해하시며 말씀하셨다.

"내 잘못이로다.! 내가 임금이 되어서도 소시적 친구에게 탈속반을

먹게 하다니. 나는 도저히 경의 훌륭함을 따라가지 못하겠구려."

임금님은 즉석에서 동대문 밖 고암(지금의 종암동)의 전지 10결을

]하사하셨다.



박은 종손가의 입향

세거지 변천과 입향유래 (낙산 백림정) ]

평도공 박은 선생은 한양을 기반으로 잣나무(柏松)을 육성하고 살았다는 근거로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과 동숭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상백동(上柏

洞)이라 하였다. 즉 혜화동천주교회와 동성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

는 곳을 백동(잣나무골), 백자동(柏子洞)이라 불렀고, 위 천주교회를
처음에는 백동교회라 하였다

이 지명은 태종 때 박은 이 낙산 아래 이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이라는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로 겸재 정

선(鄭敾)이 그린 <東小門圖>에 보면 낙산 서북기슭의 산아래 마을

에 큰 기와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풍광을 잘 묘사해

놓고 있다.




종중기록에

소고 휘 승임 선조께서 찬(贊)한 문정공의 비문 내용중

실전 되었던 문정공의 묘소를 찾아내서 새로 사초 하는 문제를

선조 初 쌍백정 종손가(宗孫家)에서 종중회의를 하였고

16세 양근군수(현 양주군)를 지낸 지상(之相)할아버지 급제기록과

아드님인 희진(熙晉)의 진사합격기록(1687년 기록)에 거주지가 서울

로 되어있고

지상의 증손자인 장릉(章陵)참봉을 지낸 성흠(聖欽)도 서울에 살았

을것으로 추정되며

성흠의 손자인 경신(敬信 1746~1816)의 진사기록에는 본인 거주가

파주로 나온다. 아마 이때부터 문산에 정착한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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