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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朴泳孝 부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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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6-28 19:23 조회4,1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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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泳孝 駙馬 宅.

 지난 27일, 서울의 대종중사무실에 두고 온 책도 찾아올 겸 만춘 종손과 태서대부와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오랜만에 동대문 헌 책방들을 뒤지고 다녀 보았다.

예전에는 평화상가의 청계천 변의 가게를 중고서점으로 다 채웠던 모습은 아니었다. 3~4년 전에는 그래도 20여 점포가 넘었는데, 이제는 여나 문 책방만 남아 쓸쓸하게 옛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여기 들른 것은 연암선생의 열하일기의 상권(上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세권으로 발행된 책으로 한질을 갖고 있었는데누가 언제 가져갔는지 상권이 빠져 있어서 틈만 나면 열하일기를 찾으러 다녔으나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 혹시나 하고 들려보았으나 역시나 아무 책방에도 열하일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고서적이 꽤 쌓인 한 점포에 들려 그냥 나오기도 미안하여 다른 것으로 뭐라도 한권 살 것이 없을까하고 책 더미를 살피니 겹겹이 쌓인 맨 아래에 이규태(李奎泰)씨의 배꼽의 한국학이라는 책이 있기에 억지로 뽑아들고 책장을 넘기다 보니 아래 내용이 눈에 띄기에 두말없이 사들고 나왔다.

이 내용은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라고 매일 연제되던 것을 가끔씩 읽어보고 어쩌다가 옛 고인들의 단편적인 글을 보아 왔고, 집에는 이규태작가가 씨리즈로 역은 몇 권의 책이 있어서 퍽 유용하게 읽었었는데, 이번에는 여기 옮기는 단 한편의 글을 보고 사들고 온 것이다.

아래의 글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전문(全文)을 옮긴다.

 사대문 안에 외국사람을 살게 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일본 최초의 공사관은 서대문밖 청수관(淸水館)에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임오군란(壬午軍亂)에 분노한 민중에 의해 불태워지고 만다.

병력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든 일본이 다음으로 정한 공사관이 바로 철종(哲宗)의 유일한 부마요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박영효(朴泳孝)가 살던 집이였다.

지금 경운동(慶雲洞) 천도교회와 이웃한 관훈동(寬勳洞) 30번지 일대에 부마댁(駙馬宅)의 법도대로 대지가 1000평이요 건평이 50칸으로, 지금의 평수로 환산하면 무려 265 건평이나 되는 대단한 집이였다.

일본이 이 집을 구입, 솟을 대문과 그에 붙은 행랑, 그리고 공사관원들의 주거를 위해 사랑채만을 남겨두고 몸채를 헌 뒤 그곳에 위아래 240평 남짓한 목조 2층 양옥을 지어 낙성시키고 있다. 그것이 1884113일이었다.

서울 최초의 2층 양옥집이었던 그 건물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낙성한지 겨우 한 달 만에, 원 집주인이었던 박영효 등이 주동한 갑오개화정변(甲午開化政變)이 일어나, 쿠데타에 실패하자 주모자인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이 이 공사관으로 피신했으며, 127일 백성들은 횃불을 들고 포위한 후 이 공사관을 불태워 버렸다. 일본 공사를 비롯하여 거류민과 일본군 1개 중대, 그리고 그 틈에 낀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한강을 건너간 후의 일이었다. 그날은 눈이 몹시도 많이 내렸다고 한다.

기구한 한국근대사의 한 일면을 증명해 주는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솟을대문 양쪽으로 있었다는 행랑채도 없어지고 집 지을 때까지 일본공사가 집무를 했었다는 사랑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후에 벼락부자가 된 이용익(李容翊)대감과 공주(公州)갑부 김갑순(金甲淳)이 그 집에 살았다 한다.

 지금은 서울 민속자료 18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한 뜻있는 사람이 이 집을 사들여 70여 평되는 행랑채를 주축으로 순 한국풍의 미술관을 만들어 엊그제(1983.12.6.)개관 했다. 인사동 골동품 가게와 이어지는 관광코스로서 십상인 것이다. 더욱이 이 일대는 안동김씨 세도시대인 철종 때의 세도의 핵심부였다.

바로 그 미술관 동쪽으로 이웃한 집(경운동 66)이 세도의 핵심이었던 교동대감 김좌근(金左根)이 살았던 집이다. 조선팔도 360고울 수령들의 뇌물 행렬이 일 년 열두 달 끊이지 않았던 바로 그 집이다.

( 부마댁의 동북쪽, 덕성여대를 지나 운니동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내준 대원이 대감댁이다.)

따지고 보면 서울은 관광자원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외형적으로 남아 있는 것만을 찾으려 들지 말고, 이 같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을 발굴하여 재구성, 그 내력을 적어 놓기만 하면 훌륭한 관광지가 되는 것이다. 관민(官民) 간에 이 역사 관광개발에 머리를 써주었으면 한다. (1983. 12. 9.)

  이규태. 배꼽의 한국학중에서.


급히 위의 글을 옮기고 나자 문득 다른 기록도 있었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현재 고려대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경원대학교 아세아문제 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박은숙 교수의 갑신정변연구에서 읽은 기억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때의 기록의 대강을 따라가 본다. 확실히 일고의 가치가 있는 기록이므로 대강 필기하여둔 것이 있어 이제 그 기록을 옮겨 적는다. 

현재 헌법 재판소 안, 백송이 서 있는 부근에 환재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박규수는 김옥균의 과거 시험 시관이었고, 박영효의 일가였으며 홍영식의 이웃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박규수의 집 사랑에는 박영효, 박영교, 형제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같은 젊은 인재들이 모여 들었다. 
박규수는 이들 젊은이들과 연암집을 읽고 개혁사상을 논의했으며, 중국에서 들어오는 신사상을 소개하고 조선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박규수의 집은 개화사상이 싹트는 온상이자, 개화당 형성의 아지트가 되었다. 

박규수의 집에서 바로 아래쪽에 서광범의 집이 있었는데, 안동별궁과 담장을 맞대고 있었다. 현재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경계지대나 덕성여고 남쪽 일대로 생각된다. 
서광범의 집에서  경복궁의 광화문과 창덕궁의 돈화문을 잇는  길(현재의 율곡로)을 건너 조금 내려가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박영효의 집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 오순덕계 교동에 있었다. 
현재 종로구 경운동 88번지로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이다. 
왕실의 부마였던 박영효의 집은 대지가 2,177평에 달하는 대저택으로, 1,215평인 지금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두 배 정도에 달했다. 
박영효는 1883년 5,000원을 받고 일본 공사관에 이 집을 팔앗다.. 일본 공사관은 이곳에 2층 양옥을 짓고 공사관으로 사용했으나, 갑신정변 때 서울 주민들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박은숙의 갑신정변의 연구 에서


박은숙교수는 그의 글에서 부마저택을 팔은 5,000원의 사용처를 그 이듬해 일어난 갑신정변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있다 
즉 거사자금을 위하여 그 부마저택을 팔았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의견이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추측으로 본다. 혁명을 꿈꾸는 피끓는 젊은이가 큰 저택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피 끓는 젊음은, 용의주도하지 못하였고 무모했으며 더구나  무력의 뒷밭침도 없는 쿠데타였던 것이다.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일본의 무력도, 공사관을 경비하기 위해 들어와 있던 겨우 1개중대의 무력에 불과 하였으니, 이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반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1884년 10월 19일(양12월6일), 정변의 마지막 날, 개화당은 실패를 깨닫자 퇴각을 결정했다.
주군이 없는 정변이 어찌 견딜수 있으랴. 단숨에 역적의 무리로 전락한 개화당의 동지들은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창덕궁의 후문으로 궁궐을 빠져 나온 다음,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따라 교동의 일본 공사관으로 도망쳤다. 
그 때가 저녘 7시 30분경이었으며, 막 떠오는 달이 그들의 등을 따라오고 있었다.
도망가는 개화당원들의 등 뒤로 '왜놈 죽여라.역정 놈 잡아라."라는 민중들의 함성이 빗발쳤고, 돌맹이와 총탄이  계속 날아들었다. 
일본 공사관은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쫒기는 그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졌으나, 그들은 일본 공사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10월 20일 낮 정오부터 조선의 군인들과 민중들이 일본 공사관을 향해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며 공격을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본국으로의 퇴각을 결정하고 자국의 군대와 민간 거류민을 이끌고 인천을 향하여 공사관을 출발했다. 개화당의 일행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서대문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동안 조선 군민의 공격은 계속 되었고, 심지어는 용산의 한강변에는 조선의 군인들이 매복해 있다가 거세게 공격하여 박영효는 다리에, 김옥균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그들 일행과 일본인들은 살 얼음이 언 한강을 완전히 건넌것은 오후 5시 30분 쯤으로, 짧은 겨울의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이미 날은 어두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추위와 공포에 떨며 일본인들 틈에 끼어 밤새 걸어서 인천에 도착 하였다. 이때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따라간 사람은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로, 이규환, 정난교, 신응희, 등 9명이었다. 

이들은 10월 23일 일본의 우편선치토세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단 3일천하의 꿈은 이렇게 비참한 운명을 만났으나, 문제는 서울에 남겨진 그들의 가족이었다.  

왕실의 부마였던 박영효의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박영효는 형인 박영교와 함께 정변을 주도 했으니, 형제가 모두 역적이 되었다. 
아버지 박원양(朴元陽)은 이제 겨우 열 살인 박영교의 아들, 곧 자신의 손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박영교는 군중의 손에 길거리에서 죽었으니, 그 치른 댓가가 너무 잔흑하고 무서운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박원양의 시신은 어윤중(漁允中)과 김윤식이 거두어 묻어 주었다고 한다.
어윤중은 어려서 박원양에게 글을 배워 사제의 정이 있었고,
김윤식은 매부의 형인 박원양과는 사돈의 관계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역적의 아비를 장사지냈다는 이유로 "역적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박영효 부마댁은 갑신정변의 회오리 속으로 살아져 갔으며, 오늘날 그 자리는 역사의 가르침을 알려는지 모르겠다.  

                        2013년. 6월의 마지막 날 평택의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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