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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제잡기" 와 "청송심씨 가승 (靑松沈氏家乘 )"

페이지 정보

박찬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4:17 조회1,786회 댓글0건

본문


"기제잡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헌묘(태종의 묘호)가 상왕궁에 있고 심온이 국구로서 수상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시기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심온은) 되돌아 압록강에 이르자 마자 붙잡혀 수원으로 귀양갔다가 이내 죽음을 받았다. 온이 죽을때에 가족들에게 이르기를(대대로 박씨와는 혼인 하지 말라‘ 하였다“ 하기로
드디어 우리선조 평도공이 그당시 좌상으로서 그의 죽음에 당하여 유력하였기 때문에,
깊이 원망하여 이런 유명이 있었던 것으로 여겼었다.


내가 일찍이 국사 교정에 참여하였었는데, 총망중이어서 비록 그전말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나 그 경개(개요와 같음)를 대략 알고 있다.

도총제 심정은 심온의 아우이었는데 하루는 병조판서 박습과 서로 이야기 하다가 자연 말이
“요즘 호령이 두곳( 상왕 태종과 세종)에서 나오므로 대단히 불편하여 한곳에서 나와 전일한 것만 못하다” 고 하였으니 그뜻이 대개 국군의 대사는 반드시 상왕께 품의하게 되어있으므로 두곳에 거듭 품의할 때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때 경연에서 강론이 끝나면 입시하였던 대신들이 모두 상왕 宮에 가서 배알하고 경연중에 있던일을 차례로 아뢰고 더욱 세밀한 조사를 하였으며, 비록 경연에서 모시는 신하가 아닐지라도 재상 반열에 드는 종관(從官)은 모두 들어가 일을 논하는데 참여하게 하였으므로 바깥의 크고 작은일과 오가는 말을 임금에게 아뢰지 않는것이 없었다.

그래서, 심정의 말도 나오게 된것인데, 그말을 아뢴사람의 이름은 잊었으나 병조정랑(※ 병조좌랑 안헌오)인듯하다 임금이 벼락같이 노하여 드디어 국문하라 하였으나,
죄인들이 전가하고, 끌어들여 경대부 10 여명에게 까지 연루되었는데, 죄를 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다 장차 ‘함께 모의하여 난을 꾸미고, 알면서 고하지 않은 죄’로 논하기로 하였다.

상왕은 생각에 “이것이 어찌 심정 혼자서 한말이겠는가? 반드시 심 온의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집사람들이 모두 이런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여겼고
우의정 유정현, 성산부원군 이직등이 모두 심온의 평소에 좋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므며,
좌우의 사람들도 각각 그의 허물을 말하였다.

평도공도 말하기를
“심온이 국구이므로서 의당 수상이 되어야 하는데, 수상은 직위만 높았지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은 으레 이조.예조.병조판서를 겸임하며, 우상은 으레 형조.호조.공소 판서를 겸임 하므로, 심온이 권세없는 것을 꺼려 꼭 좌상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니. 권세를 탐내 법을 무너뜨리는 뜻을 여기에서 알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인정에 누가 권세 잡기를 마다 하겠오, 좌상의 이말은 할 필요가 없을것 같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박습등은 지금 마땅히 처형하겠지마는 저 심온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 것인가.” 하니 누군가 말하기를
“심온이 만일 이 소문을 듣는다면 반드시 도망하여 숨어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혹은
“중국에 무고하여 변란을 선동하여 화를 일으킬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하였고 혹은 또,
“몰래 본국에 돌아와 붕당을 만들어 난을 일으키는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의주에서 압록강위를 순찰하여 한
사람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고 , 아울러 강계이하 일대에도 유시를 내리어 일률적으로 순찰하게 하소서” 하였다 유정현이 말하기를,
“박습 등이 죽으면 심온이 변명하여 증거댈 길이 없게 될 것이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
다” 하여 중론이 일치하지 아닌하여 분분하게 일어났었고, 평도공이 말한 것은 비록 유정현이,
"단연코 박습의 처형을 보류하지 말자“ 고 한 것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나 또한 결정적인 말이 없었다.


상왕이 마침내 의금부에 의논에 따라 박습등을 베이고, 심온이 수원에 귀양간 되에 상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곡절을 묻자. 은이 대답하기를,
“이런 말은 무두 신이 중국에 간 뒤에 나온 말이오니, 발언한 사람과 대면하여 밝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왕이 또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박습이 이미 죽었으니 무엇으로 밝힐 수 있겠는가 ? 경은 왕비의 아버지 이므로 죽음을 내리는 것으로 그치니, 경은 나의 뜻을 알라” 하였다. 이런사실로 보면, 깊이 원망한 데는 유 정현에 있는것 같고
‘혼인 하지말라’는 유명은 박씨 가문에 대해서 였다. 아니면 깊은 원한이 유정현에 비한 바가 아닌 것이 그 중에 있으면서도 다만 한 집안에만 전해오고 국사(國史)에는 기록이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알수 없게 된 것이아닐까 ?

지금 170 여년이 지났는데도 심씨 가문에서 대대로 지켜 감히 혼인하지 못하고, 다만 현령 심융 한 사람만이 박씨 집안 사위가 되었는데 또한 자녀가 없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기재잡기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지은 역사책
필사본. 7권 1책. 조선 초기부터 명종에 이르는 역대의 야사(野史)를 기술하였으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제1권은 조선 초부터 연산군까지,
제2권은 중종,
제3권은 중종부터 명종까지의 구전(口傳)되는 일화와 기타 사실(史實)들을 기록하고,
저술자의 의견도 간간이 삽입하였다. 정사(正史)에 빠진 채 전해지는 기사(奇事)를 포함하여 명인들의 전기(傳記) 및 시사(時事)와의 관계도 보충하였다. 특히 중종 이후의 부분에 힘을 기울였는데, 중종반정 등에 관한 서술은 주목할 만하다.



평도공과 심온의 기록은 청송심씨 가승(靑松沈氏家乘) 에 朴氏와 혼인하지 못하도록 한 유언의 내용을 소개하고 아울러 寄齋雜記 를 함께 기록이 있다,


기재잡기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지은 역사책
필사본. 7권 1책. 조선 초기부터 명종에 이르는 역대의 야사(野史)를 기술하였으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제1권은 조선 초부터 연산군까지, 제2권은 중종, 제3권은 중종부터 명종까지의 구전(口傳)되는 일화와 기타 사실(史實)들을 기록하고, 저술자의 의견도 간간이 삽입하였다. 정사(正史)에 빠진 채 전해지는 기사(奇事)를 포함하여 명인들의 전기(傳記) 및 시사(時事)와의 관계도 보충하였다. 특히 중종 이후의 부분에 힘을 기울였는데, 중종반정 등에 관한 서술은 주목할 만하다



靑松沈氏家乘

( 편자미상. 연기미상. 5책. 필사본. 33. 5 23. 5cm.)
靑松 沈氏 가문의 인물둘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한 책. 표지에는 沈氏家乘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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