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 휘김종직 영주 소루기
페이지 정보
본문
기(記)
| 영천의 소루기[榮川小樓記] |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榮川)이 두 번째가 된다. 그 산천(山川)은 밝고 빼어나며, 그 고을 터는 확 트이었고, 그 백성들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다. 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온 사람은 가끔 군자(君子)다운 사람이 많았으나, 그 중에도 남의 이목에 뚜렷이 뛰어난 이는 하호정(河浩亭 호정은 하륜(河崙)의 호임) 및 최공 원유(崔公元濡)와 정공 습인(鄭公習仁)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인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 또한 이 세 사람과 같이 칠 수 있는 분이다.
정공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헌부(司憲府)의 관직을 사직하고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왔는데, 그가 설시(設施)한 모든 것은 마치 현보(縣譜)가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신실(信實)함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운 은혜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며, 계책이 있는 자질을 사용하여 다스리기 쉬운 백성들을 교화시키되, 비유하자면 마치 포정(庖丁)이 두께가 없는 칼날을 가지고 틈새가 있는 소뼈 사이를 칼질하듯 하였으니,대저 막힐 걱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하여 1년도 채 안 되어서 정사가 잘 되고 백성들이 화락하였다. 그러자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使臣)과 빈객(賓客)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게 마련인데,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창롱(窓櫳)이 푹푹 쪄서 맑은 바람을 쐬어 번열을 제거하려고 할 적에 사신은 이 누각이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한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관우(館宇)의 자리를 빙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데없는 집 한 채를 얻었다. 그래서 이를 넓히어 새롭게 만들되, 그 기둥을 전보다 약간 높이고 곁으로는 난간을 둘렀으며,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고 두어 말[斗]의 물고기를 종어(種魚)로 넣었으며, 못 안에 있는 섬[島]에는 참대[苦竹] 8, 9그루를 심고 잡화(雜花)들을 그 사이에 간간이 심었으며, 난초와 지초[蘭芷]는 그 언덕을 덮고 연[芙蕖]은 그 물결을 가리웠다.한창 벽(壁)을 도장(塗裝)할 적에 처음으로 내가 올라가서 보니, 소나무는 죽 열을 지어 서 있고, 울타리는 조용하며, 새파란 밭이랑과 누런 논두렁은 마치 수놓은 것처럼 서로 엇갈리어 준조(罇俎) 앞에 서로 비치었다. 그리고 뽕을 따고 김을 매는 사람들은 그늘에서 쉬지 못하거나 소송(訴訟)을 하는 사람들은 장벽에 막힐 걱정이 없어, 농사를 권장 독려하고 소송을 판결하는 정사에 도움이 되는 것도 적지 않았다. 내가 이에 술잔을 잡아 주인(主人)에게 경하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의 수령들 가운데 나약한 자는 남에게 얽매임을 받아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여, 비록 관부(官府)가 퇴락해져도 적당히 괴고 붙들어서 세월만 보낼 뿐, 감히 손 한번 놀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강한 자는 자기의 지교(智巧)를 뽐내어 민력(民力)을 함부로 동원해 쓰면서 승품(承稟)했다고 핑계를 대고 끝없이 집을 짓거나 수리하곤 하여, 심지어 천실(千室)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매를 맞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선생이 한 것은 그렇지 않아서, 여력(餘力)을 이용하여 옛 것을 인하여 새롭게 만들고 어두운 것을 인하여 환히 탁 트이게 하면서, 털끝만큼도 백성을 수고롭게 하거나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군청[郡朝]에 있는 사람도 이 역사(役事)가 있었는 줄을 몰랐거니와, 지나가는 나그네가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할 수 있어 더위먹는 것 방지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이른바 어진 사람의 처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이 곳에 와서 일을 하는 이가 모든 일을 선생으로 모범을 삼는다면 거의 현명한 수령이 될 것입니다.
[주D-001]현보(縣譜) : 치현보(治縣譜)의 준말로, 즉 고을을 다스리는 요령(要領)을 기록한 문서라는 뜻이다. 남제(南齊) 때 부승우(傅僧祐)가 산음령(山陰令)이 되어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겼는데, 그의 아들인 부염(傅琰) 또한 영강령(永康令)과 산음령을 지내면서 치적이 워낙 뛰어나 부성(傅聖)이란 칭송을 받았고, 손자인 부검(傅劍) 또한 오현령(吳縣令)과 산음령을 지내면서 훌륭한 치적을 남겼으므로, 세상에서 전하기를 “부씨(傅氏) 집안에는 치현보가 있는데, 자손들이 서로 전하면서 남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포정(庖丁)이……칼질하듯 하였으니, : 재능이 뛰어나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매우 여유가 있음을 비유한 말. 옛날 포정(庖丁)의 말에 “저 소의 뼈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는데,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새가 있는 소뼈 사이에 넣으므로, 그 칼날을 휘두르는 데에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養生主》
[주D-002]포정(庖丁)이……칼질하듯 하였으니, : 재능이 뛰어나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매우 여유가 있음을 비유한 말. 옛날 포정(庖丁)의 말에 “저 소의 뼈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는데,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새가 있는 소뼈 사이에 넣으므로, 그 칼날을 휘두르는 데에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養生主》
점필재는 영남학파에 종장에 한분이시고 제자들이 배향된 성균관 5월11일 석전대제 참석 홍양대부님
찬철씨 오창공 종손 만춘씨 수고하셔습니다 졈필재 문집에서 인천우거 에서 찬승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