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997
  • 어제801
  • 최대1,363
  • 전체 308,031

자유게시판

금성부원군 신도비명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4-09 16:12 조회4,173회 댓글0건

본문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錦城府院君朴公神道碑銘
幷序

惟朴氏遠有譜諜。按高麗直右文館諱尙衷。以抗疏言大計。賈禍而名益重。寔生諱訔。佐我太宗。致位議政。錄勳佐命。封錦川府院君。諡平度。諱薑。錄勳佐翼。封錦川君。諡世襄。諱䎩。仕至軍器寺正。仍世席蔭顯。則已致寺正。歷秋冬二曹郞署。擢貳柏府。爲中丞。又牧忠州。所至有稱。配成氏。永春縣監孝源之女。昌寧府院君士達之世也。公初諱壕。字仲保。後避時宰。改名墉。寺正有四子。公序居二。自幼力學不懈。中乙卯司馬。雅善松雪書。大爲流輩所推。累擧不諧。遂從保任。初授典設司別提。轉義禁府都事。陞掌苑署掌苑。由工曹佐郞。出補洪州判官。任滿。入爲軍器寺判官。自是內敍者六。曰忠翊府都事,漢城府判官,繕工監判官,內贍寺主簿,司畜署司畜。外敍者二。曰蔚珍縣令,殷栗縣監。公初娶僉知中樞府事金琚之女。無嗣。繼室金氏。司宰監副正益謙之女。嘗夢有神人授珠之異。感而有娠。篤生聖女。卽恭懿王大妃也。公在殷栗。邑人夢公挾少女。攀龍胡升天。未幾。中廟爲儲宮。妙選淑德。遂膺六禮之聘。公亦用是。右授宗親府典籤。尋陞敦寧府副正。公素患腫脹。至是轉革。特命超拜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兩宮醫問。絡繹於第。竟不起。公生于成化戊子。終于嘉靖甲申。春秋五十有七。賻錫之典。比例有加。追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是年九月初六日。禮窆于楊州天寶山北麓。乙未。以始卜不審。山多壓忌。改卜南麓艮坐坤向之原。徙營兆域。實十二月二十八日甲寅也。乙巳。榮靖大王嗣位。加贈公領議政錦城府院君。公器宇閎厚。不妄言笑。興官耆事。動疆人意。積慶鍾女。身爲儲舅。宜享丕祉。貴未踰月。遽至奄忽。理數之戾。世皆惑焉。公配。封聞韶府夫人。性和厚無忌。理家亦睦。僕妾感其恩。宗姻懷其惠。閨閫之內。無不得其懽心。庚戌。夫人疾篤。王大妃躬幸候問。病已不可爲矣。竟以是終。六月二十七日也。享年僅周一甲。就公兆配葬焉。公素無嫡嗣。取伯兄坡州牧使基之次子諫爲後。嘗爲軍資監判官。側室有二男一女。男長曰春丁。屬忠贊衛。次曰評。屬族親衛。女適銀城副令鏘。判官娶春川府使成詢之女。生二男三女。男長曰浚。娶柳光植之女。餘幼。女皆未行。春丁生二男曰深,曰渭。銀城生一男六女。男曰宜山監瑊。女長適內禁衛金彥誠。餘幼。諫推宿契謂余曰。子知先子熟。敢屬銘。銘曰。寶系衍瓠。派別潘南。遙緖攸屬。秀動朝簪。眼高喙勁。盡言危邦。策屈道直。九死靡降。歸成兒做。翊我興王。秩登端揆。功載旂常。繼繼官封。施及公身。四命躋公。豈曰因人。實生盛德。母儀一國。宜羨五福。壽反居嗇。寔果何尤。造物之憒。托嗣有人。足慰冥昧。蔚彼寶麓。穹碑巋然。是謂公藏。過者式焉。


박씨(朴氏)는 먼 윗대부터 족보가 있었다. 살펴보건대, 고려(高麗) 때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휘(諱) 상충(尙衷)은 항의의 상소를 올려 대계(大計)를 말하였다가 화를 초래함으로써 명성이 더욱더 났었고 그의 아들 휘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보필하여 벼슬은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어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평도(平度)의 시호를 받았다.

박강(朴薑)은 좌익 공신(佐翼功臣)이 되어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지고 세양(世襄)의 시호를 받았다.
휘 치(耒甾)는 벼슬이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이르렀는데, 대대로 가문의 음덕(蔭德)으로 인해 벼슬하다 보니, 이미 군기시 정에 이른 것이다. 형조 좌랑(刑曹佐郞),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사헌부(司憲府)에 발탁되어 중승(中丞, 집의(執義))이 되었으며,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칭송을 받았다. 그의 부인 성씨(成氏)는 영춘 현감(永春縣監) 성효원(成孝源)의 딸인데,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사달(成士達)의 후손이다.

공의 처음 휘는 호(壕)이고 자(字)는 중보(仲保)였는데, 뒤에 당시 재상의 이름을 피하여 용(墉)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군기시 정이 4남을 두었는데, 공이 둘째 아들이다. 공이 어려서부터 게을리하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을묘년(乙卯年, 1495년 연산군 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평소 송설(松雪, 원(元)나라 문인(文人) 조맹부(趙孟頫)의 호(號))의 서체를 잘 써서 동료들에게 대단한 추앙을 받았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되지 않자 음직(蔭職)을 통해 처음에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에 임명되었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전직되었다가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으로 승진한 뒤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거쳐 홍주 판관(洪州判官)으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조정으로 들어와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이 되었다. 이때부터 내직(內職)에 여섯 번 임명되었는데, 충익부 도사(忠翊府都事),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사축서 사축(司畜署司畜)이었고 외직(外職)에 두 번 임명되었는데, 울진 현령(蔚珍縣令), 은율 현감(殷栗縣監)이었다.공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거(金琚)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이어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김익겸(金益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신인(神人)이 구슬을 주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잉태하여 성녀(聖女)를 낳았는데, 바로 공의 왕대비(恭懿王大妃, 인종비(仁宗妃) 박씨(朴氏))였다.

공이 은율 현감으로 있을 적에 그 고을 사람이 ‘공이 소녀(少女)와 같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중종(中宗)이 미덕(美德)을 갖춘 세자빈(世子嬪)을 간택할 때 공의 딸이 육례(六禮)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공도 이로 인해 종친부 전적(宗親府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돈녕부 부정(敦寧府副正)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평소 종창(腫脹)을 앓다가 이때에 이르러 점점 심해지자 특별히 명하여 몇 단계를 건너뛰어 절충 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였다.
대전(大殿)과 동궁(東宮)에서 보낸 의관(醫官)이 문전에 줄을 이었으나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성화(成化)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14년)에 태어나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 19년)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조의 은전(恩典)이 관례보다 더 후하였고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領經筵事監春秋館事)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이해 9월 6일에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북쪽 산기슭에 장례를 치렀다가 을미년(乙未年, 1535년 중종 30년)에 이르러 처음 묘소를 잡을 때 살피지 않아 해로운 산이 많다고 하여 다시 남쪽 산기슭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자리를 잡아 이장하였는데, 12월 28일 갑인일(甲寅日)이었다.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 영정 대왕(榮靖大王, 인종(仁宗))이 왕위를 이어받아 공에게 영의정(領議政), 금성 부원군(錦城府院君)을 더 추증하였다. 공은 그릇이 크고 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관청의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그때마다 사람의 뜻을 강하게 하였으며 경사를 쌓고 훌륭한 딸을 낳아 자신이 국구(國舅)가 되었으니, 의당 큰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귀하게 된 지 한 달이 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이치가 착오된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공의 부인은 문소 부부인(聞韶府夫人)에 봉해졌다. 성품이 화평하고 후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가정을 화목하게 다스려 노복과 첩들이 은정에 감화되고 일가들과 인척들이 은혜에 감동하는 등 가정 내에 환심을 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에 부인의 병환이 위독하자 왕대비(王大妃)가 몸소 찾아가 문병하였는데, 그때 병환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결국 6월 27일에 향년 겨우 61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공이 본래 적통의 아들이 없어 큰형 파주 목사(坡州牧使) 박기(朴基)의 둘째 아들 박간(朴諫)을 후사로 삼았는데, 그가 일찍이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측실(側室)에게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박춘정(朴春丁)은 충찬위(忠贊衛)에 속해 있고 둘째 아들 박평(朴平)은 족친위(族親衛)에 속해 있으며, 딸은 은성 부령(銀城副令) 이장(李鏘)에게 시집갔다. 판관은 춘천 부사(春川府使) 성순(成詢)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박준(朴浚)은 유광식(柳光植)의 딸에게 장가들고 둘째 아들은 어리고 딸은 시집가지 않았다. 박춘정은 2남을 낳았는데, 박심(朴深), 박위(朴渭)이다. 은성 부령은 1남 6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의산감(宜山監) 이감(李瑊)이고 큰딸은 내금위(內禁衛) 김언성(金彦誠)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박간이 옛날의 교분을 생각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선친을 알고 있는데, 누구가 감히 묘갈명을 맡겠는가?”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신라 왕실의 줄기가 뻗어 파가 반남(潘南)으로 나뉘었도다. 유구한 실마리에 속하니, 조정에 훌륭한 벼슬아치가 났도다. 견해가 높고 언론이 강직하니, 나라가 위태롭자 말을 다했도다. 계책은 못 펼쳐도 도(道)대로 행하니, 아홉 번 죽어도 굽히지 않았도다. 돌아가 훌륭한 아들을 육성하니, 우리 임금을 도와 일으켰도다. 품계는 정승의 반열에 오르고 공로는 봉상시(奉常寺)에 기록되었도다. 대대로 관작이 봉해지니, 공의 몸에까지 이르렀도다. 사명(四命)으로 공을 끌어올리니, 어찌 사람으로 인한 것이겠는가? 실로 훌륭한 따님을 낳으니,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었도다. 마땅히 오복(五福)을 누려야 할 터인데 수명이 도리어 짧았도다. 이게 과연 누구를 탓하겠는가? 조물주가 시기한 것이었도다. 후사를 맡길 사람이 있으니, 족히 지하에 계신 공을 위로할 수 있도다. 웅장한 저 천보산 기슭에 높은 비석이 우뚝이 섰도다. 이것이 공의 무덤이니, 지나는 이들은 경의를 표할지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