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康公 朴紹 碑文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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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경남 합천 화양리에 소재한 박소의 비문<세로5열>은 다음과 같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
議政兼領 經筵弘文館禮文館
春秋館觀象監事行朝散大夫守
司諫院司諫知製 敎兼春秋館
編修官承文院參校朴紹之墓
우선 비신(碑身)의 규격에 맞춰 전면에 품관직(品官職)을 기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공란으로 띄어두는 등 한자의 연결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게 된다. 따라서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 품관직을 일단 분리해서 읽어야 한다.
1. 증(贈) : 사후에 추증(追贈)되었다는 뜻이고,
2.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우선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정1품 상계>로서 품계(品階)를 나타낸다. “의정부”는 관청(官廳)이고, “영의정”은 직(職)이다. 그래서 품관직이라고 한다. 흔히 영의정으로 약칭되는 영의정의 공식명칭이다. 조선시대에 정1품이 맡을 수 있는 실직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딱 3자리 뿐이다. 그런데 영의정은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정1품 상계이며 나머지 좌의정과 우의정은 보국숭록대부로 정1품 하계의 품계를 갖는게 보통이다. 따라서 정1품 상계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오로지 영의정 1자리 뿐이다. 그래서 영의정을 가리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1인은 임금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3. 겸(兼) : 겸직을 말하며 영의정에게는 당연직 겸직이 매우 많다.
4. 領 經筵 弘文館 禮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
첫단어 영(領)과 끝단어 사(事)를 연결해서 영사(領事)라는 직인데, 관청의 이름을 그 사이에 쓴다. “경연”은 국왕교육기관으로 국왕 직계아문이다. 왕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경연에 참석해서 신하들[겸직 참찬관]로부터 강의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보통 조강(朝講) 석강(夕講)이라고 한다. 머리가 나빠서 이 경연을 내심 혐오했던 왕이 바로 중종이며 반대로 경연을 강조했던 정암 조광조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갈린 것이다.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등의 관청은 예조 속아문으로 주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담당하는 문한직(文翰職)이다.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는 1인을 보통 문형(文衡)이라고 하는데 “문형 1명과 정승 3명을 안바꾼다”고 하는 조선시대 최고명예직이다.
5. 행(行) : 품계는 높은데 관직이 낮을 때 쓰는 표현이며 행직이라고 한다.
6. 조산대부(朝散大夫) : 종4품 상계의 품계를 뜻한다. 실제로 종4품 상계 조산대부의 품계였는데 사후에 정1품 상계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조산대부 앞에 행자를 붙였다. 행조산대부
7. 수(守) : 행과 반대로 품계는 낮은데 높은 관직을 맡으면 앞에 수자를 쓰며 수직이라고 한다. 행과 수를 합쳐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한다.
8. 司諫院司諫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 承文院參校
사간원사간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승문원참교
사간원사간<종3품> : 실직 1명
지제교<정3품~종6품> : 교서(敎書)를 작성해 올리는 관직으로 문한들이 겸직한다.
춘추관편수관<정3품당하관~정4품> : 겸직
승문원참교<종3품> : 실직 1명
여러 문헌에 박소의 최종관직은 사인(舍人)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의정부사인은 조산대부<상계>나 조봉대부(朝奉大夫)<하계> 가 맡는 정4품 관직이다. 따라서 박소는 최종적으로 조산대부 의정부 사인의 품관직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또 여기에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중종실록>에 보면, 1527년(중종22) 7월에 사인(舍人) 박소(朴紹)의 기록이 있고, 몇 년 뒤인 1530년 4월 7일자 기사에 “박소를 사간(司諫)에 제수하였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간은 中直大夫<상계> 나 中訓大夫<하계> 가 맡는 종3품 벼슬이므로 박소의 비문에 있는 朝散大夫와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1530년 4월의 사간 제수는 품계의 가자(加資)없이 맡은 수직(守職)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비문과 일치한다.
박소(1493~1534)는 1694년(숙종20) 11월 3일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96년(숙종22) 7월 24일에 문강(文康)으로 증시(贈諡)되었다. 그렇다면 사후 무려 160여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손녀딸이 왕비[의인왕후]에 책봉된 년도[1569년]로만 따져도 무려 120여년만의 일이므로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무심함이 지나치다할 것이다.
박소의 비문에 증영의정(贈領議政)만 있고 증시(贈諡) 및 시호(諡號) 표현이 빠진 것으로 보아서 박소의 묘비는 혹시 증시 이전인 1695년경에 건립된게 아닐까 한다.
<읽기쉽게 분리한 비문>
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 禮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
行 朝散大夫
守 司諫院司諫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 承文院參校
朴紹 之墓
* 세양공파 대종손 우(雨)자 돌림의 큰누나가 저의 외조모입니다.
* 그리고 경기도 연천에 세거했던 저의 집안은 중시조이래 8대에 걸쳐 문강공 박소의 후손들과 6번의 혼사가 있었습니다.
* 혹시 결례가 아닐까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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