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38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37

자유게시판

반남면 대형옹관 위대한 문화유산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3-10 05:55 조회6,683회 댓글0건

본문

영산강 지역 대형 독널 (옹관)

<그림 1>영산강 지역 대형 독널삼국시대/4~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독널[옹관甕棺]’이란 항아리나 독 2~3개를 맞붙여 만든 관(棺)을 뜻한다. 인류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로 많은 나라에서 독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고, 조선시대까지도 독을 관으로 이용하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대형 독널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시실 한 가운데 엎어놓은 장독?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 전시실에 거대한 독 10여기가 거꾸로 뒤집어져 놓여 있다. 언뜻 보기에 흔한 항아리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볼륨 없는 커다란 독을 뒤집어 놓아 ‘∩’ 모양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그림 1) 작은 것은 높이 70cm, 큰 것은 170cm에 이르는 이 독들의 설명 패널에는 “4~5세기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하였던 무덤으로 그 지역의 권력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적혀 있다. 즉 이 독들은 삼국시대 영산강 인근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넣어 땅에 묻기 위해 사용했던 관(棺)이며, 원래 형태는 지금처럼 엎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독 2개가 입구를 맞대고 캡슐처럼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그림 2).

<그림 2>독널, 나주 신촌리 9호분삼국시대/5세기, 토제, 결합길이 250cm, 국립중앙박물관

이들 영산강 유역 고분에서 발굴 조사된 독널들은 삼국시대의 매장문화(埋葬文化)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된 나무로 만든 관[목관(木棺)]이나 곽[(木槨)]도 아니고, 고구려나 백제처럼 돌이나 벽들을 이용하여 방[석실(石室)]을 만들지도 않았다. 넓은 들판에 흙을 쌓아 높은 봉분(封墳)을 만들고, 그 위에 전례 없이 거대한 독널을 안치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이렇게 거대한 독널이 시신을 담는 관으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 당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림 3>신촌리 9호분 을관의 유물 출토상황국립광주박물관

영산강 지역에서 발견된 독널은 그 크기에 있어서 다른 지역, 다른 시기의 독널을 압도한다. 청동기시대의 독널의 크기가 보통 80~110cm 정도, 삼국시대의 독널도 100cm를 넘는 것이 많지 않다. 영산강 지역의 독널은 길이 70~150cm의 독 2~3개를 연결하여 전체 길이가 1.5~2m에 이르며, 3m를 넘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건장한 성인의 시신을 넣고도 공간이 여유가 있어 다양한 유물을 같이 넣기도 한다.

다른 지역의 독널은 권력자를 위한 중심 묘제(墓制)가 아니지만, 영상강 지역의 독널은 최고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조사된 독널 중 을관(乙棺: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어 명명된 명칭으로 2번째 관을 의미함)에서는 금동관(金銅冠), 금동신발[금동식리(金銅飾履)], 금은장식 고리자루칼[환두대도(環頭大刀)], 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화려한 부장품은 역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독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며, 역사, 고고학계에서는 이 독널의 주인을 당시 영산강 지역의 최고 권력자으로 추정하고 있다(그림 3).

언제 처음 발견되었나?

영산강 지역의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였다. 1917~1918년 조사된 나주 반남면 일대 고분에 대한 조사 결과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대형의 독널, 왕릉급 고분에서 출토되던 금동관 등이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그림 4, 5). 당시까지 알려졌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분과 전혀 다른 형태의 고분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려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영산강지역의 독특한 고분들을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흔적으로 보고, 고분의 주인을 바다에서 건너온 왜인(倭人)으로 비정하려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전라남도 지역의 고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대형 독널이 사용되었던 지역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넓었음이 밝혀졌다. 처음 대형 독널이 조사된 나주를 비롯하여 영광, 함평, 무안, 영암, 광주, 함평, 해남 등 전라남도 서부와 서남부 전역에서 많은 수의 대형 독널이 발견되었다.

<그림 4>나주 신촌리 9호분 독널조사모습. 1917년

<그림 5>나주 신촌리 9호분의 현재모습. 2012년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영산강 유역에서는 무덤을 만들 때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관을 묻은 것이 아니라, 원형, 혹은 사각형, 사다리꼴[제형(梯形)] 모양으로 흙을 쌓아 높은 봉분을 만든 뒤 그 위에 독널을 묻은 것으로 밝혀졌다. 하나의 독널을 묻은 무덤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러 개의 독널을 수 차례 걸쳐 추가로 매장하였다. 봉분의 규모는 독널을 추가하면서 옆으로 늘리거나 위로 높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봉분의 형태, 독널의 모양과 크기, 부장품의 양상 등이 시간에 따라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어떻게 발전하고 소멸되었나?

대형 독널은 영산강 지류인 고막천 상류에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체로 3세기~6세기 중반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형태와 크기의 변화는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형 독널이 처음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3세기경부터이다. 전라남도 서부 지역의 전통적인 무덤이었던 널무덤[목관묘(木棺墓)]에 독널이 곁들어지거나, 독널만을 사용한 무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아직까지 이 지역의 중심 묘제로 자리잡지는 못했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크기가 매우 커지고, 독의 목이 길게 뻗어 올라가 아가리가 바깥쪽으로 꺾이는 등 타지역과의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그림 6).

4세기경에는 대형 독널이 영산강 지역과 전라남도 서부 지역까지 널리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독널은 독과 독의 결합이 더 편리하도록 아가리의 꺾임이 줄어들었고, 목이 짧아지면서 몸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또한 독널로만 사용하기 위한 전용옹관(專用甕棺)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고유한 형태의 독널 문화로 발전하게 되었다(그림 7).

그 다음 시기인 5세기경에는 크기가 최대로 커지지만, 사용 지역은 나주와 영암 등 영산강 중류 지역에 집중되고 금동관 같은 화려한 부장품들이 매장되기 시작하였다. 독의 형태는 몸통과 목의 구분이 점차 약해지고 몸통에서 아가리까지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독들은 모양에 빗대어 ‘U자형 독널’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전 시기에는 크기가 비슷한 독의 아가리를 붙여서 연결했지만, 이때부터는 크기가 다른 독을 만들어 작은 쪽이 큰 독의 안쪽으로 결합되게 하였다(그림 8).

마지막 시기에는 독널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작아지는데, 작은 쪽의 독이 더 작아져서 단순히 막은 기능만 한다. 이 때부터 영산강 지역에 본격적인 백제식 석실무덤이 도입되었고, 크게 번성하였던 독널 문화는 급격하게 소멸하게 되었다. 대체로 6세기 후엽 이후에는 대형의 독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그림 9).

<그림 6>3세기 독널, 함평 예덕리 만가촌고분군삼국시대, 토제, 길이 195cm, 전남대학교박물관

<그림 7>4세기 독널, 영암 월송리 송산고분삼국시대, 토제, 길이 230cm, 국립광주박물관

<그림 8>독널, 영암 태간리 일곱뫼 고분삼국시대/5세기, 토제, 길이 280cm, 국립광주박물관

<그림 9>6세기 독널, 무안 구산리 고분군삼국시대, 토제, 길이 114cm, 목포대학교박물관

누가 만들었나?

이러한 대형 독널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있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이러한 독널 무덤들이 영산강 지역의 전통적인 무덤에서 발전하고 있고, 같이 묻힌 물건들이 이전 시기부터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잡았던 마한, 혹은 그 후예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한강유역에서 일어난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그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원래의 지역 맹주였던 마한을 잠식하여 몰아냈고, 그 과정에서 최후까지 남아있던 세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다만 이들이 백제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복잡한 의견들이 있다. 역사학계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4세기 말 근초고왕이 전라남도와 가야 일부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구성과가 영산강 지역의 발굴조사 결과와 일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가 전라남도로 진출하였다고 추정되는 4세기 후반에서부터 6세기 전반까지 영산강 지역에는 경기, 충청지역에서 보이는 백제 문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백제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형 독널 문화가 크게 성행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가야와 관계된 것도 보인다. 하지만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된 백제식의 금동관과 같이 백제와 밀접한 유물도 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완전하게 부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그림 10).

6세기 이후로 이 지역에 백제 문화가 서서히 들어오게 되었고,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 확인된 백제식 석실 내 독널과 같이 전통의 독널 무덤과 백제의 석실 무덤이 결합되는 모습도 확인된다(그림 11). 결국 영산강 지역의 고유한 독널 문화는 6세기 중반 이후 백제 문화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더 이상 대형의 독널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림 10>나주 신촌리 9호분 옹관 내부 유물출토 모습삼국시대/5세기(원 표시는 금동관)

<그림 11>나주 복암리 3호분 옹관 출토 석실 모습삼국시대/6세기,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러한 발굴조사 성과에 근거하여 이 지역의 마한 세력이 늦은 시기까지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고, 백제와 일종의 연맹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백제에 속하기는 하지만 중앙정부가 직접통치를 하지 못하여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이 시기 백제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영산강 지역에 대형 독널을 만든 사람들이 마한의 잔여 세력이며, 백제의 확장 과정에서 상당기간 백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데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왜 이렇게 커다란 독널을 만들었을까?

<그림 12>독널 표면의 톱니무늬와 두드림무늬

사람들이 처음 독을 관으로 사용했던 이유는 어린아이가 죽었을 때, 사용하던 항아리나 독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매장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사람의 시신에서 뼈만 추려 매장하는 세골장(洗骨葬)을 위한 뼈항아리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영산강 지역의 독널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생활용을 만든 독을 관으로 사용하였지만, 점차 관으로만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전용옹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크기가 점차 커짐에 따라 독널만을 만들기 위한 대형의 가마를 만들었음도 밝혀졌다.

이러한 독특한 독널이 발전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시체를 잘 보존하기 위해 썩지 않는 관을 만들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알과 같은 형태가 재생과 부활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독의 목 주변을 둘러 장식한 톱니바퀴 무늬는(그림 12)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즉 정확한 발전 원인을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이 지역의 전통적인 무덤 양식 위에 영산강 지역 사람들의 생사관(生死觀)이 작용하여 대형의 독널이라는 독특한 묘제로 발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