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은 신흥 개혁유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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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正公과 新興하는 改革派 儒臣들.
1. 新興儒臣의 形成過政.
高麗가 武將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하고, 저들의 오랜 권력투쟁으로 차츰 국력이 쇠하여 갈 때, 대륙에서는 북쪽 몽고에서 일어난 한 세력이 서북 아세아의 넓은 초원을 정복한 후, 중국으로 남하하여 南宋을 멸망시킨 후 中華를 차지하고 元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들이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도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그때마다 고려의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여 禍를 피하였는데, 본토는 적의 기마병에 휩쓸리어 백성들의 피해와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컸다.
특히 여섯 번째 침입이 있던 1252년에는 무려 2십6만8천명에 이르는 남녀가 포로로 잡혀 저들의 땅으로 끌려가고, 천년의 古都인 慶州도 불타 없어지는 커다란 피해를 당하였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高宗(재위1213~1259)말년인 1258년에 태자인 王琠이 강화도에서 나와 강화를 청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다음해에 燕京으로가서 황제인 世祖인 쿠빌라이(재위1259~1294)를 만나 담판한 결과, 강화조건으로「고려왕실을 존속시키고, 그 풍습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조아래, 고려국왕의 親朝와 太子 王琠(元宗 재위1259~1274)의 볼모를 담보하고 강화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리켜 世祖舊制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후 元나라의 강요로 忠烈王(재위1275~1308)2년에는, 王의 廟號에는 祖나 宗을 쓰지 못하고 王 字를 대신하며, 앞에는 元나라에 충성을 한다는 뜻으로 忠字를 넣어야하며, 朕은 孤 또는 寡人으로 稱하고, 赦는 宥, 陛下는 殿下, 太子는 世子로, 宣旨는 王旨로 부르도록, 각각 한 계단씩 모두 격하되었으니, 이때까지 4000년을 내려오며 皇帝國(독립국)을 칭하였던 朝鮮族의 후예들은 이때부터 중국변방의 일개 제후국이 되어 조선 말기에 이르게까지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관청의 기구도 皇帝國에서 諸侯國의 수준으로 축소 통폐합이 되고 명칭도 바뀌었다.
또한 매년 공물과 소위 공녀라 하여 어린 여자들까지 징발 당하였으니 백성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들었던 것이다.
고려는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으로서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고려가 독립성을 유지 하였다고 하여 麗元의 관계가 형식적인 사대관계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원나라는 고려에 대한 안정적 지배유지를 위해 세자를 부마로 삼아 황실의 인질로 연경에 얽매어 놓고,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손에 쥠으로 해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원의 결정에 따라 忠烈王과 忠宣王, 忠宣王과 忠惠王의 父子가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고, 忠惠王과 忠定王이 폐위당하기도 하였다.
원은 고려의 국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고려를 지배하였고 이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권신들에게 눌려 힘이 없던 고려 왕실의 권위를, 元宗 때부터 강화시켜 주었다.
즉 高麗의 王들은, 고려의 국왕으로 元 皇室의 駙馬, 征東行城 丞相으로서, 元의 後援을 받는 테두리 안에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위에 올라서도 燕京에 머물면서 측근들을 보내어 통치하였으니, 원의 후원에 힘입은 강력한 왕권의 존재는 世祖舊制가 지속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와의 전쟁이 끝남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의 재건을 가능하게 하였다.
忠烈王(재위1274~1308)때는 이러한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특히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元나라는 남송을 멸하고 名儒를 초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로서, 程朱學이 북방에서도 행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晦軒 安珦(1243~1306)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정주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 였다.
그가 1289년 충열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朱子書❱를 직접 베끼고, 孔子와 朱子의 眞像을 그려가지고 돌아와, 퇴락한 성균관(국자감)을 재건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데 열중하였다.
安珦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元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理氣보다는 심신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學文이었다.
彛齊 白頤正(1274~1323)은 1298년에 忠宣王을 따라 元나라의 燕京에 가서 약 10년간 있으면서 性理學에 깊은 관심을 갖고 程朱의 書를 연구하였다.
그 후 高麗로 돌아올 때에, 程朱의 書籍과 ❰朱子家禮❱를 가지고 돌아와, 益齊 李齊賢(1287~ 1367)과 稼亭 李穀(1298~1351) 恥菴 朴忠佐(1287~1349) 樵隱 李仁復(1308~ 1374)등에게 傳하였다.
안향이 주자학의 도입에 힘썼다면 백이정은 주자학의 기초를 세우고 많은 문인을 배출해, 고려 말엽의 주자학을 심화 발전시키는데 기여 하였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풍은 실천적인 학문이었기 때문에 시대상황에 부응하여 개혁기운이 움트게 되었고, 그러한 학풍과 정신은 문인들에게 이어져, 성균관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보급하는 기지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들의 학풍은 문인 이제현과 이곡을 통하여 수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그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집단을 만들어, 부패한 권문세족에 맞서 개혁을 부르짖게 된 것이다.
元의 간섭기간동안 權門勢族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무신란 이후, 문신위주의 폐쇄적 문벌지배체제가 와해되면서, 이때에 여러 갈래의 출신기반을 갖는 門閥들이 지배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世族이라 한다.
원의 간섭기에 등장하는 세족 층에 해당하는 가문들은, 문벌로 등장한 시기와 유형이 조금씩 달랐으니, 그 중에는 무신집권기가 끝나고도 살아남아 문벌적 지위를 지속시킨 가문과, 武班으로 전공을 세워 등장한 가문, 그리고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여 커 간 가문과, 원나라의 권력에 붙어 아부하여 등장한 가문 등이 있다.
이러한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부를 쌓는 한편,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고, 또 남의 노비를 강탈하여 자신의 농장에 투입하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그들이 점탈한 토지가 산과 하천을 경계로 할 만큼 넓었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유랑하여 떠돌았다.
또 下級軍人들의 경작권을 빼앗고, 군량미를 지급하기 위하여 둔 屯田의 賭租를 마음대로 받아먹었다.
寺刹도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탈세를 일삼았으며 이권을 거머쥐고 백성위에 군림하였다.
부호들은 장리의 빚을 주어 치부를 일삼았고, 公田이 축소되어 국가의 재정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니, 관리의 봉급을 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갔다.
거기에 공민왕대에 이르러 외세의 침입, 즉 두 차례의 홍건적의 침입과 잦은 왜구의 침탈로 변경이 시끄럽게 되자, 조정의 정책으로 해변의 토지를 비우고 농사를 짓을 수 없게 하였음으로, 농지를 잃은 농민은 유랑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에 이르자 新進官僚를 중심으로 사회모순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관료의 인사와 토지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재위1308~1313)때부터 시도되었으나,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충열왕 때에 민생문제와 국가재정의 확충을 위하여 洪子蕃(1237~1308)의 便民十八事 疏를 통해, 관리의 작폐방지, 貢賦의 균정과, 正額이외의 貢賦受納抑制, 義倉등을 통한 백성의 구휼을 주장하며 개혁에 나섰으나, 그 역시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忠穆王(재위1344~1348)이 즉위 후에, 개혁전담부서인 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역시 부원세력의 방해와 元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개혁을 시도하려는 恭愍王의 등장을, 역사는 기다렸던 것이다.
2. 恭愍王의 登場과 改革.
1349年 初, 忠穆王(재위 1344~1348)이 元의 順帝에 의하여 11歲의 어린나이로 등극하였으나 재위 5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忠惠王(1339~1344)의 庶子인 6歲의 나이어린 忠定王(1349~1351)이 왕위에 오르자, 嬖臣과 外戚들의 弊行이 극에 달하여 나라가 극도로 어지러워지자, 李齊賢등이 元의 황실에 간곡히 청하여 忠定王을 폐위시키고, 忠肅王의 둘째아들이며 忠惠王의 동복아우인 전(顓)으로 왕을 삼으니 이가 곧 恭愍王(재위 1351~1374)이다.
恭愍王의 즉위초기에는 元의 干涉期에 등극한 다른 국왕들의 일반적인 정치운영방식인 측근중심의 정치운영을 따라하였다.
그것은 어린 나이에 실질적인 인질이 되어 元나라로 들어가 황실을 숙위하느라고 자연히 국내정치 세력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숙위할 때의 수종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일부측근으로 자신의 독자적 세력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元 간섭기동안의 다른 국왕들의 일반적인 통치형태로, 공민왕 역시 그것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2세에 원에 건너가 23세인 1352년에 국왕으로 귀국할 때까지 10년을 연경에 머물러야했던 공민왕으로서는 연경수종공신세력과 일부 척신을 중심으로 하여 측근세력을 중용하고, 그들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즉위 당시의 정계구상은 그 이전 元 간섭기의 국왕들이 즉위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새로 즉위하는 국왕과 국내관료 세력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미약했던 전의 왕들과는 달리, 공민왕은 당시 국내의 중요정치 세력인 李齊賢, 洪彦博(1309~1363)등 改革指向的 관료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元의 간섭기로부터 비롯된 정치와 경제적의 여러 모순에 대한 해결방안은 李齊賢으로 대표되는 개혁성향의 儒臣, 즉 과거로 정계에 등장한 문신세력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이들이 지향한 현실인식은 對元 관계에 있어서는 사대에 입각한 世祖舊制를 준수하면서, 국내에서는 국왕의 측근세력에 의해서 무너진 인사권의 정상화를 통하여, 군신관계의 회복과 田民變整등을 통한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크게 田制改革法과 정치개혁에 의한 선별법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우선 政房을 혁파하고 給料의 科田을 요구하고 나섰다.
비록 이들의 의지가 元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충정왕의 등장으로 개혁의 흐름이 일시 위축되었지만, 개혁성향을 지닌 공민왕의 즉위로 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공민왕을 적극 지지하였고, 공민왕의 개혁의지와 개혁정치에 편승하여 측근세력의 정치와 경제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이들에 의하여 노정되었던 고려사회의 전반적인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공민왕이 元나라로부터 왕위 승계를 허락받은 뒤, 곧바로 이제현을 수상에 임명하여, 자신이 귀국할 때까지 고려의 정계를 정리하도록 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어느 면에서는 공민왕의 개국이후에도, 그들 개혁세력이 공민왕의 협력을 얻어 국정과 개혁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러한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귀국이후, 전대의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연저수종공신인 趙日新을 대표로하는 측근세력에 의해 정국이 운영되면서 공민왕의 즉위직후 정국을 주도할 듯 했던 신흥 개혁성향의 관료들의 영향력은 미약하여져 갔다.
공민왕의 이러한 정치운영은, 정치안정을 통해 사회경제개혁을 구상하였던 이제현등 科擧文臣勢力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제현이 공민왕의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수상직을 사임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민왕의 후견인으로서 공민왕의 즉위를 위하여 노력을 하였던 尹澤(1298~1370)역시 국정운영에 대한 건의를 하였다가, 받아드려지지 않자 은퇴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공민왕의 현실적 인식은 원의 간섭기에 제기된 사회 경제적 개혁과, 국왕권의 강화를 통한 세조구제의 부정이라는 두 가지의 과제가운데 후자를 우선하였다.
특히 恭愍王이 卽位한 이후 燕邸 隨從功臣 계열인 측근세력의 육성을 통하여 1차 목적인 국왕권의 강화와 국왕주도의 反元改革을 단행한 점은 이를 입증하여준다.
공민왕은 즉위한해인 1351년, 이제현과 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듬해에, 몽고식의 변발과 호복제도를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잡았다.
곧이어 2월에는 권신들이 변칙적으로 인사행정을 하여 큰 폐단을 낳던 政房을 혁파하여 정치기강을 바로 잡으며 왕권을 직접 발휘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법적인 田民奪占에 대한 사정의지를 보이며 田民變整都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附元輩를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의 반발로 벽에 부딪쳤다.
더구나 1352년 9월에 일어난 趙日新의 亂은 공민왕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난을 진압한 무장들과 부원세력의 입지 강화로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구한 개혁성향을 가진 科擧文臣官僚들의 입지도 미미하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대내적으로 왕권을 꾸준히 강화하고 권문세족을 억누르면서 꾸준히 개혁을 추진하여 나아갔다. 반발하는 척신세력의 제거역시, 국왕측근세력의 육성에 의하여 단행되어 갔다.
이는 부원세력의 정치전단으로 미약해진 왕권을 강화시켜갈 수 있는 기반과,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개혁의 으l지를 다시금 재정비할 수 있는 여건이 동시에 마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반원개혁직후 개혁관료의 대표격인 이제현을 다시 수상에 임명하였지만, 국왕의 측근들이 중심이 되어 공민왕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1356년(공민왕5)에 이르자 마침내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을 표방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사회 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元의 세력이 약화되는 대륙의 정세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奇氏一族을 비롯한 附元勢力을 전격적으로 주살하고 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였으며, 그리고 評理 印瑭(?~1356)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압록강以西의 八站을 공략하게 하여 婆娑俯등 三站을 깨트리고, 밀직부사 柳仁雨(?~1363)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지역을 처서 失地를 回復하였다.
뒤이어 元의 年號를 폐지하고, 원의 압력으로 변경하였던 官制도 文宗 때의 것으로 환원하였다.
아울러 중국대륙의 정세를 빨리 파악하기 위하여 강남지역에 활거하고 있던 張士誠이나 方國珍 등의 群雄들과 자주 교빙을 하였다.이에 원이 크게 반발하였다.
원나라가 전보다는 약해졌다고는 하나 공민왕으로서는 정면으로 대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印瑭을 베어 사과를 하는 등 한때는 굴복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던 공민왕 8년과 10년에는 북방으로부터 紅巾賊의 침입이 있었다. 鄭世運 安祐등 측근들과 崔瑩 李成桂등 신진무장들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국왕의 권위가 실추된 데다, 홍건적 격퇴 후 측근이었던 金鏞(?~1363)에 의하여 일어난 新興寺의 亂으로 중요한 측근이었던 洪彦博등이 모두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또 이러한 위기를 틈타고, 공민왕 12년에는 왕을 폐위시키고, 德興郡을 옹립하려는 附元勢力의 시도까지 겹쳐, 공민왕을 안팎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원나라는 홍건적의 횡행을 수수방관하여 다시금 국력의 쇠약함을 드러내었다.
그러다가 1368년에 明나라가 건국되고 元이 북쪽으로 쫓겨 가자, 고려는 다시금 원의 연호사용을 중지하고 명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아울러 공민왕은 一軍을 조직하고, 李成桂(1335~1408)를 동북면 원수로, 池龍壽를 서북면 원수로 삼아 압록강북쪽의 만주지역에 있던 원의 東寧府를 정벌했고, 遼寧의 중심지인 遼陽(요오양)을 공격하여 그 성을 함락하기도 하였으나, 지키지 못하고 압록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홍건적과 원의 간섭을 격퇴하여 공을 세운 무장들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국왕권을 지지해 주던 측근세력의 상실로 말미암아 공민왕의 정국주도력은 크게 약화되어갔다.
때문에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주체인 세력가와 국왕권을 제약하는 무장 세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필요로 하였다.
3. 辛旽의 登場
1364年 辛旽(?~1371)(恭愍王20)의 등장과, 공민왕 16年 성균관 重營을 통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육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주요 측근이 제거되고, 외적퇴치와 내란수습을 통해 발흥한 신흥무관들이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타개하기 위해, 공민왕은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않은 獨行者 辛旽을 새로운 측근으로 만든 후, 그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계변화를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민왕은 세신대족과 초야의 신진 및 유신관료 모두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백성의 입장을 확대포용하지 않으려는, 당시 지배층에 대한 비난이었다.
辛旽은 정권을 잡은 후, 1365年 5월에 崔瑩 등 무장 세력을 비롯하여 李仁復 李龜壽등 많은 권문세족을 물러나게 했고,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안팎의 권력을 총괄하면서, 공민왕의 뜻에 따라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內宰樞齊의 新設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선발된 일부 宰臣과 樞密이 궁중 안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였는데,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의 혁파에 따른 약화된 왕권을 만회할 수 있는 기구이다.
1365年인 공민왕14년 왕비인 魯國大長公主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정사를 돌아보지 않고, 폐행의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신돈은 왕권을 뒷받침하고, 함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신돈과 신흥 유신들 사이에 정치적 제휴가 이루어 졌다.
신돈이 등장한 이후, 공민왕과 신돈 그리고 신흥유신들이 추진하였던 개혁정책은,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이전의 시도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1366년에는 田民變整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 기구는 권문세족들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였다. 이 제도의 실시로 권문세족들이 奪占하였던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로 전락하였던 백성들이 원래의 신분을 되찾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권문세족의 저항이 있었지만 국왕의 절대적인 후원아래, 국왕의 대행자로 자처하던 신돈은 이전의 측근세력보다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신돈집권기에 중요 요직을 담당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공민왕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다시 친정한 이후에도 계속 정권의 핵심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신돈집권기는 본질적으로 국왕의 측근세력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운영한 시기로서, 공민왕 즉위이후의 초기 정국운영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후 정상적인 관료체계를 지향하는 개혁적성향의 과거출신문신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민왕 20년(1371), 6년간의 짧은 집권 끝에 신돈이 실각하자,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권문세족과 무신 세력이 재집권하게 되면서 신흥유신들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공민왕의 자제위설치와, 도당의 위상강화, 폐행(嬖幸)의 등용을 통하여 국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무신세력 역시 도당의 위상변화를 계기로 정국주도권을 강화하면서, 李仁任과 崔瑩이 새롭게 부상하였다.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정무를 놓아버리고 패행(悖行)의 길을 걷다가, 재위 23년에 자제위의 손에 凶逝하고, 어린나이에 등극한 禑王 代에는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그에 따른 문제점이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 시기였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李仁任을 대표로하는 권문세족들과 신흥유신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권문세족의 토지점탈과 국가재정의 부족, 민의 저항 등 모든 모순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신흥유신들은, 공민왕 16년 성균관의 중영을 계기로 李穡을 중심으로 운집하면서, 공민왕과 신돈에 의해서 추진된 개혁정치에 함께 참여하였고, 공민왕의 明에 대한 적극적 외교를 지지하거나 주도한 사람들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권문세족과 대립하면서 비판적 정치활동을 하는 중견관료로 성장하였던 인물들 이었다.
그들은 이미 중국대륙에서 밀려나 북쪽의 사막으로 쫓겨 간 北元과의 관계개선 보다는 공민왕이 추구하였던 明과의 외교적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개혁적 성향의 신흥유신들은 정국주도와 함께 공민왕대에 추진되어 왔던 改革의 持續과 完成이라는 時代的 課題를 안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 신흥유신들은, 여러 모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서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실현하기 위해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야 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신흥유신들이 우왕초년에 정치적 운명을 함께할 정도로 정치세력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인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대외정책에 강력히 반발하는 유신들을 축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성균관의 重營과 신흥유신의 등장.
高麗末의 改革勢力인 新興儒臣들이 辛旽의 정치형태를 비판하거나, 또는 改革意志의 支持勢力으로서 정치세력화한 시기는, 공민왕16년(1367)에 성균관이 重營되고, 이곳에서 科擧에 及第한 文士들이 性理學을 進講하면서부터였다.
대사성 李穡과 學官인 文正朴公, 金九容, 鄭夢周, 朴宜中, 李崇仁, 鄭道傳등 일단의 新興儒臣들이 학문적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결집하고, 辛旽의 개혁에 적극참여 함으로써 점차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신돈에 의하여 축출된 무장들을 중심으로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가 발생하는 등, 개혁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개혁추진세력의 형성은 더욱 절실하였다. 그러나 세신대족을 비롯한 기존의 정치세력을 부정한 위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창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였고, 이 점에서 당시의 신돈에게는 신흥유신들이 주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공민왕 16년에 이루어진 성균관의 중영은 매우 그 의미가 크다.
성균관은 成均館啐酒(祭酒) 林撲의 上言으로 시작되어, 신돈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중외의 유신관료로부터 그 경비를 거출하여 비용을 보조토록 하는 한편, 生員의 정원을 100인으로 늘렸으며, 강의의 내용은 4書와 5經의 9齊로 바꾸었다.
공민왕16년인 1367년에 성균관을 중수하고, 牧隱 李穡(1328~1396)을 판개성부사겸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하였으며, 정원을 증원하고, 경학학자들인
文正朴公(1332~1375), 鄭夢周(1337~1392), 朴宜中(1337~1403), 鄭道傳(1342~1398),李崇(1349~1392), 金九容등을 선발하여 다른 관직을 겸직한 채 학관을 겸임시켰다. 이전에는 교생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이색은 수업방법을 변경하여 매일 명륜당에 모여 경서를 분담하여 강의를 진행하고, 강의를 마친 후에는 서로 토론을 하였는데 누구나 피로를 잊었으며, 배우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서로 권장하게 되었다. 정주의 성리학이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高麗史 권115. 列傳. 李穡 傳.❱
위에서 보듯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결집한 이색 등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문신들이다.
신돈은 집권한 초기에는 왕의 절대 신임을 등에 업고, 매우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하여 백성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고, 또한 신흥유신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독단과 왕에 대한 참람함이 보이자 개혁문신들의 지지를 상실하여갔다.
그리하여 개혁유신들도 척신의 무리들이 태후를 움직여 신돈의 축출을 모의하여도 방관하여, 신돈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 개혁을 부르짖는 문신세력들
공민왕18년(1349)에 지금까지와 같은 과거제 실시에서는 좌주=문생관계에 의한 폐단만 가져온다 하여, 공민왕이 직접 九齊에 행차하여 査章이 아닌 經學을 시험과목으로 하여 親試를 행하면서 과거제도를 혁신하였다. 원의 三試制의 채택하여 界首官試는 鄕試로, 國子監試는 會試로, 禮部試는 殿試로 과거제도가 대체되었다.
1374년에는 本貫에서 鄕試를 거치지 않은 자는 會試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이것 역시 중앙의 문벌귀족세력과 座主=門生關係를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서 왕권강화와 연관되는 조치였다. 그리고 문벌귀족의 나이어린 자제들이 문과에 합격하는 예가 많아서 문과 응시연령을 18세에서 20세로 올리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의 과거에서는 좌주=문생관계의 성립이 불가하여짐은 물론이지만, 기존에 성립되어 있던 좌주=문생관계도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과거제도의 개혁은 공민왕의 좌주=문생관계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에서 연유하는데, 특히 그들이 黨與를 이루어 서로 보호하고 감싼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진관료들에게 좌주=문생관계를 청산하고 개혁에 참여하도록 요구함에 기인하였다. 공민왕과 신돈은 개혁의 추진을 위해서 신흥유신을 끌어들여 그들의 협조와 참여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개혁추진세력으로 이색을 비롯하여 공민왕대에 과거에 합격한 20~30대의 패기 발랄한 젊은 문신들이 신돈의 정권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李穡이 대사성에 발탁되고 있다는 것은, 이 시기에 와서 신흥유신의 구심이 이제현에서 이색으로 이동하는 등 일정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신흥유신의 대부분이 공민왕대에 과거에 합격한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제현 으로부터 흥기하기 시작한 성리학은 이곡,을 거쳐 이색, 문정 박공, 정몽주, 이숭인, 등에게 전수되니, 사제관계뿐만 아니라 혈연과 인맥으로도 학문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문생들에게 학문적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정치적으로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과 다섯 번의 고시관을 역임하면서 많은 신진관료를 길러 내었다.
李穡, 文正朴公, 李茂方, 權仲和등은 同榜한 동료였고, 權近, 柳佰儒, 李崇仁, 金九容, 李詹등은 문생제자로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자학이라는 학문적 유대관계는 물론, 정치적으로나 동지적으로도 결합하고 있었다.
성균관 중영을 계기로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던 신흥유신으로는 李穡을 정점으로 하여 文正 朴公, 鄭夢周, 朴宜中, 李崇仁, 金九容, 鄭道傳, 李存吾, 林博, 鄭逑, 金薺安, 尹紹宗, 李詹, 權近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金九容, 金齊安, 權近 鄭逑는 世族출신이고, 朴宜中, 李崇仁, 李存吾, 尹紹宗 등은 이미 그들의 할아버지 때부터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한 사족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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