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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박태정 - 금창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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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0-06 06:59 조회5,206회 댓글0건

본문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답곡리



박태정 1640 ~ 1688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정지(定之), 호는 경신재(敬愼齋),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영조 때 형조판서좌찬성을 지낸 박필명(朴弼溟)의 아버지이다.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성리학자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1659년(효종 10)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둘째딸과 혼인하여 금창부위(錦昌副尉)가 되었다.
뒤에 특가일계(特加一階)하여 통헌 겸오위도총부 도총관(通憲兼五衛都摠府 都摠管)을 지냈다. 
언제나 정좌(正坐)하여 독서에 힘쓰니 마음은 경적(經籍)에 묻혀 학문이 특출하게 뛰어났고,
특히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리학의 대학자 김창흡(金昌潝)이 묘지명을 썼다.



원본글 출처

박태정의 묘지명(墓誌銘)

저자

김창흡(金昌翕)

이명

자 : 정지(定之)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6 국척(國戚)

공(公)의 휘(諱)는 태정(泰定)이고, 자(字)는 정지(定之)이며, 성(姓)은 박씨(朴氏)로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다. 원조(遠祖) 휘(諱) 상충(尙衷)은 고려(高麗) 말에 벼슬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같은 제현(諸賢)들과 함께 창학(倡學)하였는데, 상서(上書)하여 북원(北元)을 섬길 것을 간(諫)하다가 장류(杖流)되어 졸(卒)하였으니, 호(號)는 반남(潘南)이다. 반남의 아들 휘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에 훈봉(勳封)되었다. 5대를 지나 휘 소(紹)는 간관(諫官)이 되어 간사한 자 김안로(金安老)를 배척하다가 영남(嶺南)으로 피하였는데, 호(號)는 야천(冶川)이다. 야천의 아들 휘 응남(應男)은 대사헌(大司憲)인데 종자(從子)인 사간(司諫) 박동현(朴東賢)과 함께 정직하기로 유명했다. 대사헌의 아들 휘 동도(東燾)는 군수(郡守)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승지의 아들 휘(諱) 해(垓)는 호군(護軍)으로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참판의 아들 휘 세면(世冕)은 첨추(僉樞)로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처음에 참찬공(參贊公)은 후사(後嗣)가 없어 족제(族弟)인 경력(經歷) 휘 세기(世基)의 막내아들로 후사를 삼으니, 이분이 공이다. 실로 사간공(司諫公, 박동현)의 증손(曾孫)으로, 어머니는 숙인(淑人) 조씨(趙氏)이다. 경진년(庚辰年, 1640년 인조 18년) 11월 계사일(癸巳日)에 공이 태어나니, 집안에 서광(瑞光)이 비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단아(端雅)하고 성실하여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입학[上學]하기에 미쳐 늘 정좌(靜坐)하여 독서(讀書)에 힘썼다. 문장을 외우는 데 민첩하여 어구(語句)를 내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보는 사람들이 공의 원도(遠到)를 기대하였다. 15세가 되자 효종(孝宗)의 명(命)을 받고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둘째 딸과 혼인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 금창 부위(錦昌副尉)가 되어 봉순 대부(奉順大夫)에 올랐다.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통헌 대부(通憲大夫)에 이르러서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 회맹제(會盟祭) 때에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하였으며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년)에는 장렬 왕후(莊烈王后)가 병이 들어 여러 달을 앓았는데, 공이 기거반(起居班)으로 수행하다가 피로하여 병이 났다. 직려(直廬)에서 들것에 실려 돌아와 12월 26일에 졸(卒)하니, 향년 49세였다. 처음에 병이 나자 임금은 의약(醫藥)을 보내었는데, 부음(訃音)을 듣자 애통하며 유사(有司)를 시켜 장례에 필요한 거마(車馬)ㆍ수의(襚衣)를 갖추어 주고 특별히 관곽(棺槨)과 금단(錦段)을 내려 빛나게 치르게 하였다. 또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고, 예관(禮官)에게는 그 자식들에게 조문하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듬해 3월 기사일(己巳日)에 연천(漣川) 지사촌(芝沙村) 갑향(甲向)의 묘원에 장사지내었다.

공은 풍채(風采)가 단정하여 숙녀(淑女)와 같아서 반행(班行) 중에 있으면 위의(威儀)는 볼만하였다. 공이 처음 의빈(儀賓)이 되었을 때 다른 부마(駙馬)들과 함께 임금(효종)의 부름을 받고 금원(禁苑)으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마침 초여름이라 경치가 좋았다. 임금이 취미정(翠微亭)에 행차하였는데 특별히 공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내시(內侍)를 시켜 쪽지를 주며 이르기를, “나를 위해 시(詩)를 짓지 않겠나?” 하였다. 공이 바로 시(詩) 일절(一絶)을 써서 올리니, 임금이 동궁(東宮)을 돌아보며 “시(詩)의 뜻이 참으로 좋다.”고 하였다. 재촉하여 종이와 붓 등 여러 물품들을 내려 주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하고서 그 운(韻)에 맞추어 구호(口號) 하였다. 공의 시(詩)에 “다만 작은 정성으로 봉인1)(封人)을 본받겠습니다[但將微悃效封人].”라는 어구(語句)가 있자 임금이 바로 “이 당(堂)에 모인 소장(少長)들이 모두 군신(君臣)이다[一堂少長是君臣].”란 말로 화답하였다.

해가 질 무렵 어수당(魚水堂)으로 자리를 옮겨서 제신(諸臣)들의 투호2)(投壺) 놀이를 관람하고 화살을 넣은 자들로 하여금 넣지 못한 자들의 절을 받게 하였다. 이어서 공에게는 대지(臺池)의 조수(鳥獸)를 두루 구경시켜 주고, 나갈 때는 가을에 다시 부르겠다고 거듭 명했으니, 이는 대개 임금이 소현 세자에 대해 돈독한 우애가 있어서 공에게까지 미루어 사랑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다른 부마(駙馬)들에 대해 간격이 없어지만, 공을 더 우대했던 것은 공의 기상이 뛰어나고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정성을 나타내 임금의 뜻에 응하여 갱재(賡載)의 아름다움3)을 이루었으니, 이같이 융성한 때의 기상은 그 일을 생략할 수 없다.

그렇게 임금을 알현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나서 임금께서 승하(昇遐)하셨다. 공이 못 견뎌 붙들고 울며 말하기를, “성은(聖恩)에 보답할 길이 없구나!” 하고 말만 하면 반드시 눈물이 앞을 가리었다. 그 후에 현종(顯宗)과 당저(當宁, 숙종)를 섬겨 권우(眷遇)가 융성하여도 마음을 더욱 작게 하였으며, 빛남을 감추고 겸손히 있기를 힘썼다. 공이 늘 말하길, “사장(詞章)이나 논의하는 것은 아마도 의빈(儀賓)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오로지 삼가며 오직 조알(朝謁)하고 차견(差遣)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물러나면 고요히 문설주에 발을 내리고 마치 사방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지극한 성품에 숙인(淑人) 조씨(趙氏)의 상(喪)을 당하자 열흘이나 음식을 입에 넣지 않았다. 또한 경력공(經歷公, 박세기)이 병이 들어 위태롭게 되자 혈지(血指)를 약에 타서 드렸다. 전후(前後)의 거상(居喪)으로 수척해져 거의 몸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죽도록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가인(家人)들을 감동시켰다.

만년에는 두 존인(尊人)을 물심 양면을 다해 받들고, 그 마음을 미루어 방인(傍人)들을 다스릴 때도 부지런히 자비함과 측은함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은혜가 고르게 퍼지고 예절이 흡족하였지만 공은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었다. 백씨(伯氏)인 좌랑공(佐郞公, 박태징(朴泰徵))은 일찍이 공의 궁행(躬行)이 돈독한 데 감탄하고 서로 지기(知己)가 됨이 깊었다.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몸을 낮추고 윤리를 도탑게 하는 것을 요지로 삼았다. 그 말을 돌아봄에 있어서는 마음을 잔잔히 하여 위태로움을 경계하였다. 또 아침저녁으로 상리(常理)를 논하였다. 대개 공은 일찍부터 반남(潘南, 박상충)과 야천(冶川,
박소), 두 조상의 유사(遺事)를 마음속 깊이 생각하여 그 어짊을 본받았다. 또 족숙부(族叔父) 현강공(玄江公, 박세채(朴世采))을 사범(師範)으로 삼아 조존(操存)의 요체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 본 뒤에 행하였으니, 여기에서 힘을 얻은 바일진저. 현강공(玄江公)은 취미가 틀리지 않음으로써 아허(雅許)하여, 묘표(墓表)를 지을 때 그의 공손함과 온화함, 절의를 크게 칭찬하였으니,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한 것은 알아본 것이 있어서이다. 그러니 대저 누가 그 말에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공의 아내는 경녕 군주(慶寧郡主)에 봉해졌는데, 어머니는 민회빈(愍懷嬪, 소현 세자빈) 강씨(姜氏)이다. 단정하고 정정(貞靜)하였다. 어려서≪소학(小學)≫을 배워 대의(大義)를 통하니, 그 내용을 받들고 존중하여 남편을 섬기는 일에 그 도리를 다하였다. 궁문(宮門)을 출입할 때는 예경(禮敬)을 갖춤이 지극하고 의복ㆍ거마(車馬) 따위를 검소하게 하여, 크게 장렬 왕후(莊烈王后)ㆍ명성 왕후(明聖王后)의 가애(嘉愛)를 받았다. 공보다 6년 먼저 졸(卒)하니 같은 묘역(墓域)에 무덤을 달리하여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술인(術人)의 말을 듣고 (공의 묘와) 함께 옮겨 옛 묘자리 위 곤좌(坤坐)의 묘도(墓道)에 합장(合葬)하였다. 5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박필명(朴弼明)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다음은 박필영(朴弼英)으로 음사(蔭仕)로 감찰(監察)에 이르렀으나 죽었다. 그 다음 박필형(朴弼亨)ㆍ박필굉(朴弼宏)ㆍ박필평(朴弼平), 서출(庶出) 박신(朴愼) 등은 모두 일찍 죽었다. 장녀는 이희남(李喜楠)에게, 다음은 유정진(柳挺晉), 좌랑(佐郞) 이병성(李秉成), 김치겸(金致謙)에게 출가(出嫁)했다. 그리고 서녀(庶女) 둘은 각기 유징삼(柳徵三)과 송수옹(宋秀雍)에게 출가(出嫁)했다. 박필명은 자식이 없어 박필영의 아들 박사수(朴師洙)로써 후사(後嗣)를 삼았다. 박필영은 2남 8녀를 두었는데, 장남 즉 박사수는 생원이고 다음은 박사유(朴師游)이다. 8녀는 신적(申迪), 송인손(宋麟孫), 교리(校理) 임상덕(林象德)에게 출가(出嫁)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어리다. 박필형은 3녀를 두었는데 이시복(李時復), 이희성(李希聖), 권수형(權壽衡)에게 출가했다. 박필굉과 박필평은 둘 다 자식이 없었고, 이희남도 자식이 없었다. 유정진은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유엄(柳儼)으로 생원(生員)이다. 이병성(李秉成)은 1남 4녀를 낳았으나 장녀만 윤상정(尹尙靖)에게 출가하였다. 김치겸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김문행(金文行)이고 장녀는 이강중(李剛中)에게 출가했다. 공의 작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으니 법으로 응당 시호(諡號)를 받아야 했으나 신묘년(辛卯年, 1711년 숙종 37년)에 비로소 절혜(節惠, 시호를 내림)의 은전을 받아서 ‘경헌(敬憲)’이라 했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고, 착한 행실을 하여 법도가 될 만한 것을 ‘헌(憲)’이라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사람들의 대개를 보면 안으로 효도하고 밖으론 충성하여, 혹은 입신 양명(立身揚名)하고 혹은 홍도 제세(弘道濟世)하였는데, 제도에 국한됨이 있어 심중에 품은 것 행하다가 일생 마쳤도다. 굳게 지킨 바는 경(敬)이었기에 인의(仁義)가 그 가운데 있었으니, 은인(銀印)ㆍ주수(朱綬)의 부귀 영화 내 몸에 무슨 관련이 있으리오? 공(公)은 능히 이렇게 하였으니 숙인(淑人)에 가깝도다. 반남 세대(潘南世代)의 가학(家學)은 예부터 근원(根原)이 있네. 근신(謹愼)하게 선조를 받들었고 공손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어, 여러 조정의 권애(眷愛)를 받았기로 거유(巨儒, 박세채를 이름)가 어질다고 하였네. 이에 선(善)함이 실증(實證)되니 내가 감히 췌언(贅言)할까? 그의 단후(端厚)함을 추려 모아서 유택(幽宅)에다 사실대로 적노라.

각주

1) 봉인(封人) : 화(華) 땅에 봉해진 사람. 요(堯) 임금이 화(華) 땅을 시찰하러 가자 그 봉인(封人)이 요 임금을 위하여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 세 가지로 빌었다는 고사(故事).
2) 투호(投壺) :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어서 승부를 가리는 유희(遊戱). 두 사람씩 짝지어 청홍의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은 뒤, 그 숫자를 헤아려 승부를 결정함.
3) 갱재(賡載)의 아름다움 : 갱재(賡載)는 순(舜) 임금과 고요(皐陶)가 창화(唱和)한 시가(詩歌)로, 순 임금이 시가를 지어 고요에게 권면하자 고요는 순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임금을 권면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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