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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달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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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0-04 08:02 조회3,532회 댓글0건

본문

- 마흔 네 번째 이야기
2012년 10월 4일 (목)

한가위 달을 보며[仲秋賞月]

해마다 밤마다 뜨는 달이건만
한가위 십오야가 제일 곱다네
너를 마주해 어찌 술이 없을쏘냐
좋은 벗 불러다 잔치를 열어야지

歲歲年年夜夜懸
仲秋三五最淸姸
對渠那得樽無酒
爲倩良朋敞錦筵

- 김효원 (金孝元 1532~1590)
 <중추상월(仲秋賞月)> 
《성암선생유고(省菴先生遺稿)》卷1


어느새 추석이 지났다.
시에서 말한 대로 해마다 밤마다 떠오르는 달인데
새삼 우리를 들뜨게 하는 건 무엇일까.
어찌 보면 우리가 기다리고 바라는 건 정작 달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리라.
맑은 달밤과 맛있는 술에 좋은 사람
인생에서 이보다 더 바란다면 과욕이 아닐까.

 

글쓴이 : 김성애(한국고전번역원)


김효원

본관은 선산(善山;일선 一善). 자 인백(仁伯). 호 성암(省庵).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의 진사시와 이듬해의 알성문과를 통해 관직에 올랐고,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대 말과 선조대 초에 훈구파(勳舊派)가 몰락하고 사림파(士林派)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관인(少壯官人)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척신 권세가 윤원형(尹元衡)의 집에서 처가살이하는 이조민(李肇敏)과 친하여 함께 지내곤 하였는데, 그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정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김효원을 이조정랑으로 추천하여 천거되자 척신 윤원형의 문객(門客)이라는 이유로 심의겸(沈義謙)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등용되었지만 이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심의겸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형제인 척신이라는 이유로 이를 강하게 배척하였으며 심의겸과 심충겸에게 인신공격을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김효원은 동인(東人)으로 결집하는 후배 사림 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선배 인사들은 서인(西人)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일이 발생한 해가 1575년 을해년인데 이를 두고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고 불렀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고 불렀으며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 정릉에 있어 서인이라고 불렀다. 김효원을 지지했던 동인의 사림으로는 김우옹, 류성룡, 허엽, 이산해, 이발, 정지연, 우성전, 정유길이 있으며 김효원은 붕당(朋黨)이 갈리는 원인을 만든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김효원은 청렴결백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심의겸 또한 한 시기 앞서 척신 이량(李樑)의 발호를 막고 사림파를 보호한 인물로서, 그들을 중심으로 한 대립은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림파가 훈구정치를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후배와 선배 세대의 입장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격화되자 그 중심인물을 모두 중앙에서 내보내자는 이이(李珥)의 조정에 따라 경흥부사로 나간 뒤, 동료들의 옹호를 받아 부령부사를 거쳐 삼척부사로 옮겼다. 조정 분란의 중심이 되었음을 자책하여 중앙관직에 머무르지 않고 안악·영흥 등의 수령을 지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성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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