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고 박영효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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急進改革의 指導者인 風雲兒 春皐.
朴泳孝의 有虛地에서.
朝鮮末期 開化黨의 泰斗 春皐 朴泳孝가 세상을 떠난 지, 7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박영효가 떠난 이태 뒤에 내가 태어났고, 커 가면서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 이야기였다.
나의 外家인 烏山의 은계동은, 烏山이 邑이었을 때만하여도, 東灘面 金谷里 3구 은계 부락이었다.
이곳이 지금은 개발로 도시화가 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내가 朴泳孝 大監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만 하여도, 그 동네에는 생나무 울타리가 넓게 둘러친 2000여平의 장원에, 서양식으로 개량된 구조에 이엉을 얹은 제법 넓은 한옥이 작은 호수 곁에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는 수십 년 된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기에 그 莊園을 柳林莊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의 외삼촌들은 이 장원을 가리켜“옛적에는 너의 一家인 朴 大監宅의 別莊 이었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朴大監을 만나러 이곳을 방문한 祖父께서 우연히 어머니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이웃 동네에 사는 妻家를 통하여 媒婆를 보내 子婦로 삼으셨다는 이야기를, 外祖母님께 익히 들어왔었다.
그러므로 나는 朴泳孝라는 이름을 어려서부터 들어온 관계로 낯설지 않았고, 할아버님이 生存해 계실 때에, 간간히 東大門 大監宅이라는 宅號를 듣고 자라서 친근감이 있었다.
6.25사변이 나고, 인공치하가 끝나 갈 무렵인 1950년 9월25일, 우리 집은 미군의 장거리 포탄에 무너져 내렸고, 할아버지는 발을 다쳐 위급한 상황에 누어 계실 곳도 없게 되자,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서울시내 한복판인 동대문 밖 동묘근처의 대감댁으로 피란을 갔었다. 그곳에서 처참하고 무서운 市街戰을 보았지만, 그 때까지 우리 집은 그 댁과 세교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철이 들어 역사를 배워 알게 되자, 日帝에 賦役한 이력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어둠속으로 가라앉아버렸으니, 가슴속 한편으로 애잔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예전에는 문자로만 정보를 읽을 수 있었을 때는, 간간히 그 이름을 읽게 되면 반가웠으나 그것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지금은 컴프터만 켜면 모든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우리 潘南朴氏의 後孫들마저 이 이름을 거론하기 꺼리 는 것 같아서, 여기에서 그분의 大槪나마 살피고자 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분의 諱字대신 春皐라는 그분의 雅號를 쓰기로 한다.
開化思想에 눈뜬 貴族 子弟들.
金玉均과 함께 19세기말 開化運動의 泰斗이기도 한 春皐는 그 짧지 않은 인생의 부침을 통해, 인간의 신념과 정치 권력욕의 불행한 조우를 극명하고 불편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그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욕적이고 패기에 찬 우국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였고, 결국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하였다.
春皐는 조선후기 누대에 걸친 노론의 명문가이던 집안에서,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元陽과 어머니 전주이씨 와의 사이에, 泳敎에 이어 둘째로 수원에서 1861년에 태어났다.
初名은 無量 字는子純이며, 號는 春皐, 末年에는 玄玄居士라고 하였다,
그의 一族으로는 燕巖의 孫子로 開化派의 스승이 된 朴珪壽를 비롯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개화에의 뜻을 품었던 朴定陽등이 있다.
1872년(고종9년) 4월 12살 되던 해에 수원유수 申錫禧의 천거와 우의정 瓛齋 朴珪壽의 추천으로 哲宗의 고명딸인 영혜옹주(榮蕙翁主)의 부마가되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간 이였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왕실가족으로의 편입됨을 의미했고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된 행운은 석 달에 불과하였다.
영혜옹주가 요절하여 春皐는 12살의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남자의 축첩에 엄격하지 않던 조선사회였지만 부마의 재혼에 대해서는 까다로웠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을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였다.
春皐는 12살의 나이에 영혜옹주와의 결혼으로 , 평생 정식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으므로,
이것을 딱하게 여긴 고종임금이 宮女를 하사하여 첩으로 삼게 하였으니,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이 되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春皐를 측은히 여긴 王室과 高宗은 그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18歲가 되던 해에 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19歲가 되던 1879년에는 혜민서제조,
20歲인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런 승승장구를 하는 관직생활 속에서, 1870년도의 중반기부터 형 영교泳敎를 따라,
당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環齋 朴珪壽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실학적 학풍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을 기르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중인계급의 한의학자 대치大致유홍기劉鴻基와 역관인 오경석吳敬錫을 만났다.
그들은 북학파의 거두인 연암의 저술을 통하여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북경에서 가지고온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潁環志略등 청나라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개화사상에 눈떠갔다.
그리하여 젊은 청년인 朴泳孝, 金玉均, 徐光範, 洪英植, 劉吉濬, 朴齊絅, 李東仁,등이 함께 開化黨을 結成하였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던 春皐는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는 우국청년이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드려,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이 영향을 받은 사상의 흐름은, 전통의 학문인 유교의 학문을 재검토하여 실사구시를 부르짖는 실학파지식인들과,
또한 燕巖으로부터 시작한, 주로 청국의 신문물에 영양을 받아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 지식인들로, 大致 劉鴻基와 吳敬錫등으로 이어오는 北學派知識人들인데, 개혁파 사상가들은 이들로 부터 커다란 影響을 받았다.
이들, 즉 吳敬錫과 大致 劉鴻基는 중인출신인 역관과 한의사 출신으로 북경과 열하를 16차나 드나들며, 중국에서 벌어지는 洋貿運動과 중국을 침탈하는 서양세력의 실상을 보고,
또 여러 서적을 구입하고 돌아와서, 우리 조선도 개국하여 계명하고 발전하려면, 국가를 혁신하여야하는 당위성을 젊은 청년들에게 가르치며, 가지고 온 서적을 읽혔던 것이다.
개화파의 비조인 환재와 유대치 오경석등은 봉건질서에 맞서, 身分平等論과 전통적인 華夷觀을 극복하고 國家平等論을 주장할 정도로, 근대적인 사상을 스스로 창출한 걸출한 지식인들이었고, 이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성장한, 신세대 지식인인 갑신정변파지식인들은 실학파지식인들과 북학파지식인들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지만, 짧은 기간 내에 이들을 뛰어넘는 근대세계관을 형성하였고, 당시 가장 급진적인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확립한 사람들이었다.
日本의 近代化에 큰 衝擊을 받다.
그러던 중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開化로 인해 일어난 부작용으로 壬午軍亂1882年이 터진다.
新式軍隊와 舊式軍隊의 차별로 인해 터진 사건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과 함께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급이라는 불리한 상황을 불러왔다.
이 시기 春皐는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과 맺은 濟物浦條約의 移行을 위한 特命全權大使 자격 겸, 제 3차 수신사로, 副使 金萬植, 從事官 徐光範등 수행원 14명에 비공식 사절인 민영익, 김옥균등과 함께 일본에 다녀오게 된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의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 조약의 비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 배상금 50만원의 지불방법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日本으로 가는 배안에서 高宗의 命으로 八卦의 圖案을 基礎로하여,
우리나라 最初로 太極旗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日本에 머물면서, 그는 대사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 일본의 근대화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開國 後 단시간에 軍隊, 商務, 産業분야에서 近代化를 이루어 낸 일본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들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여러 분야의 일본 근대 유명인사와 접족하였다.
그중에는 일본 近代化의 核心人士이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었다.
이 사람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春皐의 사상은 한 단계 성숙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사절단으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짧은 시간 내에 사상적 충격과 깨달음 속에서 한 단계 성숙하여 졌다,
이로서 이들은 스승을 뛰어넘어 근대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고, 조선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개혁사상을 확립한 사람들이 되었는데, 그렇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이때에 일본 지성인들을 만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지성들은 동양지성계에서 서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고 가장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동양 삼국의 지성계를 선도하고 있었고 후일의 갑신정변파 지식인들은 이들의 지도력에 깊숙이 끌려들어갔다.
이 사람 외에 春皐는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 국제정세 등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朝鮮의 自主와 富國强兵은 改化를 通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 서광범등과 의논한 후에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 법을 추진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11월 3개월 만에 다른 동지들은 남겨두고 홀로 귀국하였다.
번번이 挫折되는 開化運動.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돌아 온 조선의 정치상황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임오군란이후, 간섭이 심해진 청나라의 힘을 얻은 親靑事大勢力인 閔氏一派인 민태호 등과, 안동김씨 세력인 김병시, 김병국 등이 중심이 된 수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의 개혁 시도는 이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春皐는 12월 대신 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 판윤이 되어 그가 만든 개혁적인 부서인 치도治道, 경순警巡, 박문博聞의 3국局을
신설하고, 도로의 확장과 정비, 색깔 있는 옷의 장려등 몇 가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민태호, 김병시등 수구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된 3국은 폐지되었고,
그는 1883년에 광주 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守禦營에 練兵隊를 신설하고 일본군식의 신식 군대를 신설하고 훈련을 시작하였지만, 이마저도 수구세력들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해 12월 유수 직 마저 사임했다.
그 와중에 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10월 1일 창간되어 발행되기도 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春皐의 꿈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뜻이 수구 세력에 의해 번번이 꺾이는 시련을 감당할 수 없었던 春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상류층의 젊은이답게, 한방에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전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甲申政變과 3日 天下.
당시 개화파는 대청 문제와 개화의 방략을 둘러싸고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어 있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나타나면서, 君主의 開明化를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의 활동은 한계에 부닥쳤다.
이를 계기로 개화사상은 서양 문물의 수용범위와 실현방법 등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었다.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의 온건파는, 청나라와의 협조를 통해 점진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하지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박영교, 등의 급진파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근대화의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하고 정치개혁을 통한 급진적인 근대화를 꾀하였다.
穩健派는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시하면서 洋貿運動을 모델로 삼았다.
그들은 개화를 때에 맞추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時務로보고, 가려서 서양문물을 수용하자는 採西와 東道西器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나아가 정권을 쥐고 있던 민씨세력과 타협하면서 점진적인 개량을 모색하였으며, 개화사상이 전통적인 性理學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예건대 김윤식은 “청렴을 숭상하고, 가난을 제거하며,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쓰며, 조약을 잘 지켜 우방과의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이처럼 온건파의 개화사상은 時務論의 관점에 기초해 있어, 時務改化論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급진파는 청나라와의 봉건적 관계를 청산하고,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삼아서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뿐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해야 한다는 문화개화를 주장했고, 민씨 정권을 무너트리고, 군권을 장악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春皐는 자신들을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 스스로 주인노릇하려 한다는 뜻의 取新自主라고 부르고, 반대 세력을 옛것만 치키고 남에게 의지한다는 뜻의 守舊依賴라고 나타냈다.
이들은 親淸사대외교의 폐지와, 내각의 설치와 같은 정치체제의 개혁, 인민 평등의 보장과 같은 사회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급진개혁파의 개화사상은, 문명관점에 기초해있어 變法改化論이라고 부른다.
청나라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의 견제로 정치적으로 계속 궁지로 몰리던 春皐를 비롯한 급진적 개혁파들은, 정권에서 소외 되면서, 자신들이 양성한 군대마저 수구정권에 접수 당하게 되었다.
특히 급진 개혁파는 국가 재정난의 타개방식을 둘러 싼 수구정권과의 대립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당오전등의 악화 주조를 반대하고, 울릉도와 제주도의 어업채권을 담보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한 이들의 시도가 일본으로부터 거부되어 급진 개혁파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이에 春皐등은 정변을 통한 정권 장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以夷制夷의 원칙하에 征韓論으로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해 수구 정권인 민씨 일파를 제거하고, 청군을 타도할 계획을 세워, 자신들의 근대화에 대한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자주성은 강조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일본을 포함한 자본주의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여, 일본이 정한론을 정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합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틈을 보여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1884년, 청나라와 프랑스의 베트남을 사이에 둔 일대 격전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3000명의 군대 중, 절반이 빠저 나가고,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아래, 다케조 신 이치로竹添進一浪 일본공사를 통해 접근해 오자, 春皐와 급진 개혁파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청나라로 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조선의 근대화를 단번에 달성하려 하였다.
後日譚 이지만, 春園 李光洙가 春皐의 집으로 찾아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71세의 노인이었던 춘고의 회상은 이러하였다.
내 신사상은 박규수의 사랑에서 나왔소.---
갑신정변의 동기는 그 때 국사라는 것이 엉망이었소.
매관매직에, 국세를 받는 것조차 곤전(명성왕후)이 사사로이 보내는 수세관들의 개인 주머니에 들어가고, 민씨족 권문세가의 미움을 받으면 생명을 부지 할 수가 없었소.
이런 것을 보고서야 어찌 참을 수가 있겠소.”
춘고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주된 원인은 김옥균에 있다고 하였다. 상감을 꼭 붙들고 있어야 했었는데. 책임을 지기로 한 김옥균이 상감을 놓치는 바람에 실패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甲申政變이다. 갑신정변의 계획은 春皐의 집에서 세워졌다.
청나라에 붙어 정권을 잡고 개화운동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수구 꼴통인 閔氏一派 정권을 타도하고, 일거에 권력을 장악하기로 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擧事日을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郵政局의 開設 落成式날로 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신식군대의 군인들과 유학생을 모으고, 청나라 군대의 반격과, 개혁자금의 문제를 일본의 협조로 해결하려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조선침탈의 걸림돌이었던 수구세력과 청나라를 한꺼번에 해결하여주겠다는
급진 개화파들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을 것이라.
일본은 이들 급진개화파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본군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하였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 10월 17일)저녁, 春皐를 비롯한 급진개혁파들은 우정국 낙성피로연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 있던 민씨 척족세력을 살해하고, 일본군과 조선군을 동원하여, 高宗과 王妃를 경우궁에 유폐한 후 정권을 획득하였다.
다음날인 12월 5일에 급진 개혁파는, 정변을 일으킨 본인들이 중심이 된 젊은 정권을 탄생시켰다.
春皐는 이 정권에서 경찰권과 군사권을 가진, 전후영사前後營舍겸 좌포장左捕將의 직책을 맡았다.
12월 6일에는 개혁정치의 신념이 깃든 14개조의 新政綱이 발표되었다.
그 중요내용은 淸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문벌을 폐지하며, 계급제를 타파하여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며, 호조관할로 모든 재정을 관리하고, 경찰제도를 시행하는 등의, 매우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내용이었다.
春皐를 비롯하여 정변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젊은이들이였다.
그때에 김옥균이 33살로 가장 年長이였고 춘고는 23세의 약관에 불과한 미숙하고 급한
젊은이였다. 오직 나라를 위하여 라는 마음뿐 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높았지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력과 기술이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이 정변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新政綱이 발표된 12월 6일 오후, 서울에 주둔한 1500명의 淸國軍은
유폐에서 풀려난 고종이 돌아온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고종을 호위하며 감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급진개혁파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청나라 군대에 밀려 싱겁게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힘만 믿고 있던 갑신정변의 중요세력들은
당황하여 나라의 상징인 임금을 결국 淸國의 군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홍영식과 春皐를 비롯한 일부(一部)는 청나라 군대에 살해(殺害)되었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 일부는 본국으로 도망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의 망명의 길을 택했다. 급진 개혁파가 정권을 잡았던 이 三日間을 <三日天下>라고 부른다.
甲申政變 以後의 行步.
일본에 망명한 春皐는 일본정부의 푸대접 등으로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곧이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이름을 ‘야마자키’로 개명하고, 明治학원 영어과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졸업하고, 1888년부터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성서공회파의 선교사 헨리 루미스(Henry, Loomis)’의 집에 머물며 동서양의 서적을 두루 읽었다. 그는 이 시기에 상당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특히 일본 명치유신의 사상적 영웅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擇劉吉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정국전반에 걸쳐, 漢文으로 13,000여字에 이르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우편으로 고종임금에게 보냈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라고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 독립과 부국강병 등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이미 배운 유교사상의 바탕위에
이때에 습득한 서구의 신사조의 사상이 배양되어 있었던 것이다.
1892년에 春皐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의 권력자들인 민씨 일파들이 보낸 자객 이일직李逸稙, 권동수權東壽, 권재수權在壽에 의해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未遂에 그쳤다. 일본의 여기저기를 떠돌던 春皐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도움을 받아서 유학생들의 기숙사인 親隣義塾을 1893년에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甲午改革과 2次 亡命.
1894년에, 甲午農民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은 텐진조약天鎭條約을 구실로, 청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이어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세력을 구축하고, 친일성격이 강한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1894年)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일본과 박정양의 도움으로 사면되어 10여 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였다.
1894년 12월에,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이를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라고 부른다.
그는 행정 군사 교육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위하여 나라의 자주성을 강조하였으며, 일본방식보다도 오히려 구미방식의 채택을 주장하였다.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종친과 척족의 정치 간여를 금지 하며,정부 각 기관의 사무분장, 재정제도의 정비등을 내용으로 하는 弘範14條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 이었다.
당시 조선의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외교관계를 통해 저지 하려고 하였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 러시아 정책을 폈다.
조선정부 내의 일본의 세력은 점차 줄어들고 春皐는 김홍집과 심한 정책의 갈등을 빚었다.
그러던 중 점점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春皐는, 김홍집을 몰아내고 스스로 總理大臣署理가 되어 실권을 장악한 뒤, 乙未改革을 단행하여 각 방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무렵 곤전은 친 러시아 정책을 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드리고 있었다.
불안을 느낀 春皐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려하였으나 高宗에 의해 거절되었다.
1895년 8월 明聖王后의 시해 사건이 벌어져 시해음모에 가담하였다는 궁지에 몰리게 되자, 신응희申應熙, 우규완禹圭完, 우범선禹範善,등 20여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는 일본에서 10여년을 전전하다 甲午改革으로 시대가 변하자, 朴定陽의 도움을 받아
귀국한다. 보다 확실한 친일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그의 귀국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아닌 조국을 위해 일을 하였다.
이듬해 반역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망명길에 오른 것은, 일본인들의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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