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제공 휘 의宜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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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諱) 의(宜)의 묘는 실전되었다。
봉현(蜂峴)에서 十리 되는 공암현(孔岩縣) 마산리(馬山里)에 커다란 옛 무덤 하나가
있는데 박씨의 산소라고 전해져 오긴 하지만 토박이 서가(徐
哥)가 그 곁에 만든 묘가 매우 많다。또 반남리(潘南里) 정
가(鄭家)의 대숲 속에 옛무덤이 있는데 또한 어떤 이는 박씨
묘라고 한다。영조 경진년에 十七대 손 도원(道源)이 두 곳
을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모두 증거가 없었다。박문찬(朴文
燦)이 《장연족보(張連族譜)》를 만들었는데 그곳에 『공은 송
도의 성등동(星燈洞)에 살았는데 묘는 풍덕(豊德)에 있다』고
하였고 또 『관직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추밀사(樞密使)며 배
위(配位) 윤씨는 용기순위사 대호군(龍騎巡衛司大護軍) 윤보
(允輔)의 딸이다』고 했으나 다른 족보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전하는 말에 묘는 반남서원(潘南書院) 북쪽、음판촌
(陰坂村) 뒤에 있다고 하였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 전하는 말에 묘가 마산(馬山)에 있다고 하나 마산이 어
느 군인지 애초에 몰랐다。十三세손 세채(世采)가 일찍이 파
주(坡州)에 살 때 비로소 고을 경내에 마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박씨 묘가 이곳에 있다는 말도 전해져 왔기에 해를
넘기며 조사하다가 그만두었다。뒤에 나주(羅州) 봉현(蜂峴)
에서 十리 되는 곳에 마산리(馬山里)라는 곳이 있고 이 마을
가운데 바위 하나가 있는데 바위에 구멍이 많기 때문에 공암
(孔巖)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반남선생(潘南先生) 행장을 살펴보면 선생은 공암현 마산
리에서 태어났다고하였으니 이것이 그 땅인가。
공암(孔岩)의 아래는 여조(麗朝)의 고총(古塚)이 하나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는 박우(朴禹)의 무덤이라 하고 또한 마산리 안에는 마을 하나가 있는
데 박가촌(朴哥村)이라고 하였으니、대개 우(禹)와 의(宜)는
글자의 소리가 와전되기 쉽고 또한 지명과 촌명은 서로 부합
하니 이것이 혹시 증거가 될까。다만 여조(麗朝)의 장지에는
반드시 피장자(被葬者)가 누구라는 묘지(墓誌)가 있기 마련
이어서
도원(道源)이 안찰사로 왔을 때 땅을 깊이 파 보았으
나 끝내 증거가 없었으니 어찌 의심이 나지 않겠는가。
어떤이는、어느 때인가 호장공의 묘소를 개축할 때 묻힌 묘지(墓
誌)를 찾으려고 영역(塋域)을 널리 파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
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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