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 호구단자 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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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서계공댁 호구단자
박세당호구단자 (朴世堂戶口單子) 1702(肅宗 28), 1張, 紙本墨書, 116.6×71cm
1702년 박세당이 74세 때 작성한 호구단자의 초본. 당시매 3년 마다 호주가 자신의 호구상황을 기록한 호구단자 2통을 작성하여 관에 올리면 관에서는 내용상의 오류를 점검한 뒤 1통은 호적대장 작성용으로 관에 비치하고, 1통은 호주에게 반환하였다. 이 호구단자는 원본이 아닌 초본이며, 서계종택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호적자료이다. 당시 박세당의 관직은 숭정대부 지중추부사였고, 거주지는 芚夜面 長壽院里 3通首號였다. 그런데 이 주소가 지금의 서계종택을 말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서계종택의 소재지는 당시 양주목 둔야면 長者洞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동이 행정 명칭이기보다는 가문 또는 지역내의 비공식적인 명칭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행정적으로는 서계종택이 장수원리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宜寧南氏追贈告身」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세당이 수락산 장자동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68년이었다. 이 때는 지금의 종택 규모와 같은 가옥은 없었고, 草堂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 등에서 자주 나오는 초당이 바로 그의 주거였던 셈이다. 일찌감치 영달을 포기한 그였기에 주거 역시도 매우 소박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박세당은 自撰墓誌에서 자신의 집을 두고 인위적인 울타리는 없었지만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 등 천연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표현했다. 현재의 서계종택은 5세손인 朴宗吉 대에 조성된 것이다.
호구단자를 통해 박세당의 가족구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 박세당의 집에는 자신을 비롯하여 李召史(妾), 며느리(鄭氏), 아들(泰翰), 손자(弼基), 손부(任氏), 손자(弼遜), 손녀 등 8명이 살고 있었다. 일견 여느 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가족구성은 박세당 말년의 시련이 생생하게 반영된 형태였다.
우선 두번째 부인 光州鄭氏마저 사망하여 첩실인 30세 연하의 李召史가 부인 역할을 하고 있었고, 과부가 된 맏며느리를 부양하고 있었다. 정씨부인은 장자 태유의 두번째 부인으로 1686년 남편을 사별한지 20년 가까이 수절하고 있었다. 태한은 박세당의 3자로 광주정씨 소생이다. 필기와 任氏는 장손부부이며, 필손은 태한의 아들이다. 7세의 손녀 역시 태한의 딸로 추정된다. 박세당은 1686년 장자 태유를, 1689년에는 차자 태보를 잃으면서도 哭子의 애통함을 참고 학문에 주력하는 한편 70이 넘은 나이에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했다.「생계가 어려운 태보의 아버지(西溪)에게 음식물을 내리라」는 肅宗實錄의 기사에서도 그가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설명 : 1702년 박세당이 74세 때 작성한 호구단자의 초본.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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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강원도 강릉군의 반남박씨 朴羲壽의 호구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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