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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암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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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6-08 17:19 조회6,458회 댓글0건

본문

‘분암(墳庵)’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분암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수없이 나타나며 지금도 사찰의 형태로 간혹 남아있다. ‘분암’의 ‘墳’은 무덤, ‘庵’은 암자를 말하니 ‘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말한다. 다시 풀어보자면 ‘선영의 묘역 주위에 건립되어 묘소를 지키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려주는 불교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시설이므로 당연히 스님이 머물러 있고, 주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분암은 재궁(齋宮), 재암(齎庵), 능암(陵庵), 재사(齋舍)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실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까지도 왕릉과 관련한 원당(願堂)과 원찰(願刹)을 세우고 불교적 제의가 성행하였으며, 이를 따라서 사대부나 관료들의 집안과 문중에서도 분암(墳庵)을 세우거나 불교식 상장례를 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분암은 죽은 이를 화장하고 난 유골을 모셔두고 명복을 빌며 승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던 시설이었으나 한때는 유생들의 시회 또는 강학장소, 또는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출처] 독자얼레빗 40. 파주의 분암(墳庵) "성재암"을 아시나요?


반남박씨 문중에는
나주 반남면 호장공 묘소 근처 석천암이  호장공 수호 사찰  분암이다.

<상로재기> 중에서
선조를 처음 이 곳에 장사지낸 뒤로
손자 참의공(參議公)을 합장하였고
3세(世) 뒤인 평도공(平度公)에 이르러
고려의 옛 풍속을 따라 분묘에 암자를 두고 승려에게 지키게 하여
나무 채벌을 막고 제사를 돕게 하였다.
또 7세(世)만에 남곽공(南郭公)이 주목(州牧)이 되어서 제전(祭田)을 더 장만해 주니,
 이 뒤로부터 자손들이 점점 번성해서 더욱 경건하게 받들었다.
무덤을 지키는 호구도 있고 찬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암자는 의관(儀觀)을 볼 만하게 하고 들러서 살펴보는 것을 돕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석천암(石泉庵) 중수(重修) 추기(追記)>

반남(潘南)의 봉현(蜂峴)에 있는 석천암(石泉庵)은 바로 우리 시조 호장공(戶長公)과 참의공(參議公) 양위(兩位)의 묘를 지키는 재실이다.
창건하던 사적과 중수하던 연월은 고조부 학생공(學生公)이 기문을 지어 대들보 위에 간직해 두었으니 선대의 위선(爲先)하신 지성을 생각하면 감개와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아아, 이 암자는 평도공(平度公)이 창건한 뒤로 지금까지 세 번 중수하였다.
근년에는 이 암자를 지키는 승려가 한두 명에 불과하여 헐리는 대로 보수할 수 없기에 장차 무너질 지경이니
이것은 쇠약한 승려의 책임이 아니다.
만약에 지으려는 성의만 있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그리하여 종중에서 상의하여 날을 받아 집을 부수고
병오년 1월 20일에 처음 일을 시작해서 2월 4일 경인 미시(未時)에 상량(上樑)을 하게 되니 바로 도광(道光) 27년(1846)으로
금상(今上, 헌종) 즉위 12년 병오년이다.
재목과 기와는 옛것을 쓰고 간혹 새 재목을 썼다.
횡곽(橫廓) 여섯 칸은 헐어버리고 좌우 두 칸을 덧붙였는데 애를 써서 일을 감독하여
건축의 일이 이루어졌지만 감히 선조의 뜻을 계승했다고 말하리오.
이에 추기(追記)를 지어서 대들보 위에 간직해서 후일의 참고자료로 삼는다.

도광(道光) 27년 병오년(1846) 2월 4일
반남 호장공(戶長公) 21대손 제관(齊管)
감역(監役) 동지(同知) 강몽해(姜夢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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