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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 朴勝極 (護軍公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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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종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6-07 16:58 조회3,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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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 박승극(朴勝極 : 1909 ~ ? )

應珠―宜―允茂―秀―尙衷―訔―葵―秉中―輅―僖―雲從―濂―善元―時雨―斗綱―震興―致欽―師民―淳源―宗植―奎壽―齊鳳―興陽―勝極

  박승극은 근대시기 수원과 화성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25번이나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던 분으로 1909년 12월 14일 경기도 수원시(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반남박씨네(護軍公派)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興陽의 아들로 태어나 1928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日本大學에 진학했으나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후 일본으로 가지 않고 자퇴를 하였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는 늘 우수에 잠겨 있었다.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자각과 인식은 이지적인 그로 하여금 허튼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진지한 사람으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민족 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1927년 함께 결성한 민족운동단체인 新幹會가 조직되고, 전국 각지에 신간회 지회와 분회를 만들면서 청년들의 활동 공간을 만들어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박승극으로 하여금 일본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식민지 조국에서 보다 확실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1929년 박승극은 고향에서 「신흥학당」을 열어 無産靑年들을 교양하며 「반도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오산청년회 및 광활청년회 등과 연합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신간회 수원지회 총무간사, 서기장을 역임하면서 수원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또『朝鮮之光』에 소설 「농민」을 발표하면서 문학을 통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청년동맹 및 朴八陽(世養公后, 1905년 곡반정리 출생), 이기영 등이 주도한 조선예술가동맹(KAPE)의 맹원이기도 했다.

  1930년 수원청년동맹 위원장이 되었는데 이 당시 그는 합법운동 공간 창출을 위해 수원읍에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메이데이예비검속 실시로 水原청년동맹 위원장 朴勝極 피검되고 조선일보 水原지국 수색당함. [출전] 조선일보 1931. 5. 3.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3 p. 186.)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일제 당국으로 하여금 요주의 인물로 주시하게 되었고 1932년 일제 경찰에 의해 조작된 적색농민단사건으로 검거되어 1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그의 두 동생 朴勝禹와 朴勝浩도 각각 서울 서대문 영천과 고향 양감에서 형 박승극의 영향을 받아 사회운동을 했다.

  박승극은 고향인 화성을 비롯하여 수원, 평택지방에서 조국해방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감옥생활도 하였지만 문학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카프 가맹 이듬해인 1929년 『조선지광』 6월호에 일제치하 농민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단편소설 「농민」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쓴 작품「재출발」,「풍진」,「백골」,「술」,「눈」등은 그가 농민운동 현장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뛰어난 사실성을 얻을 수 있었다.

  박승극은 소설창작과 비평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당대의 임화, 김남천의 논쟁에도 참여하여 두 사람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문학평론가로서도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농민문학 진흥론」,「농민문학의 신과업」등에서 박승극이 주장한 토지분배, 토지개혁 등의 이슈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당대 조선문제의 핵심을 토지개혁에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문학가동맹과 같은 독립된 농민문학 단체를 만들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농촌, 농민문제를 주요 계급모순으로 이해하면서 당대 농민의 굶주림, 공출, 징용, 소작인과 지주 계급간의 첨예한 갈등을 작품화하여 1946년 발표한 단편소설「떡」, 1948년의 중편「밥」등에는 해방공간의 현실이 잘 그려져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조국에서 박승극은 수원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해 11월 8일 군정포고령위반으로 체포됨으로써 해방 이후 구속된 최초의 문인으로 기록된다. 당시 박승극이 구속될 때 여운형, 이강국 등이 수원에 급히 내려올 정도이고 보면 박승극의 정치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1947년 봄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선전부부장이 되어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해방정국의 좌우익 갈등과 미군정의 탄압에 못 이겨 1948년 월북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수원시인민위원장이 되어 수원에 왔다가 이후 인민군의 북상과 함께 이북으로 돌아갔다. 또한 문학적 열정에 비례하는 조국애로 해방공간에서 박승극이 수행한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도 지부 활동 및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상무위원 활동이나 건국준비위원회 수원지부의 핵심적인 활동이 그의 '뜨거운 문학'을 지우거나 폄하하는 전제가 된다면, 이는 결국 문학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고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48년 8월 입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한의 국회의원에 해당)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문화선정성 문학예술부장, 국립출판사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1960년대까지 창작에 정진했다고 한다.

  이후 개성시당 부위원장 및 청진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0년대 죽어 평양의 애국열사 묘역에 묻혀있다고 전한다. 남한문학사에서 문학인 박승극이 공식적으로 1988년 복권, 해금되었다. 최근「.『박승극 문학전집』은 전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제1권 소설집(2001년, 학민사) 에 이어, 제2권 수필집(2011년, 학민사)에는 선생의 첫 수필 작품집인 『다여집』과, 당시 농민들을 대상으로 금융조합에서 발간하던 『半島の光』에 한글로 발표된 수필, 지식인을 대상으로 발간되었던 『東洋之光』에 일본어로 발표된 수필을 모아 엮었다.

   안타깝게도 남쪽에 거주하는 대다수 반남박씨 종원들과 이념과 사상은 다르나, 사회적 모순에 고뇌하고 모두가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에 앞장선 분으로 이념을 떠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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