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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야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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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24 23:48 조회3,848회 댓글0건

본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일화(逸話).

이목은(李牧隱). 정포은(鄭圃隱). 이도은(李陶隱). 길야은(吉冶隱)은 이른바 고려조 말년의 四隱선생으로, 그 도학 문장과 재덕 충의가 천추백세에 빛나는 분들이다.

그중에서도 포은 정선생의 사적은 모르는 분이 거의 없을 만큼 유포되었으나, 포은선생이 크고 거룩한 선배로 스승으로 섬기던 목은 이선생의 사적은 , 아는 사람들은 극히 추모하며 존경하며 숭배하나, 모르는 사람들은 혹 그가 불교를 신앙하였다고 하면서 유생측에서 반대하고, 혹은 고려를 위하여 致命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자가 없지 않으니, 이것은 다 그릇된 관찰이며 역사에 어두운 류단(謬斷)과 편견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를 믿었다하나 그가 절에 가서 목탁을 두드리며 중(僧)노릇을 한일이 없고, 또 공자와 맹자를 존경할지언정 배척하거나 훼방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유교의 죄인이라 하는가?                                                                        이것은 완고하고 무식하던 옛날선비들이 까닭 없이 先賢을 공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버릇없는 언동이다. 불교에 정통한 사람이 유교를 모를 리도 아니요, 유교를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불교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없다. 유,불교에 정통하면 정통할수록 그의 학식은 고명할 것이요, 품행이 고결하였으니 , 특히 그를 높이 평가하여야 옳을 것이지 결코 비난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또 불교가 중국을 거치며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이 유교에 힘쓰던 때 보다 여러 백년 앞섰으며, 더욱이 고려 때는 불교로써 국교를 삼아 전국사람이 신봉하였고, 유교가 극히 미미하다가, 조선시대에 비로소 程朱의 學說이 들어와, 거기에 심취한 무리가 朱子의 말에 조금만 견해를 달리하면 斯文亂賊이니 무어니 하며, 큰 역적이나 저의 원수처럼 칼을 가지고 덤벼드니 이것이야말로 우스운 滑稽劇 이었다.

또 한 가지는 남의 나라에 벼슬하여 최고 관직에 등용되었던 사람이 그 나라가 망할 때 한번 죽어 절개를 보이는 것이 물론 장쾌한 일이나, 남이 죽이지 않는 것을 스스로 죽는 것은 어느 의미로는 그 자신이 불행하다고 할 것이다. 牧隱에게 圃隱의 絶死한것을 닮으라고 하는 말은 당치않은 책망이다.

그때 그가 當局한 大臣이 아니요 귀양 다니기에 분주하였으니, 李太祖도 그를 善竹橋에서 해칠 이유와 명목이 없고, 그가 자살하지 못한 것도 마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던 것이요, 그의 아들이 박해를 받어 , 혹은 척살을 당하고 혹은 같이 귀양을 갔으며, 그가 태조와 면회하는 마당에서 그와 같이 벼슬을 하면은 후록(厚祿)을 주겠다며 지극한 回遊策으로 유혹을 당했으나 한 번도 벼슬을 받지 않았고, 王氏를 섬기던 옛 親友들이 朝鮮에 벼슬하느라고 떼를 지어 들어오는 꼴을 보고, 그는 “내가 앉을 자리가 없고 또 여기 있기가 싫으니 가겠노라”하며, 길게 揖하여 친구 대하듯 총총히 인사하고 시골로 내려가다 驪州 燕子灘에서 죽은 것을, 그때의 사람들은 “조선 사람이 毒殺한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죽기는 죽었으되 스스로 自刃하지 못하였을 뿐인데, 松竹같은 절개는 누구에게도 못지않게 지켜온 牧隱先生을 어찌 옳다 그르다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령 韓末에 총리대신 李完用이가 병합조약에 조인하러 가는 도중에, 마차의 전복으로 죽었다고 하면 그자에게 충신이라 할 것이며, 閔丙奭이나 宋秉畯 尹德榮같은 賣國好色家들이 8월 29일 밤에 제집 안방구석에서 妾을 끼고 누어서 아편을 잘못 많이 먹고 腹上屍가 되었다면, 그것을 절개 지키기 위하여 자살하였다고 볼 것이냐?

乙巳保護條約의 無效를 萬國平和會議에 호소하려고 유럽에 갔던 우리의 사절단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함께하면서도, 李儁氏는 烈士라는 이름을 받고, 李相卨씨며 李瑋鍾씨같은 분은 그 姓名을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을 보라. 죽고 사는 것은 그들 운수의 幸과 不幸일 뿐이지 忠烈과 절개에 무슨 高下가 있을 것인가?                              오히려 필자가 확실히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 和蘭國에 가는 일은, 그 發案과 設計 自初至終 모두가 李相卨씨의 의견이었고, 그때의 參政大臣 朴齊純을 통하여 高宗皇帝에게 보고되어 전폭적인 재가를 받아 실행에 착수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 일이 성공되었다면, 그 논공행상에 있어 이상설이 첫째요 박제순이 차석이 될 것임은 틀림없이 지당한 사실일 것이다.

그런즉 여말의 충신으로 목은이 제 일인자가 아니라면 모르되, 결코 저 杜門洞의 不朝見의 義士 여러분에게 비하여, 고생을 많이 한 점이 더하면 더 하였지 결코 부족함이 없는 故心慘憺하던 危忠孤節의 元老重臣다. 어찌 후세사람이 용이하게 吹毛覓疵를 허락할 것이랴. 필자가 본고를 쓰게 되는 것은 오직 그가 중국 사람들에게 그 민첩한 才識과 輕妙한 諷刺와 嘲弄으로써, 그 거만스러운 自尊自大의 풍습과 과오를 고처주어 가면서, 우리를 侮視하지 못하게 한 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함이요, 麗朝에 대한 그의 節義如何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가 孔子이건 釋迦이건 그런 것을 가지고 구차한 변호를 함이 아닌 것임을 미리 한마디 하여둔다.

그는 지금 忠淸道 內浦의 韓山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文孝公稼亭先生 李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되는 가정이 일찍 중원에 가서 元나라의 정식 科試인 소위 制科에 합격하고, 그 뒤를 이어, 그가 겨우 20여세 되는 외국소년으로 중국 북경에 가서, 數 萬名의 중국 선비가 그 재주와 학식을 자랑하는 자리로 , 더구나 鄕試와 省試에서 두 번씩 나 예비시험에 합격한 수재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首席壯元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독점하였다. 그러나 중국선비의 거만한 자존심은 고려 사람에게 장원급제를 양보할 수 없다하여, 정치적 수단으로 중국 사람을 제 一位에 두고 목은을 第 二位로 바꿔치는 협잡을 부렸다.
牧隱은 즉시 翰林院 檢討官이라는 學士벼슬에 임관되어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그때 制科 합격자는 지금의 노벨상 입선자에 못지않은 선비들의 최고 명예로 생각하였으니 만큼, 牧隱 소년의 이름은 하루아침에 天下의 늙고 젊은 선비와 자식을 둔 부모들의 羨慕의 對象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권세와 부귀가 온 조정을 누르던 元나라의 정승의 딸이 自進하여 먼저 牧隱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는 이 나라의 최고대신 아무개의 외동딸이오, 당년18세의 변변치 못하나 天下美人이라고 지목받는 처녀인데, 이번에 당신이 制科 壯元에 뽑혔다가, 중국 사람의 질투로 억울하게 제 2위로 내려간 소식을 듣고 義憤을 참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科試에는 천하제일에는 참예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천하제일의 미녀와 천하제일의 부귀를 얻으면 되지 않겠소. 나의 부모도 동의하고 당신의 회답만 기다리니 속히 의견을 알려 주시오”하는 반가운 편지를 통하였으나, 목은은 이미 본국에서 장가 든 사람이므로 정직하게 謝絶하였다. 이것이 더욱 북경천지의 커다란 새로운 話題를 일으켜 중국인의 질투와 시기를 사게 되었었다. 이것이 몽고족의 말세이니 그렇게 되었지, 만약 쿠빌라이(忽必烈)같은 제왕이 위에 있었다면, 그는 넉넉히 왕공의 지위에 발탁되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중국선비는 목은을 미워하여 당시 북경문단의 패권을 잡고 있던 조수(洮燧) 염복(閻復) 구양현(歐陽玄)등의 문단 四天王을 움직여 목은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북경의 제일 큰 요정에서 一流文士와 名技 여러 백 명을 모아놓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목은을 초대하였다.

全員이 예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후, 洮. 閻, 歐陽의 순서로 上席에 좌정한 大先輩측에서 부터 목은에게 재주시험을 개시한다. 조수가 먼저 크게 [子謂伯魚曰]의 다섯 자를 써서 벽에 붙이며 설명하여 말하되, “이것은 누구나 아는바와 같이 논어가운데 있는 문구이다. 내가 이것을 내건 것은 이 다섯 글자의 뜻을 가지고 儒家四書의 속에서 이 뜻에 상당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대답하라는 것이다. 시각은 즉시로 여유가 없다. 李 翰林이 대답하지 못 하거든 그때는 누구나 나서되 그 전에는 움직이지 못한다.”하며 難題를 끄집어낸다. 중국의 남녀가 모두 목은을 주시하는데, 목은은 태연하게 붓을 잡고 일어나 그 밑에 [이 사람은 告子가 아니냐.] 라고 쓴다. 다음은 염복이 일어나, “나는 먼저 詩傳에서 한귀절과, 또 唐詩 五絶에서 한귀절, 최후에 藥名 한 가지를 찾아내려하니, 이 한림이 두 가지만 대답 하시요”하고,                                                          [習習俗風(詩傳) 日暮掩柴扉(唐詩)]의 아홉 글자를 쓰고 이것은 [防風]하며 마친다.     목은이 지체 없이 나가서 [羙羊之皮, 縉歲又縉年 陳皮.] [伐木丁丁, 柴門聞犬吠. 木賊]의 대답을 생각하지도 않고 썼다.                                                      중국문사들이 비로소 놀라는 얼굴로 목은을 쳐다보며 감탄을 하는 사이에, 歐陽玄이라고 이번 시험에 시험관으로 있던 長老가 앉아서 종이를 펴고, [持盃入海曰 海大]의 일곱 글자를 쓰면서 싱긋 웃고 牧隱에게 對句로 짝을 채우라고 하니, 목은이 서슴없이 써 보이기를 [座井觀天曰 天小]라고 한다.                                                    즉 중국 사람은 우리를 달팽이(螔)에 비하여 네가 달팽이 껍질 같은 작은 술잔을 들고 바다에 처음 뛰어 들 때는 중국이 큰 줄을 몰랐다가 이제 본즉 어떠하냐 하는 조롱이다.   그것에 대한 목은의 대답은 “너는 우물에서 자란 개구리(蛙)모양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하늘이 적은 줄만 아는 불쌍한 사람이다”하는 뜻을 표시한 것으로 도리어 조롱하는 것이다. 구양현이 굽히지 않고 다시 [獸蹄烏蹟之徒交於中國]의 열 글자를 써서 노골적으로 모욕하였다.“너희 같은 금수모양으로 된 것들이 이제는 중국에서 교제하게 되었구나.”하는 조롱이다.                                                               목은도 웃으며 衆人環視하는 가운데 [鷄鳴狗吠之聲遠于四隣]이라 하였다. 다 같이 孟子에 있는 熟語로서 “너의 수작은 개 짖는 소리와 무엇이 다르냐?”하는 반박이다. 當意卽妙. 더할 나위 없는 통쾌한 대답이요 민첩한 댓구이다.                                   그때에 중국과 고려사람 뿐만 아니라 安南, 暹羅(태국),琉球, 印度에서 온 한문을 아는 나라의 사절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까지 혀를 내두르고 가벼운 한숨을 쉬며 목은에게 감사하는 눈치를 보인다.                                                        그것을 보고 조수가 좌중에게“이 한림은 천재이다. 이 사람과 말하다가는 우리가 老拙이 될지언정 그 재주와 그 학문을 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을 장원에 뽑지 않은 것이 어찌 우리의 수치가 아니냐?”하며, 驚服과 함께 깊이 사과하고 술을 내어 그날은 밤이 깊도록 즐겼다.

이와 같이 목은의 재주와 학문과 해학(諧謔)은 고려 사람의 성가를 올리며, 동시에 거만하던 중국인의 벌룩거리는 코를 납작하게 제압하였다. 이때 목은에게 대한 중국 사람들의 인기는 자못 대단하였다.

요컨대 麗末의 李 牧隱과 韓末의 金 雲養은 그 문학과 인품으로 중국 사람에게 우리 겨레가 저들에게 지지 않는 것을 보여준 대표자들이다. 

끝에 한마디 할 것은, 목은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역시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던 通亭 姜淮伯이라는 분이 있었다. 牧隱의 손자 이계전(李季甸)이라는 사람이 통정의 손자 姜孟卿과 또한 世交의 집안으로 정분 좋게 같은 때에 벼슬하고 지냈다.                  世宗 시절에 이계전이 먼저 우리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明나라 서울인 북경에 갔더니, 그를 접반하는 禮部主客郞으로 글 잘하는 사람이, 그가 목은의 손자인 것을 알고서는 “당신은 大家의 자손이오.”하며, 특별히 경애하더니, 어느 날 계전에게 “이제는 황제에게 朝見하는 정식 예절이 끝났으니, 우리가 마음대로 술을 마시며 글이나 지어 봅시다. 북경의 이름난 술집에 내일부터 안내하려니와, 우선 오늘 이 직석에서 早朝大明宮 이라는 글제로, 옛날 唐나라 詩人 杜子美, 王維, 岑參, 賈至,의 本을 배워 次韻하는 시를 지어 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소.”하며 글을 조른다.                                      계전이 아무리 시 짓기를 생각하였으나, 창졸간에 응수하는 도리가 없어 당황하다가, 별수 없이 牧隱이 지은 詩集중에서, 大闕에 朝會 가던 詩 세수를 생각하여, 이것을 자기가 지은 것처럼 써 보였다.借作이 아닌 저의 祖父의 詩를 盜襲한 것이다. 그리고 내심 부끄러워 발각되지 않을까 겁냈더니, 그것을 모르는 저 사람은 계전이 지은 것으로 여겨 크게 激賞하며 오래 吟詠하면서 칭찬을 늘어놓는다. “당신의 조부가 문장이라더니 당신도 조부에게 못지않은 시인이다. 공자의 손자에 자사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당신네는 참으로 거룩한 집안이요.” 하며 감복하는 것이었다.

계전이 곤경은 요행으로 免하였으나, 너무나도 무안하여 귀국 후 어느 친구에게 말하며 苦笑하였다.그러다가, 바로 다음번에 姜孟卿이 李季甸의 후임 격으로 서장관이 되어, 사절단이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매, 계전이 웃으며 “북경구경은 좋지만 중국 사람의 시 짓자는 졸음에는 질색일 것일세.”하였더니,맹경이 빙그레하며 “자네의 집에는 목은집이 있듯이, 우리 집에도 통정집이 있는데 무엇을 근심 하겠는가?”하여, 듣는 사람마다 絶倒 하였다는 餘話가 남아있다. 終.

                              洪木春 著 善一文化社 發行 野談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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