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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임명 담은 교지 첫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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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23 07:58 조회3,5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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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임명' 담은 교지(敎旨) 첫 발굴

전병근 기자title_author_arrow_up.gif

 

입력 : 2012.05.23 03:08

교지수집가 김문웅씨 본지 공개 - 조선 후기 문신 정형복을 청백리에 추천해 뽑았다는
영조의 명 담겨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그를 좋아했고 관리들은 두려워 떨었다. 그는 궐 밖에 나가면 재해를 입은 주민의 부당한 납세 부담을 덜기 위해 애썼고, 궐 안으로 들면 지배층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사대부의 기생 축첩을 단속했다. 이런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은 나날이 깊어져 수령으로, 암행어사로, 관찰사로, 외교사절로 두루두루 중용했다. 그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여 직접 제문을 지어 보내고, 그의 아들을 발탁해 올리라는 특명까지 내렸다.

숙종·영조 대에 청렴 관리의 모범으로 유명했던 정형복(鄭亨復·1686~1769)을 청백리에 명하는 어명이 담긴 교지가 발견됐다. 교지 수집가인 김문웅씨가 22일 본지에 공개한 교지에는 '어명을 전한다. 건륭 12년 9월 16일 통정대부(정3품) 정형복을 가선대부(종2품)에 임명한다. 청백리로 녹선된 데 따라 품계를 더해주는 것이다(敎旨 鄭亨復 爲 嘉善大夫 者 乾隆 十二年 九月 十六日 淸白 加資事承 傳)'라고 적혀 있다. 영조 23년(1747년) 것이다. 교지 전문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안승준 책임연구원은 "임금의 지시·명령을 담은 공문서인 교지에 청백리 임명 내용이 담긴 것이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간 학계에서는 청백리는 사망 후에 부여된 것이란 주장과 조선 중기 이후엔 생존·사망 시 모두 청백리로 불렸다는 주장이 맞섰다. 이번에 청백리 교지가 발굴되면서 후자가 힘을 얻게 됐다.

icon_img_caption.jpg 조선 후기 문신 정형복(왼쪽 초상화)을 청백리에 녹선(추천하여 뽑음)했다는 영조의 명을 담은 교지./김문웅씨 제공

정형복은 1725년(영조 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벼슬을 시작, 승승장구했다. 출세의 힘은 '강직함'이었다. 1729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기강 확립에 대한 소신을 상소했고 1732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직접 학정을 바로잡았다. 당시 고부군은 백성이 원치 않는 환곡을 강제로 대여한 후 이자를 납부하게 하는 폐습으로 원성이 자자했다. 정형복은 이를 바로잡았다. 그 뒤 경차관으로 발탁된 후 진전(陳田·경작하지 않아 황폐한 토지)과 재결(災結·재해를 입어 공부상에서 면해야 할 토지)을 늘리도록 조정에 건의하는 등 민원 해결에 팔을 걷어붙였다.

☞청백리

고려 때 염리(廉吏)에서 유래한 제도. 조선 초기까지 염리라 불렀다. 녹선(錄選)되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동시에 승진 특전을 누렸다. 자손에게도 음서(공신이나 전·현직 고관 자제를 과거 없이 관리로 채용) 혜택이 주어졌다. 조선시대 청백리는 모두 218명. 세종 때 황희 정승이 대표적이다.



우리 반남박씨에는  청백리에 녹선된 분은  세양공 한분이 계시다

東史約 12권, 본조기(조선조), 무자년 세조 13년

東史約<朝鮮茅亭 李元翼編> 券之 1十二. 本朝紀 戊子十三年

淸白吏를 뽑았는데 大司憲 盧叔仝, 良敬公 鄭文炯. 錦川君 朴薑 全州府尹 李堰 益山郡守 郭安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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