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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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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2-21 09:59 조회4,856회 댓글0건

본문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서계(西溪)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계미년(1703, 숙종29)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우리 공은 / 惟公

반남공 맥을 이은 후손이시고 / 潘南一脈

선조 야천 유풍을 이어받았지 / 冶川遺風

공의 재덕 밖으로 환히 빛났고 / 英華彪外

진실함과 신의를 맘에 지녔네 / 忠信在躬

나간 때가 시대와 서로 어긋나 / 進與時違

물러나서 곤궁함을 고수하였지 / 退而固窮

천지에 부끄러움 하나 없도록 / 俯仰無怍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네 / 一其始終

아아, / 嗚呼

나라의 큰 동량이 될 만하다고 / 人嘗期公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했었지 / 可當棟隆

그러나 불러도 안 움직인 건 / 招麾不動

금세엔 오직 공이 유일하다네 / 今世惟公

어째서 높은 자리 마다하고서 / 曷不廊廟

시골집에 파묻혀 은거하였나 / 而沒蒿蓬

탐욕을 청렴하게 만드는 절개 / 廉頑一節

그 어찌 크나큰 공이 아니랴 / 抑豈非功

아아, / 嗚呼

큰아들 직언하다 목숨을 잃고 / 大兒死直

작은아들 충언으로 목숨 잃으니 / 小兒死忠

한집안에 훌륭한 이 다 모인 건 / 一家萃美

고금에 어느 집안 이와 같으랴 / 今古誰同

양주 땅에 위치한 수락산 서쪽 / 水落之西

도봉에서 보자면 동쪽 언덕에 / 道峯之東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묻히니 / 父子同歸

그 정기 더욱더 크다 하겠네 / 正氣彌穹

아아, / 嗚呼

어느새 세도 이미 땅에 떨어져 / 世道旣喪

시비와 흑백이 뒤섞인 세상 / 緇素相蒙

쏙닥쏙닥 참소하는 못된 이들이 / 緝緝翩翩

번번이 임금을 기만하였네 / 儘欺天聰

그러나 사람 마음 쉬이 안 속고 / 人心難誣

천리는 자연스레 공변되나니 / 天理自公

백 년 뒤엔 가렸던 진실 드러나 / 百載之後

어둠을 깨치고서 훤히 밝으리 / 昭如發矇

아아, / 嗚呼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나 / 後死殘喘

온갖 감회 마음에 교차한다네 / 百感縈中

의리로는 조문이 당연하지만 / 義當素車

칩거한 벌레와 똑같은 신세 / 身作蟄蟲

술 한 잔에 이 글로 유식하자니 / 緘辭侑觴

마음 다 표현할 길이 없구나 / 言不盡衷

말은 비록 다 하지 못한다 해도 / 言雖不盡

그대와 내 마음 서로 통하리 / 方寸可通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초본(初本)

아아, 지난 경진년(1700, 숙종26) 가을, 마지막으로 선영(先塋)을 찾아 하직을 드리기 위해 떠난 길에 누이의 무덤까지 돌아보고는 공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때 공은 나의 얼굴이 속티를 벗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나는 공의 총명이 줄지 않은 것에 대해 감탄하였습니다. 봄추위와 가을더위처럼 사람이 늙어 강건한 것은 결국 오래갈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서로 웃으며 이별하였는데, 이 이별이 실로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덧 무덤에서 공을 장사 지낼 날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근근이 명을 이어 가는 거의 죽어 가는 목숨이라 장사(葬事)에 가 볼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략 슬픈 감회를 적어 멀리서나마 술 한 잔을 올려 유식(侑食)하게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아, 공은 반남공의 후예이고 야천의 후손입니다. 공은 재덕이 밖으로 환히 드러났고 진실함과 신의를 안에 지녔으며, 그 뜻과 식견은 심원(深遠)하였고 지조는 확실하게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국과 역량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다들 공이 정계에 나가서 중요한 지위에 오르면 당연히 임금을 바로잡고 정사를 바르게 하는 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명(召命)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은 절조를 지녔기에 나라의 위대한 야인(野人)이 되셨습니다. 이미 그 뜻이 시대와 어긋나서 물러나겠다고 일찍 판단한 뒤로는, 명리의 길은 영영 끊어 버렸고 안빈낙도하는 빈한한 선비가 되어 농사짓고 나무하는 것을 생애로 삼았으니, 그 뒤로는 단지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의표가 세상 밖에 초연한 것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공이 비록 조정에서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탐욕스런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이 확고한 뜻을 지니게 만드는 것으로 세도(世道)에 도움을 준 점에서는, 어찌 그 공(功)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은 본래 예문관과 홍문관에서 활약한 분이므로 경연(經筵) 석상이나 정부의 고위직이 알맞은 자리인데, 나무하는 거친 시골에서 노닐며 산골에서 험난하게 사는 길을 택하였으니, 마음은 비록 형통하였으나 몸은 여의치 못했고 뜻은 비록 펼쳤으나 도(道)는 굴곡졌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두 아들이 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명하였으나 큰아들은 직언을 하다 죽고 작은아들은 충언으로 죽었습니다. 비록 그 맑은 이름과 빼어난 절조가 크게 나라와 집안의 빛이 되기는 하였지만 난초가 꺾이고 구슬이 깨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셈이니, 집안사람의 정리(情理)로 볼 때에는 세간에 보기 드문 참혹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아, 그리고 올여름의 일은 또 뜻밖에 벌어진 일인데, 이는 쏙닥거리며 참소하는 무리들이 임금을 기만한 것입니다. 만약 자애로운 성상의 특별 배려가 아니었다면 먼 섬으로 유배 갔다가 유골을 수습해 와야 하는 지경을 거의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공의 집안처럼 선을 행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며 굽히지 않고 바른 도리를 지켜 가는 집안에 유독 이러한 재앙이 많단 말입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공의 이른바 《사변록(思辨錄)》은 차분히 오랫동안 침잠하여 연구한 것을 기록하여 권질(卷帙)을 이룬 것입니다. 비록 간간이 선현의 뜻을 넘나드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공의 뜻이 어찌 감히 이설(異說)을 세우려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의심을 질정(質正)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회재(晦齋)나 포저(浦渚) 같은 여러 선정(先正)들도 일찍이 했던 것입니다. 현석(玄石)이 이른 바 “한집안 내에서 의견이 비록 다르더라도 집안을 위하는 취지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적절한 비유라고 할 만합니다. 신미년(1691, 숙종17) 중하(仲夏)에 석림(石林)의 회합에서 형이 상자에서 그 책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나는 그때 누님을 잃은 슬픔이 극심하여 그 책을 차분히 보지 못하고 《논어》와 관련된 설만 대략 보았습니다. 대부분 모두 평이하면서도 절실한 것으로 구이지학(口耳之學)의 공허한 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에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한가한 가운데 얻은 것으로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책을 보는 데 있어 너무 얕게 보고 너무 국한 지어 보려는 병폐가 있는 듯하여 대략 저의 견해를 피력하여 논변하였으나 의견이 일치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설의 경우에는 미처 두루 연구하지 못하였기에, 돌아온 뒤에 그 책을 빌려 와서 한번 검토할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침침하고 정신이 혼미한 데다 글을 짚어 가며 읽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라 다시 생소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에 끝내는 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타고난 능력 면에서 생각이 꽉 막히다 보니 곳곳에서 일을 간과함으로써 친구 간의 직분을 크게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을 꼭 늦다고만 할 수는 없고 타산지석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편지를 써서 대략이나마 저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형의 생각은 과연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변록》에서 사람을 논한 대목[論人]의 경우에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의 청탁(淸濁) 구분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실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곧은 말과 바른 의론을 하기에는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삼보결록(三輔決錄)》처럼 별도로 논저(論著)를 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에게 써 준 글에서 등한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일에 도움도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재앙만 초래하게 되어 또다시 성대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하였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들을 고명한 공에게 질정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모두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아, 나라에 별일이 없을 때에 시골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으며, 이제는 땅속으로 편안히 돌아가 부자와 형제가 같은 산에 묻히게 되셨습니다. 살아서는 연연한 것이 없고 죽어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아아, 공으로서는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오직 황혼 녘에 홀로 서 있으면서 친척과 친구들을 거의 다 떠나보낸 채 뒤늦게 죽는 저의 괴로운 심정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자리를 마련하여 공의 무덤을 향해 곡하고 자식을 대신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정신이 혼몽하여 속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주C-001]서계(西溪) :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호이다. 자는 계긍(季肯)이고 호는 잠수(潛叟) 또는 서계이다.

[주D-001]반남공(潘南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 박상충(朴尙衷)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간신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2]야천(冶川) : 박소(朴紹, 1493~1534)의 호이다. 자는 언주(彦胄)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주D-003]나간 …… 고수하였지 : 박세당은 1668년(현종9)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 당쟁에 혐오를 느껴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것을 말한다.

[주D-004]큰아들 …… 잃고 : 큰아들은 박태유(朴泰維, 1648~1686)이다. 1683년(숙종9) 지평으로서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김익훈(金益勳)을 탄핵하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주D-005]작은아들 …… 잃으니 : 작은아들은 박태보를 말한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주D-006]아버지와 …… 묻히니 : 박세당과 박태유의 무덤은 양주 수락산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있다.

[주D-007]올여름의 일 : 박세당이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송시열을 폄하하는 내용이 있다 하여 결국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소척(疏斥)을 받았고 그 결과 삭탈관작(削奪官爵)과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처분을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08]만약 …… 것입니다 : 이경석의 일로 문외출송의 처분을 받고 박세당은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는데, 처음에는 대간의 계사로 옥과(玉果)에 원찬(遠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판윤(判尹)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원찬의 명이 환수되어 5월에 석천(石泉)으로 돌아갔다.

[주D-009]회재(晦齋)나 …… 것입니다 :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성리학에 근본을 두면서도 자율적인 학문 자세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치보망장(格致補亡章)’을 인정하지 않고 경(經) 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으로 옮기려고 한 것이 그 실례이다. 포저(浦渚) 조익(趙翼)도 《곤지록(困知錄)》ㆍ《중용주해(中庸註解)》ㆍ《대학주해(大學註解)》ㆍ《서경천설(書經淺說)》 등을 지었는데, 주희의 장구(章句)와 다른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주D-010]한집안 …… 것 :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한 말은, 집안 내에 의견이 서로 달라도 결과적으로는 집안을 위한 것이듯이 경전의 글 뜻을 다르게 보더라도 결국은 경전의 근원적 의미를 찾으려는 데로 귀결되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남계집(南溪集)》 권82 〈의정부좌의정시문효포저선생조공행장(議政府左議政諡文孝浦渚先生趙公行狀)〉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D-011]신미년 …… 회합 : 명재는 신미년(1691, 숙종17) 3월에 누나의 상을 당하여 4월에 양주(楊州)로 달려가 곡(哭)하고 그곳 석림사(石林寺)에 머물렀는데, 그때 박세당이 사서(四書)에 대한 《사변록(思辨錄)》을 가지고 와서 의의(疑義)를 논한 것을 말한다.(※명제의 누이가 서계의 형수(형: 世垕))

[주D-012]삼보결록(三輔決錄) : 한대(漢代)의 조기(趙岐)가 장안(長安)의 고적(古蹟)과 인물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 明齋遺稿(명재유고)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윤증(尹拯)의 시문집. 51권 26책(본집 46권 23책, 별집 4권 2책, 부록 1권 1책). 목활자본. 1732년(영조 8) 아들 행교(行敎)와 손자 동원(東源)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윤증: 서계 박세당의 형님인 世垕(정재공 태보泰輔의 부친)의 처남



윤증(尹拯)에 대하여

1629년(인조 7)∼1714년(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1. 가계와 사승

윤선거가 성혼(成渾)의 외손이므로 가학(家學)이 성리학이었다. 이성(尼城: 충청남도 논산군)의 유봉(酉峰)아래 살았으므로 호를 ‘유봉’이라고도 하였다.

1642년(인조 20) 14세 때 아버지 선거가 유계(兪棨)와 함께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전에 주자(朱子)에 관한 책을 김집(金集)에게 배웠는데, 김집은 송시열(宋時烈)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하였다. 당시 송시열은 회천(懷川)에 살고 있었는데, 29세 되던 해에 송시열에게 가서 사사하여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였으며,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로부터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하여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령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2. 출사거절

41세(1699)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는데,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그즈음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는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朱子가 어머니 묘소 곁에 寒泉精舍를 세우고 학자들과 담론하기도 하며, 呂東萊와 함께 《近思錄》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그를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하였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가 그를 초치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하여 올라오도록 전하였는데, 이로부터 초치가 여러 번 있어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金錫胄‧金萬基‧閔鼎重의 집안)의 문호(文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강권하지 못하였다.

3. 노론‧소론의 분열

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가탁하여 그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그가 사각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가 노론이 되고 그를 지지하는 자가 소론이 되었다.

그가 송시열을 사사할 때, 아버지 선거가 그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깨우쳐주려 하였다.

또 윤휴(尹鑴)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선거가 죽고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는데, 그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胡兵이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자기만 珍原君의 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하여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수정에 그쳤을 뿐 글자에 대해서는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지고 그는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송시열을 ‘의리쌍행 왕패병용(義利雙行 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였다.

4. 선고변무

또 그는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하였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는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집의 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을 제수하고 군신간의 상면을 촉구하였다. 사간 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5. 복작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여 다시 노론‧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하여졌다. 결국, 소론일파가 거세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되었는데, 1722년(경종 2)에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작되었다.

그뒤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지방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江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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