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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인허원(認許員) 박승석의 생애 재조명[브레이크뉴스-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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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1-16 23:16 조회4,6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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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인허원(認許員) 박승석의 생애 재조명
우두박사 박승석(1865-1937),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박관우 국제 칼럼니스트 icon_mail.gif
우리나라에 제너의 종두법(種痘法)을 최초로 보급한 인물이 송촌 지석영(1855-1935)으로 알려져 있으나 종두인허원으로서 경기도 연천에서 최초로 종두를 시술한 것을 시작으로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전해 졌다고 하는 우두박사 박승석(1865-1937)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 박승석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전에 다소 생소한 감이 있는 종두인허원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종두인허원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다면 1898년에 최초로 실시되었으며, 당시 각도의 관찰사와 종두의(種痘醫) 양성소를 수료한 종두사무위원에 의하여 임명된 우두를 전문적으로 시술한 우두의사(牛痘醫師)라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각 군에서 몇명을 임명하였으나, 나중에는 도 단위의 차원에서 임명되었다. 아울러 대한제국 말엽에는 종두인허원도 임명이 아닌 종두의(種痘醫) 양성소를 수료해야만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지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위생과에서 일종의
면허인가제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 종두인허원의 구체적인 현황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1923년 현재종두인허원이 1581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의사가 1207명으로 볼 때 인원이 의사보다 많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많았던 종두인허원의 흔적을 현재는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에서 당시 경기도 대표로 활동하였던 박승석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박승석은 조선왕조 후기인 1865년(고종 2년) 경기도 연천군
군내면 상리 방골이라는 마을 에서 출생하였는데, 원래 방골의 호칭은 밤이 많이 열린다 해서 밤골이라 불리워 졌는데, 이후에 방골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박승석이 방골에서 태어나게 된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선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데, 박승석의 조부 박제염(1800~1845)은 원래 황해도 출신이나 31세가 되는1830년(순조 30년)에 당시 방골에 거주하고 있던 일가 아저씨뻘이 되는 박하수의 양자가 되면서 방골로 이주하게 된다.
 
여기서 박제염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를 하면 그는 정조대왕이 승하한 1800년에 출생하여 46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일화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학문이 어느 정도로 뛰어났는지 상세히 알 길이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과거를 보는 친구들이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과거를 응시하려고 하였을 때는 병이 생겨서 그만 뜻을 이루지 못 하고임종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더불어 박제염이 임종하기 얼마 전에 어느 고개길에서 죽는 날짜를 미리 암시하였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그 일시가 정확히 일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몇가지 정황을 놓고 볼 때 그는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박기양이고 차남은 박윤양 이었다. 박기양(1834~1878)은 사실 특별히 알려진 행적이 없으나 한 가지 언급할 부분이 있다면 5형제를 두었다는 사실인데, 박승석은 이 중에서 삼남(三男)으로 태어나며, 사남(四男) 박승준은 당시 남계 박세채의 종손(宗孫)으로 양자(養子)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데, 박세채는 문묘에 마지막으로 배향된 인물로서 조선왕조 숙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정치가로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당쟁을 타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탕평책을 최초로 제시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수 백권의 저술을 남긴 대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승준이 박세채의 종손(宗孫)으로 養子를 갔다는 자체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집안의 배경 속에서 성장한 박승석이 같은 방골의 일가 친척에게 양자를 가게 되는 데, 사실 그 경위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며, 한마디로 그의 어린 시절은 신비의 베일에 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박승석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일이 생기니 그것은 그의 나이 49세가 되는 1913년 3월 8일
경기도대표로서 종두인허원의 면허를 취득하였다는 사실인데 이는 필자가 당시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서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종두인허원
면허취득 기록이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데, 장년기에 접어든 그가 과연 어떤 연유로 종두인허원에 뜻을 두게 된 것인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종두인허원 면허를 취득한 1913년 3월 8일은 바로 비운의 원구단이 일제에 의하여 철거가 시작되는 시기와 매우 근접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49세에 종두인허원의 면허를 취득한 박승석이 당시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시술을 하게 되며, 그의 명성은 연천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인 철원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알려 졌다고 하며, 더불어 우두박사라는 호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박승석이 임종하기 2년 전인 1935년에 71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가마를 타고 우두시술을 하였다는 점이다. 끝으로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를 시술한 우두박사 박승석은 해방을 8년 앞둔 1937년 12월 28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임종하였는데, 종두인허원으로서 활동한
관련기록이 없다는 점에 비통한 심정 금할 길이 없으며, 우두시술을 통하여 백성의 생명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그의 숭고한 의술정신(醫術精神)이 우리사회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pgu77@hanmail.net

*필자/ 박관우 국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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