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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약창공 박엽의 '복관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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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1-12 10:07 조회5,252회 댓글0건

본문

약창공이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아래에서 심하(深河=※ 강홍립의 청나라에 항복)의 역(役)에 협력하고,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 의하여 학정의 죄로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그후

숙종 33년07월06일 옥당관의 대신들이 박엽의 억울한 죽음을 진달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오명준(吳命峻)이 구임(久任)에 대한 일로 인하여 진달하기를

박엽(朴燁)이 10년 동안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있으면서 사나운 위세로 인심을 진압(鎭壓)시켰는데, 병자년의 난리(*병자호란)에 사람들이 ‘박엽이 만일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익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는 유상운(柳尙運)이 거듭 서로(西路)를 맡아 또한 남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자, 검토관(檢討官)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박엽은 잔혹(殘酷)하였으나 재주가 있었는데, 마침내 억울하게 죽었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겠지만, 민성미(閔聖微)·구봉서(具鳳瑞)는 혹은 재임(再任)하기도 하고 혹은 구임(久任)하기도 하여 지금까지 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미 강(講)을 마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태억이 죄로 죽은 사람인 박엽을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미안하다. 이제 일기(日記)를 상고하여 보았더니, 인묘(仁廟)께서 반정(反正)하시던 날 먼저 박엽 등을 베어 인심을 위로하였는데,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내기까지 하였으니, 몹시도 놀랍다.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의  복관 기록

고종 1권, 1년(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7월 11일(기유) 4번째기사 죄인 중 벼슬을 회복시켜 줄 사람의 명단을 명하다

전교하기를,

한효순(韓孝純), 홍계희(洪啓禧), 김양택(金陽澤), 김종수(金鍾秀), 김종후(金鍾厚), 심환지(沈煥之), 김달순(金達淳), 김한록(金漢祿), 정일환(鄭日煥), 김관주(金觀柱)는 모두 관작을 회복시켜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박엽(朴燁), 유효립(柳孝立), 오정창(吳挺昌), 홍양해(洪量海), 이동형(李東馨), 신의학(愼宜學) 등은 모두 죄명을 말소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전 좌의정(前左議政) 목내선(睦來善), 전 참판(前參判) 이봉징(李鳳徵), 전 좌통례(前左通禮) 서유기(徐有沂)·한후락(韓後樂) 등을 모두 탕척(蕩滌)하라.”

하였다. 특별 하교로 송환정(宋煥程), 김일주(金日柱) 등 102명을 모두 죄인에서 말소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안정 부정(安貞副正) 이균(李畇), 양평 수(楊平守) 이득경(李得慶), 창산군(昌山君) 이상(李相), 낙신 수(樂新守) 이인환(李人煥), 덕신 수(德新守) 이인혁(李人赫), 밀평군(密平君) 이집(李㙫), 밀운군(密雲君) 이훈(李壎), 여천 수(驪川守) 이경(李坰), 반양 도정(潘陽都正) 이소(李炤), 일신 도정(一新都正) 이인엽(李人燁), 호산군(壺山君) 이성(李檉),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여흥군(驪興君) 이해(李垓), 여릉군(驪陵君) 이기(李圻),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이하전(李夏銓)은 모두 관작을 회복시켜라.”

하였다.

【원본】 5책 1권 75장 B면

【영인본】 1책 158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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