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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敦寧 박태항의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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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강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12-22 19:53 조회3,604회 댓글0건

본문

본관은?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동열(東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濠)이고, 아버지는 세해(世楷)이며, 어머니는 임위(林偉)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사간원헌납(司諫院憲納)으로 있을 때에는 궁중의 절수(折受 : 공공토지를 떼어서 차지함)의 폐단과 양남(兩南 : 영남과 호남)의 급재(給災 : 재해에 따른 구제책으로서의 물자지급)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 : 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9 8/14 박태항(朴泰恒)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숙종 19 11/9 박태항(朴泰恒)을 필선(弼善)으로

숙종 20 4/03 특명으로 박태항(朴泰恒)을 보덕(輔德)으로,박태항은 상을 당하였으므로 갈렸다.

숙종 22 4/19 박태항(朴泰恒)을 문학(文學)으로,

숙종 2210/2 부제학(副提學) 조상우(趙相愚) 등이 홍문관(弘文館) 신록(新錄)을 만들었는데   박태항(朴泰恒)․조태동(趙泰東)을 뽑았다.

숙종 26 10/19 박태항(朴泰恒)을 헌납으로,

숙종 29 3/05 동래부(東萊府)에 보고하니, 부사(府使) 박태항(朴泰恒)이

숙종 30 10/13 박태항(朴泰恒)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숙종 31, 7/29 .박태항(朴泰恒)을 충청 관찰사로,

박필명(朴弼明)을 헌납으로,

숙종 32 10/30 동지 상사(冬至上使) 유득일(兪得一)․부사(副使) 박태항(朴泰恒)․가 떠났다.

숙종 33 4/24 박태항(朴泰恒)을

승지

숙종 33 8/05 박태항(朴泰恒)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숙종 34 2/25 박태항(朴泰恒)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숙종 34 5/06 박태항(朴泰恒)을 승지(承旨)로

숙종 37 4/13 박태항(朴泰恒)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슥정 38 10/26 박태항(朴泰恒)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숙보 42 4/01 형조 참의(刑曹參議) 박태항(朴泰恒)을

경종 0 7/18 박태항(朴泰恒)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경종 1 12/14 박태항(朴泰恒)․이징귀(李徵龜)를 동의금(同義禁)으로,

경종 1 12/19 박태항(朴泰恒)을 예조 참판으로

경종 2  1/28 박태항(朴泰恒)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경종 3/12 박태항(朴泰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

경종 3  11/17 박태항(朴泰恒)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경종 3 12/29 박태항(朴泰恒)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경종 4 3/08 박태항(朴泰恒)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영조 3 7/07 박태항(朴泰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영조 3 7/19 박태항(朴泰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영조 4 10/28 박태항(朴泰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영조 10 02/02 ,사직(司直) 박태항(朴泰恒)이 상소(上疏)하여 민호(民戶)의

대동법(大同法)을 행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3.금정산성

목 사적 제215호

지 정 일 1971.02.09

소 재 지 부산 금정구 금성동 일원

시 대 삼국시대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17,337m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금정산성
사적 제215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29)에 국방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금정산을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7km, 높이는 1.5~3m 이고, 면적은 약 8.2km에 이르는 국

내 산성 가운데 가장 거대한 산성이다.

이 산성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을 시켜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의 규모나 성벽 축조양식으로 볼 때 신라시대에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중성을 쌓고 장대·군기고 등의 시설을 보충하였으며 1808년(순조 8)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2년에 걸쳐 동·서·남 3문과 성곽 및 4개의 망루를 복원하였으며,1989년 북문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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