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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종중구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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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9-17 23:38 조회4,3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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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구성이야기 <박 찬웅씨에게 듣는다>

1991 8월 31일(토요일) 개임.

11시 반에 종로 3가에서 청소년지도자협회장 박승남씨(64세)를 만나기로 했는데

길이 붐벼서 여의도에서 파고다 공원까지 좌석버스로 1시간 반이 걸려 약속시간에 30분이 늦었다.

시간약속을 지키려면 좀 걷더라도 지하철을 이용해야 한다.

이번에 내가 서울체제 중 토론토에 사는 우리 반남박씨 박천봉 천호 형제의 계파를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아우인 박천복을 만나 조사해 보니 나와 같은 활당공파 임을 알았다.

그런데 박천복이 박승남을 한번 만나보라기에 오늘 그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재공박태보의 직손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반가웠다.

내가 1973년에 <노을에 지는 별>이라는 역사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박세당과 태보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소설을 쓰기위해 세당과 태보 부자의 자료를 조사하고 사적을 더듬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쓴 책에는 태보를 모신 노강서원을 노량진에서 수락산으로 옮긴 이야기도 나오는데

오늘 만난 승남씨가 노강서원을 옮긴 내력을 자세히 알고 있기에 여기에 그의 말을 간추린다.

6.25동란이 1953년에 휴전이 될 무렵, 노강서원의 고지기는 그의 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이를 맡아 왔던 김 영진이라는 자였다.

원래 노강서원에는 천평의 땅이 딸려 있었는데, 정재공의 종손이 이를 팔아먹은 것을

민대식의 집안에서 (민영휘라고 추측됨)다시 사준 것이다.

그 이유인즉 정재공이 아니었다면 숙종비인 민중전(中殿)이 복위(1694년)되지 못했고

그때 민씨 집안이 몰락했을 것이라고 하여서이다.(300년 후에 은혜를 갚았다니 의리있는 사나이다.)

그때 민씨네서 도로 사준 땅이 370평이었다.

6.25사변이 나자 김영진이 노강서원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고 폭격을 맞았다고 꾸며댔다.

승남씨가 가서 보니까 노강서원자리에 하꼬방이 17채 들어차 있었다.

노강서원에 보전돼 있었던 정재공의 영정도 어느 고마운 부인이 모시고 있다가 돌려주었다.

이 노강서원 370평의 땅은 박씨네 여섯 명의 이름으로 등기를 냈는데,

그중 생존해 있던 분이 두 분이 계셨다.

한분은 현 도유사 승서씨 부친인 승경씨 이고 한분은 목천의 승렬씨였다.

그래서 승남씨가 이 분들을 천안까지 찾아가서 위위장을 받아,

세양공파의 승호씨가 부장판사로 있을 때 측량을 다시 해서 3년을 재판하였다.

당시 종중은 무일푼으로 측량비도 없었다.

노량진 승렬씨(극장 옆에서 직조 공장을 하였다 현재 살아 있으면 80쯤 되었을 것이다.) 집에서

총회를 할 때에는 참석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얼마씩 거두었다.

그 후 종중의 경비를 위해서 승남, 남서, 승심등 열 명이 매달 2천원씩 냈다.

그 수금은 머리가 하얗게 쉰 학서 노인이 다니셨다, 지금까지 사셨으면 100세는 되셨을 것이다.

호양씨가 도유사 할 때인데 종중에 사무실도 없었다.

승하씨가 정릉 자택에 종중 서류를 갖다놓고 사무를 보고, 회의 때는 서류를 싸들고 나왔다.

승만, 승하, 호양씨가 다 다락원 서계자손 동갑내기들이다.

다락원 박씨란 수락산록의 다락원에 살고 있는 서계 박세당의 자손들을 말한다.

노량진 노강서원 대지는 지금 다락원에 살고 있는 박승호씨가 샀다.

그는 승만씨하고 가까운 사이였다. 승호씨는 그 땅을 사서 무허가 주택에 대해

하나 하나 명도 소송을 하느라고 큰 손해를 봤는데, 대종중은 그 때 들어온 돈을

재무유사 명준씨가 잘 운영하여 들어오는 이자를 가지고 다락원에 서원을 새로 짓고

그 원금과 졸헌공(야천공 4남 응복)의 위토에서 나온 돈 등으로

중곡동에 땅을 샀다가, 재미를 보아 동교동 소재 현 대종중 건물을 사서

이때부터 대종중에 기금이 생긴 것이다. <박찬웅 서울 1991年>

1991년 9월 1일(화요일)

6시에 국립의료원내의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박찬호형(1922년생. 영남대 은퇴 법학)과 그의 동생 찬억형(1926년생 나와 경기고 동기)

그리고 박광서씨(1916년생 중앙대 은퇴 법학)를 만났다.찬호 형제는 나와 16촌 종형제간이고,

박광서씨는 나의 23촌숙이 되며 일제시대 경성제대 법과 출신이다.

이번 학기에도 대학원 강좌 하나 맡아서 일주일에 한번 중앙대학에 나간다.

우리는 다 반남박씨 활당공파에 속한다.

작년에 활당공파 소종중을 만들어서 찬호형이 회장이 됐다.

활당공파에는 세 개의 파가 있어, 찬호 형이나 나는 큰 집에 속하고, 광서씨는 셋째 집에 속한다.

광서씨의 부친 박승훈(1888~1964)씨에 대해서 내가 질문을 했다.

나는 6.25동란 중 통역 장교로 남원의 백전투사령부에 근무할 당시 회의차

광주에 출장 갔다가 박승훈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때 그는 육군 대령으로 이 회의에 참가했다.

그때 부대 고문관인 Clode소령과 같이 만난 것이다.

그는 그 후 헌병 사령관도 역임했고 육군 소장으로 제대하였으며 반남박씨 대종중의 도유사도 지냈다.

박승훈은 원 고향은 장단이고, 한일합방전에 가족이 수원에 옮겨 살았는데,

어렸을 때 무단가출하여 부친의 허락도 없이 서울의 무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입학식 때 상투를 깍고, 그 깍은 채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사대부 집에서 무관의 길을 갔다고

격노한 부친 후양 옹에게 쫓겨나고는 집에서 하루도 묵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무관학교 2학년 때인 1910년 (22세)에 한일 합병이 되었다.

일본측은 무관학교 전교생을 시험을 처서 그중 47명을 뽑아

일본으로 데려다가 교육을 시켰는데 거기 박승훈도 끼어있었다.

지청천(1888~1959), 이응준(1891~1985) 홍사익등이 동기생이고, 김석원(1893~1978)은 한반 아래다.

일본은 그들을 일단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 시키고 그후 육사로 진학시켰다.

승훈은 일본 육사 24기가 된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 소좌때 대구 80연대의 부연대장이 됐는데, 술버릇이 나빠 약주만 들어가면

[독립가]를 불러 일본군에게 요주의 인물로 점 찍혀 있었다.

1935년경 중좌 당시 그는 술좌석에서 직속상관인 20사단장 판환정사랑(板桓征四郞)대장

(후에 육군대신)이 조선인을 모욕하였다는 발언을 하였다고 주먹으로 때려 난리가 났다.

그는 파면당하고 체포령이 내렸다. 중국의 지청천과 관동군 참모장인 홍사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양쪽에서 다 받아 줄 테니 오라는 기별이 왔다.

그때 (1937년)바로 지나사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국으로 못 가고 만주로 도망을 갔다.

홍사익은 그를 만주군 중령으로 특채토록 하여 목단강수군압대장을 발령했다.

얼마 후 노몽한사건(1939 5월 11일)이 일어나 일,소 충돌(전사자가 2만명)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그를 적 후방 척후장교로 보냈다. 그는 한 달 동안 적지에 들어가

척후업무를 마치고 용하게 살아 돌아왔다.

그는 그 후 만주군 의 장군까지 올랐고, 만주 신경의 6관구사령부의 참모장이 됐는데,

1945년 8.15광복 6개월 전에 다 집어 치우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광서는 부친 승훈이 대구의 80연대 부연대장이였던 관계로

일본인이 다니는 대구 중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징용을 피해 부산소재 조선 항공회사(사장 신용욱, 후에 자사의 관리부장으로 들어갔다)

거기 일본해군 앵정(櫻井)중장이 나와 있었는데 그의 주선으로 광서는 어려운 시기를 부산에서 지냈다.

1945년에 고향 수원으로 돌아온 승훈이 부산에 있는 광서에게 돌아오라고 연락을 하여,

그는 퇴직금 까지 다 타가지고 올라오니까 3개월 만에 8.15해방을 맞게 됐다.

승훈은 해방 후 다시 한국군에 대령으로 특채됐다.

1948년에 여수 14연대에서 반란(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대의 여단장겸 연대장이 바로 박승훈 이였다. 사건 당일 연대장이 죽었다고 신문에 보도되자

육군총참모총장 채병덕이 광서를 불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돈을 보내주면서 장래를 치르라고 했다.

그래서 관을 짜고 베옷 마련을 다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범석총리와 채병덕 총참모총장이

같이 광서에게 찾아와 부친이 무사하다고 알려왔다.

반도들은 경찰서장등을 죽여서 밧줄로 감아 시내를 도는 등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했다.

그래서 박승훈은 부관이 마련해준 어선을 타고 피신을 했다가 며칠 후에 돌아 왔다는 것이다.

<박찬웅 서울 1991년>


박찬웅 교수가 쓴 대종중 연혁의 머리말을 옮긴다.

박씨의 창성은 박혁거세 탄생(汎朴氏元祖. 潘南朴氏鼻祖)으로, 혁거세를 시작으로 하여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이후

신라가 멸망하면서 박씨들이 전국 각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반남박씨는 시조 호장공 박응주의 先系不知이고, 금양위 박미(朴瀰) 어른이

대종중을 구성하시고, 박세당(朴世堂), 박필성(朴弼成), 박종훈(朴宗薰), 박영효(朴泳孝),

박서양(朴叙陽), 박제승(朴齊昇) 어른이 도유사로서 종중을 이끌어 오셨고,

그리고 특히 8,15해방 및 6,25동란의 혼란한 시기에 박승훈(朴勝薰)어른이

1953년부터 1959년 까지 7년여 년 간 도유사로 있으면서,

토지개혁으로 일반 소작인에게 넘어갔던 종중의 토지를 되찾아 오는 등

종중의 기틀을 갖추는 기반을 세우신 박승훈 어른이 종중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대단했고 전설적 이였다.

박찬웅(朴贊雄)1926~2006) 서울 법대 졸업. 뉴욕대 졸업. 전 연세대 교수. 토론토 교민회장.

소설 <노을에 지는 별>외 다수. 학범(學凡) 박승빈(朴勝彬)의 손자. 유족 1자 1녀는 카나다 거주.


한우의 기억에 남은 이야기.

내가(한우) 어려서 집안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는 흐릿한 안개속의 사물과 같았는데

이 근래에 승호 증대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차츰 윤곽이 잡혀가며 사물의 형체가 잡히고

그때의 그 일들이 이해가 됨은, 철없는 10살도 안된 어린 시절의 추억이기 때문이다.

지금생각하면 귀중한 이 이야기들이,

그 때는 흘려 넘기는 예사로움에 불과하였으니

아쉽고 안타까워도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어 버림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4형제가, 6.25동란초기 석달만에 다 타계하셨으니,

모든 것이 그때부터 끝났기 때문이다.

승훈 대부 댁과 우리 집은 활당공파 셋째집으로

할아버님은 8대나 내려오는 외독자이시면서 셋째 집 소종손이셨기에

문중의 대소사를 두 분(승훈대부)이 항상 함께 하셨고

랑간재(琅杆齋)댁의 제두 어르신과는 더욱 친하셨으니, 이분들은 모두

한때(일제시대) 수원(지금의 동탄면)을 중심으로 낙향하여 살았었다

해방된 후에 아버지 3형제의 생업 터전이면서 누대의 세거지 였던,

회현동으로 돌아 오셨다가 1949년 봄에 흑석동으로 이주하셨으니

이웃하여서는 광서 대부님 집이 있었다.

우리 문중에는 두 군데의 선산이 있었다.

한 곳은 김포의 불로리에 있었고, 한 곳은 장단의 송남(지금의 판문점 근처)이다.

불로리 땅은 내가 알기도 전에 광서 대부가 처분하였고,

장단의 선대 묘소는 통일이 되기 전에는 갈 수가 없으니 어찌 찾을 수 있으랴.

지금은 다만 노성의 대우리에 있는 참판공(諱 世周 12代祖)의 묘소만 있을 뿐이다.

박승훈 어른이 종중재산을 챙기신 것은 6.25사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간 패잔병들이 빨지산이 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곳의 위수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난 후라 한다.

그때는 이미 종중의 전답이 토지 개혁에 의하여 소작인의 손에 넘어가 있었기 때문에

비상한 힘이 아니면 회복될 수 없는 시대였으나,

위수지역 헌병사령부 사령관이라는 힘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었다 한다.

내가 알기로는 종중의 위토 중 지금 대종중의 소관으로 남은 모든 위토가

그 때 승훈 어르신이 아니면 지금은 모두 낯모르는 제 3자의 손에 있을 것이다.

(반남의 위토뿐 아니라 합천과 김포는 물론 파주의 땅도 그 때 되찾은 것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달호장군 이라는 별호는 지리산 토벌전 당시 불려 진 것으로

용맹과 혁혁한 전공은 전설이 되어 지방에 설화처럼 전한다고 하나

내려가 확인하지 못함이 끝내 아쉽다.

혹시 남원지방이나, 반남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들은 그분의 명성을 아시리라.

6.25전쟁 발발 초기의 비사 중에서

국군에는 4사단이 없지만 인민군에는 4사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군 사단은 연대를 시발로 생겨났다. 1연대가 1여단이 됐다가 1사단이 되는 식이다.

(그 후 각 연대는 계속 사단이 변경돼 1사단에 꼭 1연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국군이 연대로 구성되어 있을 때인 1948년에 여순 반란사건이 터졌다.

이에 따라 군내부의 좌익세력을 색출하기위하여 대규모 숙군작업이 펼쳐졌는데,

유독 4연대(연대장은 6.25전쟁 당시 8사단장인 李 成隹 대령)에 좌익이 많았다.

여순반란 사건은 4연대 예하 대대를 모태로 창설한 14연대(연대장 朴勝薰)에서 일어난 일이였다.

<風流佳客 개인 불로그에서 전재>

1948년 미군정은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탄생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제주도에서 남로당 분자들이 총선거를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광주에 주둔한 제 4연대를 여주 신월리에 이동시켜 제주사건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제 4연대 500여명의 병력과 여수,순천 지원병 300명, 합 800명으로

14연대를 창설하여 제주반란 진압군을 만들었다.

이에 남로당 공작단이 병영에 침투하여 파병을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14연대가 박승훈(朴勝薰)으로 교체된 후,

여수항에서 제주도로 향하기로 한 1948년 10월 19일 오후 8시경,

남로당 14연대 조직책 지창수(池昌洙)상사는 세포요원 40여명으로 하여금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게 하였다. 이어 전 부대를 집합시켜,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 결사반대, 분단정권을 거부하는 궐기’를 주장하며,

반대하는 하사관 3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는 등 선동과 위협으로써 부대를 장악하였다.

영내 좌우익의 교전으로 수많은 군인이 죽었다.

당시 연대장 박승훈(朴勝薰)은 연대 부관의 긴급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다가,

이미 사태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목포로 피신하여 상부에 긴급보고하고,

진압을 요청 하였다.

반란군은 합세한 좌익세력과 함께 여수읍내로 진격하여 경찰과 시가전을 펼치며,

20일 새벽 5시경 각 관공서와 주요기관을 장악한 후, 우익인사를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애매한 경찰과 민간인을 우익으로 몰아 죽였다.

여수를 장악한 반란군은 순천으로 진격하여 순천 경찰서에서 격전을 벌였다.

빨지산 남부군과 접선이 안 된 반란군들은 4연대 진압에 의해 사살되고,

일부는 지리산으로 도주 하였다. 마침내 반란이 진압되고,

진압군은 반란군에 동조하였거나 조금이라도 협조한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 하였다.

피해는 엄청났다. 반란군이 죽인 경찰과 우익단체 민간인이 3,000여명,

진압군이 빨갱이로 인정하였거나 반란군에 동조하였다고 인정한 민간인 2,000여명이

처형되었고, 행방불명이 된 수가 3,000여명, 합 8,000여명이 희생되었다고

비공식 조사 보고된 바 있다. 아무튼 이렇게 군란의 피해는

순전히 여수 순천 사람들만의 희생과 상처로 남았다. <여수 인터넷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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