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溪輯에 실린 提拔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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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7-04 21:50 조회3,464회 댓글0건본문
南溪輯에 실린 提拔을 읽고.
요즈음 大宗中의 홈 페이지에 올라오는 論爭을 보면서 많은 思念을 갖게 된다.
아직도 높으신 분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입마저 닫아걸고, 誤謬는 是正하지 않은 채,
고쳐달라며 항변하는 자의 입마저 막으려하고,
世譜는 발행되어 가는데,
내 집의 일이 아니라고 모두 눈치만 보고 있다가,
이제 그 마저 잊고 있으니,
어찌 漢雨라고 할 말이 없으랴?
이제, 肉身에 病 깊어지니 문밖출입 어려워,
先祖님들 行狀이나 碑碣을 다시 읽어보면서,
이제 더 늦기 전에 先代의 史蹟을 찾아서 飜譯하고 정리하여 두어,
혹시라도 아들들이나 손자들이 읽어주길 바라게 된다.
사실 小宗家라고 하면서도, 6.25사변으로 집안이 철저하게 몰락하여,
아무것도 傳해 받지 못한 나의 슬픈 유산이다.
아! 컴퓨터라는 文明의 利器로, 지금 얼마나 옛 紀錄을 찾기 쉬운가?
책방이나 도서관으로 다니면서 기록을 찾으려 할 때의 어려움과 난감함을,
이제는 나의 공부가 미미함을 한탄하여야 하나니,
漢學을 공부하지 않고는 옛 기록을 찾은들 무엇 하리
읽을 수 없음을.
玉篇을 뒤지며 音은 찾을 수 있으나,
뜻은, 깊은 계곡과 같아서 쉽지가 않으니,
여기 南溪 할아버지의 提拔 原文을 실으니,
보내주신 이는 南逸 할아버지의 宗孫이신 宗緖 대부니,
젊은 분이 故人을 닮으셨고,
跋文을 쓰신 때는 顯宗 6年 乙巳(1664)년 2月 19日로,
南溪 할아버지는 34歲 되시던 해이며,
錦昌副尉 할아버지의 25歲되시던 해이니,
젊은 날의 南溪님의 氣像이 그려지는데,
이제
先祖님 들 남기신 遺勳을 잊고서
허깨비의 그림자를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 떠오르니,
아! 슬픈 죄업을 남기는 구나.
題跋.
跋活塘公所讀大學 乙巳二月十九日
世稱東方理學之倡. 蓋自麗季牧老諸公. 而圃隱爲之首.
我先祖潘南先生竝生一時. 其學相埒. 遂同掌敎泮宮. 至乙卯樹立.
且與鄭公長弟罹禍. 則其所以麗澤交輔者. 必有端緖
而今不可得聞矣. 逮我朝成中之際. 聖化休明. 學問之士. 蔚然輩出.
而寒喧爲之冠. 根深末茂. 源遠而流益盛. 及門私淑之徒. 號多巨儒.
若靜庵. 慕齊, 松堂卽其人也. 我高祖冶川先生少志于學. 師松堂. 慕.
大爲淨庵諸公所推. 後復與晦齊李文元公昵侍冑筵. 啓沃仁廟.
俾盛德日齊. 未幾被壬人安老所擠. 而淪沒嶺南.道之難行也如是.
嗚呼憘矣. 自是厥後. 余家以率禮好善. 表爲搢紳楷範.
洎其子南逸公與其適孫活塘公. 擧能繼述先志.
益以勉學篤行, 尊賢取友自厲. 孶孶講誦不已.
及乎正色立朝, 讜論直道, 俱有可著. 眞所謂不忝其先者也.
第以累經兵燹, 遺文書籍, 散亡殆盡.
近始得聞 活塘公所讀 大學一冊 獨存其舊觀.
而批閱朱墨, 手澤粲然.
世采於是俯仰摩挲, 反復嗟歎. 不勝高景之思.
若躬奉警欬於函丈之間. 則又未嘗不恨其後嗣. 罔能用力于家學也.
今同宗姪錦昌副尉泰定寔爲公曾孫, 而將後南逸公者.
間挾是書詣世采, 請問頗勤 余旣嘉其有志.
仍勉以二祖所學, 且謂是書本末.
不可以不錄, 於是乎遂言.
2011年 7月 3日 活塘公 14世後孫 漢雨 頓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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