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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와 봉황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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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6-28 09:57 조회4,830회 댓글0건

본문

올빼미와 鳳

1. 발단

박세당 74세

이경석의 손자가 세당을 찾아와서 부탁한다.

“저의 선조부터 신도비를 세우겠으니 그비문을 써 주십시오”

신도비란 이품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에 한하여 그 자손이 왕의 허락을 받고 묘소 입구의 행로에 통행인이 볼수 있도록 세우는 비이며, 그 비에 고인의 행적을 써 넣어서 길이 보존케 하는 것이다

이경석은 세당보다 34년 년장이며 인조조와 효종조에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 인데, 그의 곧고 너그러운 인품과, 그의 정치적 수단, 그리고 그의 충성심을 존경하고 있는 터이다. 그래서 그의 비문을 찬(撰)할 것을 쾌히 승낙하고 비문 중에 그 의 인품과 행적을 적어 넣었는데 여기서 이경석이 생전에 지은 『삼전도』의 『공덕비문』에 관하여, 논하고,

2. 삼전도 공덕비란 무었인가

병자호란때 청의 태종은 십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땅을 유린하여 드디어 남한상성 삼전도(송파나루터)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았는데 그후 청나라는 인조에게 삼전도에 청나라 태종의 공덕비를 세울것을 강요했다.

나라의 큰 수치요 굴욕이다. 그러나 인조는 패전 국왕으로서 이를 거절할 도리가 없다. 신하 중에서 누구인가가 이 글을 써야 했다.

인조는 처음에 장유와 조희일에게 이 글을 짓게하여, 이를 청으로 보냈던 바, 청나라에서는 글이 좋지 않다고 퇴자를 놓아 보냈다. 그래서 인조는 다시 부제학 이경석에게 이 비문을 짓게 하였다.

경석은 몇 번이고 고사 하다가 할 수 없이 이 비문을 써서 바친 것이다. 무력에 못이겨서 임금이 청나라에 신례를 취하게 된 것만도 억울한데, 청나라 황제의 송덕까지 해야 한다니 기막힌 노릇이다.

이경석은 이글을 짓고 나서 그의 형에게 자기가 글을 배운것을 후희한다고 까지 개탄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지었다고 해서 이경석을 더러운 놈이라고 나무랄수 있는 자 누구이겠는가 ? 당시 상감이 청복으로 갈아 입고 청의 태종에게 무릅을 꿇었을때, 그것을 미리 방지못한 신하들, 또 그것을 보고도, 그말을 전해듣고도, 분하고 부끄러워 자결하지 않고 이제껏 살아남은 모든 시하들은, 이미 『주욕신사지의(主辱臣死之義)』를 지키지 못한 죄인들이다. 그러한 죄인의 주제에 지금 인조의 명을 받고 이 비문을 쓴 자만 비겁하고 더러운 신하라고 누가 감히 욕할수 있단 말인가 ? 모든 선비가 그의 고통을 같이 나누고 그의 성러움을 같이 울어야할 처지가 아니겠는가 ?

3. 비문의 내용

세당은 이경석의 충성심과 그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이제와 그 송덕비의 비문 짓는 것만 거절해 봤댔다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도리어 위선이요 태만이다.

그래서 세당은 이경석의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① 이경석이 삼전도의 비문을 쓴 것은 왕명에 의한 것이요, 이로서 그가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② 일찍이 송시열은 조정에 기용시킨것은 바로 이경석이었다

③ 그런데 송시열은 이경석에게 심한 인신공격을 가했다. 이것은 이차에 걸친 예송등에서 나타난 의견차이가

주원인이겠지만 그 외의 경석의 청혼거부 문제라든지, 경석이 올린 상소문에 대한 송시열의 오해등, 사감도 개재되어 있다.

④ 특히 송시열은 영릉(효종의 무덤)에서, 경석이 삼전도의 비문을 쓴 것을 몹시 비난했다

⑤ 이런일을 당했는데도 경석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삼전도 비문을 쓴 데 대한 양심의 부끄러움을 토로했을 뿐.

시열의 인신공격에 대하여 전연 개의치 않았다.

⑥ 올빼미와 봉(鳳)과는 본디 그 종류가 다르다, 올빼미는 터무니없이 성도 잘내고 욕도 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은연중 세당은 경석과 시열의 인간성을 대조 시켯던 것이다.

4. 이경석과 송시열

이경석은 송시열보다 12세가 연장이지만 인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한 분이니, 관계에서는 시열의 대선배가 된다

더구나 시열은 경석의 어진 인품을 사모하여 표의와 짚신으로 그의 문하에 왕래하자, 경석은 시열의 재능을 인정항고 그를 조정에 천거 임관시켜서, 마침내 조정에서 같은 지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뒤에 시열이 경석에게 통혼을 청했을 때, 경석이 이를 거절한 일이 있었고, 또 사소한 오해로 경석을 미워하여 경석을 핍박하는 상소를 올린 일까지 있었다. 한때 시열은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선배와 은사인 경석을 협잡배라고 욕한 일도 있었다.

당시에 곧은 선비들은 시열이 이렇게 경석을 헐뜯는 것을 심한 잘못으로 보고, 시열의 심술이 공연히 발동하였음을 못마땅 하게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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