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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서와 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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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6-21 09:11 조회4,119회 댓글0건

본문

조지서와 허침( 허종=박억년 박조년 외숙 =스승)

왕세자가 입학할 당시에는 유명한 학자 서거정(徐居正)으로 스승을 삼았다가, 그가 늙어서돌아간 후로는 조지서(趙之瑞)와 허침(許琛)이라는 두 사람을 맞아 왕세자의 스승을 삼았다. 한사람의 동궁을 가르치기 위하여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조지서는 워낙 성질이 강강한 사람인지라 남을 용서할 줄을 몰랐다. 그의 자(字)는 백부(伯符)요 호(號)는 지족정(知足亭)이라 하였으며 성종 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어유소(魚有沼)가 만주(滿洲)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에 그의 막하(幕下)로 출정한 경력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왕세자가 장난하기만 좋아하고 공부할 생각을 갖지 않으면, 조지서는 비록 왕세자라 할지라

도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를 책망하였다.

저하(低下)는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한 동궁께서 글 읽기는 싫어하시고 장난만 좋아하시면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부디 장난을 삼가시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십시오.

조지서는 이 모양으로 번번히 왕세자를 꾸짖었다. 그러나 왕세자는 이런 조지서의 책망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부왕의 분부도 있고 해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늘 원수같이 미워하고 무서워 했다.

(이 늙은이가... 어디 두고 보자!)

왕세자는 자기를 위해 애써 주는 조지서에게 이런 앙심까지 먹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허침이라는 이는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자(字)는 헌지(獻之)라 하고 호(號)는 나헌(懦軒)이라 했다. 그때 북정원수(北征元帥)로 이름을 날리던 허종(許琮)의 아우였다. 허침은 왕세자가 장난이나하고 뜀뛰기를 좋아하며 공부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도 별로 책망하는 일 없이 방임주의(放任主義)를 썼다. 그는 다만 왕세자에게 이르기를

공부란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놀 때는 놀더라도 일단 공부를 하게 되면 그때 만은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여 별로 책망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왕세자도 그의 앞에서는 가끔 책을 읽고 혹 토론도 하는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지서 선생이 글을 가르치려고 왕세자 방으로 나가보니 왕세자가 보이지 아니하고 바람벽에 커다란 글씨로

대성인(大聖人)에 허침(許琛)이요 대소인(大小人)에 조지서(趙之瑞)라

하고 씌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필적을 보니 왕세자의 글씨가 분명했다. 조지서는 매우불유쾌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곧 사표를 쓰고 시골로 낙향(落鄕)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지금 자기가 사표를 내면 왕세자의 흠점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인즉이것은 자기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하여 곧 마음을 고쳐먹고 모든 것을 꾹 참았다. 훗일 왕세자가 임금이 되자 조지서는 자진하여 서울 같은 번화한 곳이 싫으니 지방관이나 되기를 청하여 창원군수(昌原郡守)로 취임하였다가 얼마 아니 되어 그것도 사직하고 지리산(智異山) 속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장차 어지러워지는 세상을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바로 잡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진작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조지서는 지리산으로 들어온 이후로 그 곳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지족정(知足亭)이라 정하고 날마다 산천을 즐기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니나 다르랴, 연산군 십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조지서도 극형을 당하여 시체는 강물에 띄워 버린바 되고 가산은 몰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와는 반대로 허침은 연산군이 등극한 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좌의정(左議政)까지 승진되어 무사히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후.... 윤씨가 왕비자리에서 쫓겨 난뒤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연산군 이었습니다.

임금이 된 연산군은 어머니인 윤씨를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정 중신들을 사형 시키거나 귀양보냈습니다. 이른바 갑자사화죠. 그러나 허종과 허침은 누님덕분에 화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허종이 말에서 떨어졌던 그 돌다리를 두 형제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종로구 내자동과 내수동 사이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개천을 잇는 돌다리가 종침교 였다고합니다

1) 허종이 [[성종]] 때 [[언관(言官)]]으로 있을 당시, 왕비 윤씨의 폐비 문제가 조정 논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논의를 완결짓는 날 아침, 허종은 일찍 대궐로 출근하면서 누나 집에 들렀다. 허종 누나는 경사를 섭렵해 박식했고, 특히 [[주자강목]]에 밝았다.

누나는 근심에 싸인 아우를 보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허종은 오늘 폐비 논의를 확정짓는데,언관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얘기했다. 이에 누나는 "역대 기록에 의하면 자식이 왕이 되는데 그 어미를 폐하고서 언관이 화를 당하지 않은 예가 없으니 피해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일러 주었다. 허종은 크게 깨닫고 대궐로 가다가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 기절했다. 그래서 집으로 다시 실려 왔고, 조정에서는 당일로 언관을 바꾸어 폐비를 단행했다. 뒤에 연산군 때, 당시 언관은 모두 극형을 당했는데 허종은 거기에서 빠졌다.

2) 허종 누이 허씨는 103세여서 '백세부인'이라 일컬었다.

그 아들 원(援)이 젊어서 명성이 높았으나 사람들과 잘 교유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이 그를 매일 초빙하려 했는데, 하루는 많은 문사들을 초빙해 잔치를 열면서 강력하게 원을 초청하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약속을 했다. 약속한 날 의관을 갖추고 모친에게 사정을 얘기하면서 떠나려 하니, 모친이 "나의 병을 핑계로 속히 빠져나와야 한다."고 단단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원은 가다가 중도에서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고 되돌아왔다. 안평대군 쪽에서는 사람을 보내 찾았으나 병난 사실을 알고 서운해 했다. 모친이 말하기를 "공자왕소(公子王孫)이 문객을 모아 명성을 날리면 화를 입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날 안평대군의 잔치에는 수양대군이 밀사를 파견해 비밀히 참석자 명단을 작성했다. 뒤에 계유, 병자의 정난 때 이 잔치 참가자는 모두 화를 당했지만, 허종 누이 아들 원은 무사했다.(성종)

종침교 한국일보 | 기사입력 2001-04-27 17:50

종로구 내자동 71 부근 지금의 종교교회 앞에는 조선시대 건립된 종침교(琮橋)라는 교각이 있었다.

종침교라는 명칭은 성종 때 재상인 허종(許琮)과 동생인 허침(許)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두 형제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이 다리에서 낙마해 부상했다는 핑계

를 대고 회의에 불참해뒷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후일 이 회의에서 윤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많은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죽

음을 당했다. 주민들은 이후 이 다리를 '종침교'라고 불렀으며 형의 이름만 붙여 '종교(琮橋)'라고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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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연도 : 1998년

설치장소 : 세양빌딩 앞 보도상에 설치

구 주 소 : 내자동 223

조선 성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과 허침(許琛)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연산군은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그의 어머니가 내쫓기죽게된 경위를 알게되자 그 죽음을 원통히 생각하여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와 안양군(安陽君)·봉안군(鳳安君)과 인수대비(仁粹大妃)를 죽이고그 당시 회의 참석해서 폐비를 결정했던 대신들을 찾아 죽이는 이른 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는데, 허종은 이 다리에서 떨어져 화를 면했으므로 그 뒤부터 다리 이름을 종침교라 했다고 한다.「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考)」에는 허종·허침 형제가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여 두 형제의 이름을 붙여

종침교라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양천 허씨.

상주공께서 자신의 묘택을 미리 장만하셨다.

박임종 1434--1500

허종 1434~1494

허침 1444~1505

박억년 1455~1496

박조년 1459--1500

[ 영주 서릿골 ]

홈페이지

어느 족제비의 보은이 빚은 살아있는 실화 이 이야기는 전설이기보다, 영주의 명족 반남 박씨의 동족마을 서릿골에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화이다. 연화산 북쪽 기슭, 장수면과의 경계에 자리해 있는 서릿골은 소고공 박승임( 朴承任 1517-1586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로 경상북도 영주출신. 형(珩)의 아들이인데 이마을은 박승임의 7세손 박정구(朴鼎九 1719-1798) 선비가 터전을 열어 그 자손이 세거하는 동족마을이다.

대개 족제비란 쥐나 뱀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유익한 동물이지만 어쩌다가 병아리를 훔쳐 가는 일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탐내는 가죽이나 꼬리털을 가졌다는 것이 죄아닌 죄여서, 족제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눈에 뛸세라 조심조심 숨어 살아야만 하는 짐승이다.

그러나, 여기 서릿골의 족제비만은 그렇치 않아서, 대낮에 떼를 지어 골목길에 활개를 치고 다녀도 누구 하나 집으려 하지 않는다. 옛날 이곳에서 어느 한 족제비에 얽힌 희한한 한토막 사연이 계기가 되어, 서릿골 마을은 수백년동안 족제비의 천국을 이루고 있음이다. 조선 정조 시대 진사 박문렵(朴文曄 1674-1719 반남박씨 16세손)의 둘째 아들 정구선비는 한정마을에서 서릿골에 살면서, 그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매일 같이 한정마을 큰댁 박정열(朴鼎烈 1704-1775)에를 오르내렸다.

아직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이른 봄 어느날이다. 정구선비가 그 날도 문안길로, 동구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족제비가 달려들어 선비의 도포 자락을 물고는 기를 쓰고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리라 짐작되어, 족제비가 끄는데로 따라갔더니 과연 까닭이 있었다. 끌려 가고 보니, 부근에 있는 넓은 웅덩이 둑이었는데, 물가운데, 새끼 족제비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옳거니!" 선비는 곧 옷을 걷고 물에 들어가 그것을 모두 건져내어, 옷자락으로 물끼를 말끔히 닦아주고 돌아섰다. 그런일이 있은후 몇해가 지난 뒤 어는날. 커다란 족제비 한마리가 선비의 집 툇마루에 와서 죽어 있었다. 족제비 털은 황모(黃毛)라 하여, 본래 황모무심필(無心筆)이라면, 선비의 문방에서는 귀물로 여기는 것이다. 전날 정구선비에게 새끼를 구원받은 바로 그 족제비가, 생명이 다하게 되매, 버려야 하게된 몸으로 선비의 은혜를 갚으려 함이었던 것이다 정구선비는 그 털로 붓을 만들었다. 그러고, 얼마아니하여 과거가 열리매 1798년(정조22), 그 손자 시원(時源 1764-1842)이 그 붓을 가지고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되는 영광을 차지한 바 되었으니, 실로 희한한 인연이다.

이렇게 맺어진 서릿골 반남 박씨와 족제비와의 사이는 지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릿골 수십가구는 거의 그 선비의 자손이어서, 오늘도 한결같이 족제비를 보호한다니, 진실로 훈훈함이 감도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박시원(朴時源)은 1764(영조 40)~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반남박씨의 19세손이다.. 자는 치실(穉實)이고 호는 일포(逸圃)로, 사표(師豹)의 아들이다

1798년(정조 22)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다. 천성이 진중(鎭重)하고, 마음이 진정되어 늘 평온하며,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겉으로 꾸미는 일이 없었다.그러므로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는 제명(除命)이 있으면 사양하는 관례와는 달리 즉시 명을 받들어 부임하였으며, 비록 남들이 꺼리고 싫어하는 용반산직(冗班散職)이라 할지라도 직무를 완수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룩될 때에 조용히 향리로 돌아와서 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후배들을 지도하고 가르칠 때는 항상 강학을 우선적으로 하였다. 저서로는 《일포집》 8권이 전해진다

거창신씨 할머니에 대한 전설을 써 봅니다.

서울서 대감 한분이 경상감사로 제수를 받아거창의 한적한 산골길을 가마타고 지나가고 있는데해는 저물어 가고 갑작스럽게 가마채가 부러져서 더 이상 갈수가 없기에 하는수없이그 대감은 근처 주막에서 하루밤을 자게 되었고, 자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고은 색씨 한분이 나타나서 문밖에서 큰절을 하기에

그 대감은 황당해서 큰소리로 "왜 당신이 나에게 절을 합니까" 라고 물었는데그 색씨는, “나는 당신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하고 사라지는

이상한 꿈이여서 그 이튼날 아침에 주막집 주인 할머니에게 지난밤 꿈이야기를 하니할머니가 하는 말이 "대감의 가마채가 부러진 그곳 한길이,

옛날 거창 신씨 처녀가 합천에 사는 박씨와 혼약을 맺었는데,

박씨네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져서 서울로 간후 소식이 없자

신씨 처녀는 친정에서 홀로 살다 죽었고, 그 거창 신씨 쳐녀의 친정사람들이

그 곳, 한길가에 묻었습니다"

(※ 옛날에는 처녀나 총각이 죽으면 한길 가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 대감이 어릴적을 생각하니, 자신의 이야기였기에

그래서 그근처를 정비하고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후로 그집안이 번성하고, 그의 자손들이 벼슬을 많이 했고,

그집안(※ 이곳에서는 서울 박씨라고 함)에서는

정초에 어른들에게 세배를 가면 꿈에

"거창 신씨 할머니를 보았느냐"는 덕담을 했다고 하는데

꿈에 거창 신씨할머니를 보면 벼슬을 했다고 하는 구전(口傳)을

이근처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 들은 알고,

이산을 박산(朴山) 이라고 하고, 그 명당을 고목생화(枯木生花)라고 합니다.

거창에 사는 어른 중에 나를 아는 사람은 반남박씨 집안에서 그산소를 이장한것은 참 잘못이라고 합니다.

※ 대감이라고 한분은 감정공 응천(應川) 할아버지를 말한것 같고

경상감사가 아닌고 대구부사(大丘府使; 大丘는 大邱의 옛지명으로 丘 字 는 공자

의 이름이기에 丘 -> 邱 로 바꿈)를 감정공이 지냈음

※ 글쓰는 솜씨가 없어 구전을 기억나는데 적었습니다,

2005년 12월 1일

춘당공 후 박 찬 주( 朴 贊 主)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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