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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범 할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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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6-20 22:31 조회4,3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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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凡 朴勝彬[학범박승빈] 국어학자. 법조인.사회운동가.교육자.

1880년에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1943년 10월30일 서울에서 타계함. 한말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7년에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법관으로 활약하다가,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어 국권을 잃자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법률가로서는 한국인 변호사만으로 된 경성 제2변호사회의 창립에 참여한 것과, 조선 변호사협회 대표로, 중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이 알려져 있다. 같은 기간 신생활운동에도 참여하여 啓明 구락부의 창설과 잡지 [계명](1921.5~1933.1),[신천지](1921.7~11)등을 창간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을 통해 구습타파와 신생활을 주장했으며, 강연을 통해 일종의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보성전문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서는, 당시 운영난에 봉착하였던 그 학교를 유지, 운영하는데 전력을 다 하였다. 그가 국어 연구에 뜻을 두게 된 직접적 동기는 법률가로서 법전 편찬을 기획하면서, 국어 표기법의 통일이 필요함을 절감한데 있었다고 전 한다.

그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그 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에서 [朝鮮語學]을 강의했다. 1931년 啓明구락부를 발판으로 朝鮮語學硏究會를 조직해 朝鮮語學會와(처음 朝鮮語硏究會)와 대립했다. 1943년 2월에 朝鮮語學會기관지 [한글]에 대항해 朝鮮語學硏究會기관지 [正音]을 창간하고, 朝鮮語學會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저지하기위하여 격렬한 공세를 폈다. 周時經계통의 朝鮮語學會의 會員을 흔히 {한글파}라고 부르고, 朴勝彬계통의 朝鮮語學硏究會의 會員들을 {正音派}라고 부른 것은, 이들 機關의 잡지이름에서 연유한다.

같은 해 6월 조선문기사정리조성회(朝鮮文記寫整理助成會)를 조직하여, 7월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혼신의 힘을 기울여 朝鮮語學會에 대항했다.

주위의 대세가 자신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역경 속에 있었지만, 자신의 소신을 끈질기게 주장하며 시류에 맞섰던 의지와 집념의 인간 이였다.

당시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 1931년의 朝鮮語學講義의 요지이고, 이를 보완 확대한 것이 1935년의 朝鮮語學이다. 1931년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서 격 월간지 [正音]을 발간하였는데, 1934년에서 1941년까지 그가 쓴 한글관계의 크고 작은 논설들과 함께 이 모든 노력은 朝鮮語學會와 거기에서 사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국어 표기법에 대한 그의 사고는 조선어학회에 서술된 것을 통해하여 판단할수 있거니와, 구체적으로는 1936년에 나온 조선어학회 사정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한 비판에 상세히 밝혀져 있다. 그의 생각은 역사주의와 편의주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연구이론은 복잡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일반대중의 정서법은 간편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한 민족의 언어나 표기법은 역사적 지속체여야 한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여, 複雜하며 革新的인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사회의 동조를 얻지 못한 채, 失意속에서 他界하였다.

한글 맞춤법통일안에 의해 {먹으니 먹고 와 없으니 없고}로 적는 것이, 그의 표기법으로는 {머그니 먹고 와 업스니 업고}로 적게 된다. 소리 나는 대로 적되 된소리 표기에서 {ㄲ.ㄸ 대신 ㅅㄱ. ㅅㄷ} 등 의 된시옷 표기를 사용하고, ㅎ바침을 쓰지 않으며, 복자음을 받침으로 쓰지 말자는, 그의 표기법 이론은 일종의 역사주의적 이고, 음소론적인 것으로서, 훈민정음 창제 이래 우리 민족이 사용해온 표기법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이론은, 주시경의 이론을 이어 받아 형태음론적 성격이 강한 한글맞춤법통일안과는 근본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사회에서 채택되어 널리 사용됨으로서, 그의 저항은 마침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그의 표기법 이론뿐 아니라 {먹.대신 머그} {없.대신 업스}를 용어의 어간으로 잡는 등의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는 그의 문법이론도 거의 무시되었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그의 이론에 관심을 두고,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커지고 있다.

{조선어학강의요지}(1931) {조선어학}(1935) {조선어학사정;한글맞춤법통일안에대한비판}(1936){간이조선어문법}(1937)등의 저서가 있다.




훈민정음을 지키려했던 변호사
박승빈[朴勝彬]

“동아일보에서 내 표기법을 그대로 써 주시오.”

朴勝彬이 7년 동안 지켜온 보성전문학교를, 1932년 인촌 金性洙에게 넘겨주면서 한 말이다. 김성수가 동아일보의 社主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탁한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표기법(현재의 표기법)을 만들려는 周時經 학파의 주장과, 전통을 지키려는 박승빈의 주장이 첨예하게 부디 쳤던 당시, 이 말은 박승빈에게는 절박한 부탁이었다.

박승빈은 1880년 9월 28일 강원도 철원 묘장면 대마동에서 박경양(朴景陽)의 6남매중 독자로 태어났다. 지금은 비무장 지대여서 가 볼 수는 없지만 옛날 그곳이 반남 박씨의 집성촌이었다.

그의 가문은 철원부사를 지낸 선조(先祖) 朴 炳의 墓가 있기 때문에 철원이 제 2의 고향이 된 셈이다. 그의 부친은 3000석의 재력가였으므로 그는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개화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던 1898년, 19살의 박승빈은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온다. 27세가 되던 1907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박승빈은 법관으로 활동하지만, 이내 한일병합이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한다. 나라를 잃은 설음에 가득 찬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박승빈은 변호사이자 애국 계몽운동가였다. 사재를 털어 계명구락부를 지원하고, 이곳에서 벌리는 다양한 계몽 사업에 앞장섰다. 신문에 글을 쓰고 대중 강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졌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습을 타파하고 의식과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간편한 생활을 위해 흰옷을 입지 말고 색깔이 있는 옷을 입자는 운동도 펼쳤다.

그 즈음 박승빈은 부친상을 당하지만 상복(喪服)이 흰옷이라는 이유로 상옷을 입지 않아 문중에서 지탄을 받게 되었다. 박승빈이 신생활운동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박승빈이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전신)의 제9대 교장에 취임한 것은 그의 나이 45세(1925)때다.

한창 나이에 변호사 일을 멈추고 재정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를 맡아 7년 동안 학교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박 교장의 뜨거운 정성은 학교 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세인들의 평가처럼 교육 현장에서도 박승빈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박승빈은 훈민정음을 사랑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독립된 국가를 표방하고 있던 대한제국 시절 우리말로 된 법전이 필요했다. 박승빈은 곧 우리말 법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착수했다.

그러나 이내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그것은 우리말 표기법의 문제였다. 표기법이 통일이 되어있지 않아 법전을 편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박승빈이 국어에 관심을 같게 된 이유다.

박승빈의 국어사랑은 해가 갈수록 더해갔다. 사전편찬, 표기법 논쟁, 국어문법 저술등, 그는 총 5권의 저서와 30여편의 논문을 남기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애정을 쏟았다.

박승빈은 1935년 자신의 문법관을 집대성하여 <조선어학>이라는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주시경 제자들이 만든 [조선어학회]에 맞서 [조선어학연구회]를 만들어 [조선어학회]가 주장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주시경式의 한글맞춤법의 잘못을 지적하고 {전통적 철자법으로 표기법안을 통일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 이였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관계를 가진 유물이니 그 후손은 반드시 경건의 태도로서 이에 임함이 가함이라” <조선어학>서문에 쓴 말이다. 박승빈은 언어는 민족의 유산이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언어생활은 정통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박승빈이 왜 전통적인 세종대왕식 표기법을 고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박승빈은 1941년까지 기관지 <정음>을 계속 펴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고 해방을 앞둔 1943년 10월 30일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말년에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같은 친일단체에 참여했다는 과오도 없지 않지만, 그것 보다는 변호사. 사회운동가. 국어 연구가로,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며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박승빈이 한평생 보여준, 애국 애족의 열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 강원도민일보의 서정곤 기자 작성(2010년 9월27일)

朴勝彬의 家系 = 活塘公東賢~牧使公炳~世基~泰徵~弼昌~師仁~永源~宗華~渭壽~齊浩~景陽~勝彬~定緖~贊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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