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서원 춘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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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09:14 조회1,848회 댓글0건본문


1573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창건 때 '도봉(道峯)'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69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이어 선현의 배향과 교육에 힘쓰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우(祠宇)·신문(神門)·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등이 있으며, 사우의 오른쪽에는 조광조의 위패,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도봉서원 춘향제 약300백명 참석하시다
조광조와 야천과 관계
박소(朴紹) 1493년 12월24일(성종24)--1534(중종29) 文康公
1493(성종 24)~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자는 언주(彦#20881;), 호는 야천(冶川). 이조정랑 조년(兆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때가 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을 때였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써 식견이 더욱 넓어졌으므로,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3과에 모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에 나아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하여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라.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弘文館副修撰이 되었으며 그뒤 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사인(舍人)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으며, 사간원사간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典翰 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하여
도리어 司成에 좌천되었다.
그뒤에도 여러 번 탄핵하여 그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숙종20 11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이빈(李쉀)은 자못 이름이 있어 진실로 임용(任用)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가 한중혁(韓重爀)의 옥안(獄案)에 나왔기 때문에 일찍이 군문(軍門)의 소임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신의 서종제(庶從弟) 남종만(南從萬)이 사천 현 감(泗川縣監)에 제배되었는데, 남종만도 그 옥안에 나왔으니 이빈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땅히 체직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렇게 하라.󰡓&n하였다. 또 아뢰기를,
;박소(朴紹)는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입니다.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때였는데, 김안국(金安國)이 일찍이 말하기를, 효직(孝直)은【조광조의 자이다.】높이 뛰어나고는【박소의 자이다.】 정밀(精密)하다.고 했습니다. 박소가 이언적(李彦迪)을 추천하여 함께 진출(進出)하여,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진출하려고 도모하는 것을 배척하다가, 드디어 김안로의 당들에게 공격받아 제거되어 사간(司諫)으로 집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아들 박응순(朴應順)이 국구(國舅)가 되었으므로, 은덕(恩德)을 미루어 의정(議政)으로 증직(贈職)했고,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시장(諡 狀)을 마련하여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번에 마땅히 역명(易名)하도록 윤! 허하소서.󰡓
숙종22 7/24 증 영의정(贈領議政) 박소(朴紹)에게 문강(文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에게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사상(德治思想)
도덕에 의한 교화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는 동양 정치사상
공맹학(孔孟學)의 중심사상인데, 맹자는 공자의 인(仁)에서 비롯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漢)나라 이후의 중국을 비롯하여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 각국에서 치자(治者)의 으뜸 정치사상이 되어 왔다.
덕치사상은 치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심성이 착하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이 점에서 전국시대 말기의 군권강화사상(君權强化思想)에서 나온 순자(荀子)의 성악설과는 대비가 된다. 또 이것이 덕치사상이 패권사상과 상치되는 연유이기도 하며, 동양정치사상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는 기본개념이 되고 있다.
덕치사상은 맹자의 왕도론에서 구체화되었는데, 맹자는 인간본성(성선설)에 바탕을 둔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실천하는 치자의 덕치를 주장하였다. 사욕에 의한 강권지배를 배격하며, 치자의 지위는 민심의 향배에 따르는 것이라는 민본주의적 혁명시인론(革命是認論)을 전제로 하였다. 또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일상생활을 보장해 주면서 백성을 장악하는 정전법(井田法), 신분계층적인 분업설, 유가(儒家) 본래의 이념인 예질서(禮秩序)를 유지하기 위한 효제적(孝悌的) 교육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시대가 끝난 현대에 와서도 유교권 여러 나라 사람들의 정치적 관념 속에 잠재해 있어 선거 때 입후보자의 평가나 외교문제에 대한 일반 논평 등에서 나타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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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482년 - 1519년
경력
백과사전
박소 [朴紹, 1493 ~ 1534]
본관 반남(潘南). 자 언주(彦胄). 호 야천(冶川). 시호 문강(文康).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년(중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수찬(修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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