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84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83

자유게시판

어느 종인이 받은 메시지

페이지 정보

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4-25 11:02 조회4,991회 댓글0건

본문


디지털청주문화대전 관리자 님

 

수고 많으십니다.

저희 문중 조상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심 더욱 감사드립니다.

 

반남박씨의 본관이  '나주'  '반남' 두가지를  사용하여  여러분께 혼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하고

 태장, 지희 두 부자뿐 아니라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와  친정아버지 '박응순'의 부녀간에도  나주와 반남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기록은 저희 문중에서 많이 고치고 있으나

옛날의 문서는  고치기 어려움이 있으며

저희들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문중의 관향의 변천을  간단하게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많은 참고가 되시기를 바라고

 

청주문화대전이 발전 되기를 빌겠습니다.

 

반남박씨 대종중 홈페이지 관리자  박태서 올림

  반남박씨 대종중 홈페이지 :    www.bannampark.co.kr/

 

 

 

 

 본관의 변천

박응주가 고려 고종 때 반남 호장을 지냈기에 관향(貫鄕)을 반남(潘南)으로 삼았으나

조선 태종 12년에 반남이 나주의 속현(屬縣)이 되므로

태종이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12월 13일(갑자) 3번째기사

반성군 박은의 본향을 나주로 정해 주다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박은은 본래 나주 임내(任內)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이제 예(例)에 따라 임내(任內)를 혁파(革罷)하여 나주에 합치었으므로, 이같은 명이 있었으니 박은의 청을 따름이었다. 뒤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封)하였다.

태종 12년 이후에는 관향을 나주로 삼아 지내 왔으나

230년이 지난 숙종 9년 (1683년) 제2차 세보 계해보 발간시 개칭한 이유가

“조선조에 이르러 행정구역이 나주에 병합된 관계로 나주로 칭하였으나,

나주에 속한 지명을 본관으로 삼는 박씨는

반남에 사는 박씨외 , 압해에 사는 박씨, 종의에 사는 박씨, 임성에 사는 박씨 모두가 나주 박씨라고 하면 혼동이 될 우려가 있는 고로 우리는 반남박씨라고 칭하였다.”

이후부터는 나주의 관향을 반남의 관향으로 바꾸게 되었다.

박태장은 5세 문정공 박상충의 아우 판서공 상진의 후손으로 .

박태장이 사마시에 합격한 현종 7년(1666년)은 서계공이 계해보 발간(1683년) 이전이기에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나

아들 박지희가 과거시험에 급제한 숙종 39년(1713년)은 계해보가 발간후 이기에 반남박씨로 기제된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