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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오정중수기(寄傲亭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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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3-21 18:57 조회4,4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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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오정중수기(寄傲亭重修記)

회진(會津)의 산수에서 금성(錦城)은 진(鎭)이 되고 금강(錦江)은 대(帶)가 된다. 금성산맥(錦城山脈)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오르내리면서 수십 리를 가다가 금강 가에 이르러서 신걸산(信傑山)이 된다. 금강의 원류는 노령산맥의 서석산(瑞石山)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영산(榮山)의 앞을 들러서 회진에 모이니, 상선과 어선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회진(會津)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산은 둘러싸고 물은 돌아 그 사이에 들이 펼쳐졌으니, 평탄하고 비옥하여 밭이랑이 수(繡)를 놓았다. 촌락이 즐비한데 누에치고 삼베 짜고 닭 기르고 개 우니 태평성대의 낙원과 같은 모습이 있다.

그 중에 회진의 동쪽은 더욱 좋은 터인데, 기오정(寄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는 회진의 맑은 물결을 마주하고 신걸산의 산빛을 안고 있으니, 세상을 벗어나 초연(超然)한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동추밀(同樞密)로서 참판에 추증된 박공이 선영(先塋)의 구적(舊蹟)을 생각하고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서 이곳에다 터를 잡았다. 대개 봉현(蜂峴) 독치(纛峙)의 묘소에서 며칠 정도의 거리여서 절기의 제사를 지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또한 장인이 동쪽에 기거하고 계신 곳이기도 하고, 사암(思庵) 박공(朴公)이 살던 옛 터도 주변에 인접하였으니, 바라보면서 흠모할 수도 있는 장소였다.

달이 뜨면 가야산(伽倻山)이 원근에서 공읍(拱揖)하고, 황룡천(黃龍川)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영해(瀛海)의 호수(湖水)도 때때로 밀려왔다. 이 정자 아래에서 보는 기이한 경치는 모두 이목을 즐겁게 하여 ‘인자요산(仁者樂山)과 지자요수(知者樂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정자는 모두 6칸인데, 현종 경술년(1670)에 지었다. 공은 관계에 있을 나이였지만, 시골에 은거한다는 부(賦)를 읊으면서 30년 동안 청복(淸福)을 누리고 여기서 노년을 보냈으며, 자손이 대대로 지켰다. 삼대를 지나 그 퇴락한 것을 중수해서 그 사적을 기록하였고, 이원교(李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액제(額題)도 붙였다. 세대가 멀어지면서 이를 보존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여러 후손들이 힘을 모아 완성한 것이다. 지난 경신년에는 크게 보수해서 종족이 모이는 장소로 정하였으며, 봄ㆍ가을로 여기서 화수회(花樹會)를 개최하였다. 그래서 연회를 할 때는 항상 옛 사적이 없어질까 걱정해서 정자의 동쪽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더욱 오래되어 기둥이 기울어지니 이에 중수할 것을 의논하여 9세손 승위(勝暐)가 주동이 되고, 승재(勝才)를 시켜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사비용이 천여 금이라 몇 년을 걸려서 비로소 무인년 봄에 준공하였다. 기울어진 것은 바르게 되었고, 허물어진 곳은 보수하여 옛것이 새로워졌다. 그러므로 장래에 이 정자의 수명은 금성과 신걸산처럼 오래 갈 것이고, 공의 유택(遺澤)은 영산과 회진의 흐름처럼 유구할 것이다.

정자는 오래되었지만 기문(記文)이 없기에 10세손 정서(鼎緖)가 내게 부탁하였다. 공이 살아 계실 때를 생각해서 우리 집안의 영원한 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때 경축하는 연회를 이 정자에서 개최하여 집안의 여러 어른들이 다투어서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우리 선조 만휴공(晩休公)의 말씀에 ‘복리평안(福履平安)’과 ‘선경불허(善慶不虛)’이란 말이 있다. 지금 공이 돌아가신 지가 네 갑자(甲子)가 지나 세대는 이미 멀어졌지만, 후손이 수리하고 보수하는 것은 변하지 않고, 물가의 전택(田宅)도 그대로 이며, 평천(平泉)의 화석(花石)도 예전과 같다. 공의 복이 두터움을 여기에서 볼 수 있고, 또 우리 선조의 시가 과연 맞아떨어짐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무인년(1938) 늦봄 10세손 풍서(豊緖)가 기록하다.

한구역의 넓은 별천지를 홀로 차지하였도다.

지붕을 새로 이어 지금도 구업(舊業)을 지켜가니

오래된 꽃과 나무는 봄날처럼 무성하네.

멀리서 바람 일어 우러르는 마음 일으키니

욕되게도 나 같은 사람 깨닫기 어렵도다.

이상은 오모와(娛姥窩)【휘(諱) 수원(洙源)】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다.

기오(寄傲)의 풍류(風流) 백년을 이어왔는데

수많은 후손들이 조상의 거처를 수호하였네.

아름다운 경치가 수풀과 계곡에 넓게 펼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가르침이 동네에 아직도 남아 있다네.

산 빛이 처마에 이르니 봄의 푸른빛이 떨어지고

강물 빛이 난간에 들어오니 밤의 허명(虛明)한 기운을 머금고 있도다.

새소리는 축하하고 꽃은 웃음 짓는데

우뚝한 정자는 옛 모습 그대로네.

이상은 선조 만휴공(晩休公)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다.

무인년 봄날 풍서(豊緖)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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