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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명당' (先祖 戶長公 묘역)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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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6 11:43 조회1,6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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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명당' (先祖 戶長公 묘역)에 얽힌 이야기

'潘南朴氏 光州宗報'<1985.8.15 창간호>'蜂峴滴'에서
반남박씨를 흔히 벌 명당자손이라고들 한다. 이는 우리 선조이신 호장공의 묘를 쓸 때 얽힌 일화에서 비롯된다.호장공의 자제이신 及第公(諱 宜)께서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같은 마을에 사는 지관에게 묏자리를 부탁했다. 이곳저곳을 살피던 지관은 한곳을 지정해 주고선 집으로 돌아갔다. 묏자리를 잡아주는 과정에서 지관의 태도가 미심쩍어 보이자 급제공께서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지관의 집에 몰래 들어가 동정을 살폈다. 마침 지관이 부인과 더불어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오늘 호장 댁 산소를 정해주었지만 그 자리보다는 큰 버드나무밑자리가 더 명당이었소. 그러나 그 곳은 너무 대 명당이라 천기를 누설하여 내가 해를 당할 것 같아 그만 입을 다물었소." 그러자 그의 아내가 "그렇지만 그 어른에게 우리가 입은 은혜가 어딘데 그래요, 그 명당을 잡아 주시지 그랬소." 하는 게 아닌가. 숨을 죽이며 엿듣던 급제공께서는 단숨에 뛰어가 지관이 잡아준 자리보다 10보 가량 아래인 큰 버드나무 밑자리를 잡아 표를 해두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새벽같이 인부들을 데리고 나간 급제공께서는 어젯밤에 표시해둔 대 명당이라는 그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지관이 오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니 내가 잡아준 자리가 아닌데 어인일이냐? 며 사색이 되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한참을 당황하던 지관은 "기왕 파려면 내가 집에 당도하기 전에는 더 이상 파지 말라." 며 단단히 고 타이르고는 허둥지둥 산을 내려갔다. 그러나 이미 땅을 상당히 파 들어간 상황이라 지관이 미처 집으로 몸을 피하지 못한 상황에서 땅을 팠던 곳에서 웬 왕벌들이 나와 달아나던 지관의 머리를 쏘아 즉사케 하였다.이로부터 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자리를 '벌 고개'라 부르기 시작했고 지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아름드리 바위를 가져다가 '峰峴'이라는 한자를 새겨 길가 언덕에 세웠었다. 이 ‘峰峴’ 표지 석은 수백 년 동안 우리 선조 묘역과 역사를 같이 해 왔으나 반남면 흥덕리와 신촌간의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털려 나가게 되어 많은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벌 명당자손으로서 벌과 지관에 얽힌 흔적, 곧 ‘벌 고개’ 표지 석을 당초의 모습대로 보지 못함이 참으로 한스럽다.

                         朴 喜 緖 (학교법인 숭의학원 총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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