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潘南朴氏 大宗中 都有司任 및 新刊 族譜編纂 委員長任 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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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세화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3-06 14:26 조회3,625회 댓글0건

본문

潘南朴氏 大宗中 都有司任 新刊 族譜編纂 委員長任 께

本人은 活塘公의 後孫으로, 금번 대종중의 주관 하에 새로이 펴내는 假稱 辛卯譜의 收單을 받으면서, 우리 小宗 즉 活塘公이 받아드려서는 않되는 수단이 4건이나 있기에, 小宗의 都有司와 收單委員및 大宗의 여러 責任 有司님들에게 항의하여 보았으나 받아드려지지 않고, 그 收單이 결국에는 印刷과정까지 넘어 갔다기에, 부득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 첫째 === 活塘公에게는 아들이 牧使公 한분이고, 孫子任이 네 분계시니, 그 첫째는 經歷公 世基이고, 둘째는 甑山公 世址며, 셋째는 贈 參判公 世周이며, 바로 넷째가 郡守公 世封 이신데 위로 세분은 後嗣가 있으시고, 넷째분은 後嗣가 없으신 채 400餘年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번 新譜收單에 홀연히 公의 後孫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私撰한 冊 한권을 내 밀며 “우리가 公의 後孫이니 이 收單을 받아주시오”하고 한마디 하니, 贊京 族叔께서 그 수단을 받아드려 인쇄과정으로 넘어갔다는데, 責任있는 분의 解明을 듣고 싶습니다.

公의 記錄은 庚申譜 1券 43P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그 本記를 읽으면 되니 장황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고, 그 本記는 일직이 癸亥譜 때에 쓰여 졌으니, 그 癸亥譜의 發行人인 都有司 西溪公은 公의 從弟이고, 實務를 보셨던 定齋公과 牙山公은 公의 從姪과 族姪이시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癸亥譜를 읽게 되어, 그 때까지 의문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 풀렸으니, 다름 아닌 公의 후손에는 따님이 두 분으로 기록에 나타나지만, 세 분의 配匹 중 初娶만이 一女라고 나오고 나머지 두 배필, 즉 再娶와 三娶 두 분은 无後라 하였으니, 그러면 한 분은 누구의 소생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었는데, 한 분은 側室의 所生인 庶女로 태어나서 妾으로 보냈다라고 기록되었으니, 이런 기록(즉 嫡庶)이 甲子譜부터 削除되어, 잠시 疑訝心을 가졌으나 癸亥譜를 읽고서야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收單人이 가지고 온 소위 家承譜라는것은 무엇인가? 宗親人으로서는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수단인의 집에서 만든 私撰인것입니다. 언제 그런 것을 小宗中 차원에서라도 波譜라고 編纂한 일이 있나요? 아무 宅도 그런 파보를 갖고 있지를 않으며, 또한 우리 집에도 없으니 어찌 그것을 認定할수 있겠습니까? 있는 것이기에 살펴보니, 1967년 이후 戊戌譜를 토대로 사람의 시선을 교묘하게 현혹 시키며, 鐵筆로 옮겨 적었으니, 活塘公 셋째집의 家系를 모르고는 眞僞를 가릴 수 없게 하였으니, 이는 필시 僞造 專門家의 손을 거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郡守公의 世系를 章을 달리하여 붓글씨로 적어 내려가며, 三代의 諱字에는 出生이나 墓地의 記錄도 없으니 억지로 繼代를 맞추려고, 인위적으로 꾸며 넣은 것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게끔 하였습니다.

옛 先祖任들의 記錄을 거의 400餘年이 지난 오늘 날에 飜覆하듯 無視하는 이런 收單을 어느 活塘派 後孫이 順順히 받아 드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또한 무엇을 崇祖라고 합니까.

# 두 번째와 세 번째 === 庚申譜 1券 42P은 活塘公派 셋째집의 여러 曾孫 中에 關西의 春川에 居住하던 都正公인 琅珢齋 師轍 翁의 次子인 度源에개 後嗣가 없어 기록에 없고, 다만 甲午譜 傍註에 기록하기를, [新單에 公의 有一한 嫡室 所生女는 安 稷浪에계 출가했고, 後嗣로 兄의 所生인 宗根을 取하였고, 宗根이 또 无子하여, 宗奭의 所生인 南壽를 取 하니, 그의 所生은 濟潤 云云하였는데, 南壽는 舊譜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公의 子孫이라고 證憑할수없기에 敢히 本紀에 싣지 못하고 後日에 對備하고저 기록하여 둔다.] 하였다.

琅玕齋 翁은 正祖 때 關西 지방의 큰 선비로서, 正祖의 知遇로 늙은 나이에 벼슬에 나아가 堂上官에 올랐으나, 無子하여 世襄公 宅 師禹의 子인 靜源을 取하여 後嗣를 삼았는데, 古稀를 넘기고 아들을 생산 하니 그 분이 度源이다. 그 兄弟가 無子하여 兄인 靜源은 養子를 들였으나, 아우인 度源은 無子한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甲午譜 때에 거부된 收單이 後孫까지 더 하여져서 俊緖란 사람이 자신의 收單을 審査請求를 하여 確實하다고 認證을 얻어 그 수단이 받아드려 졌고, 거기에 한 거름 더 나가 南壽의 弟에 英壽가 있어 그 後孫의 是祐라는 사람이 收單審査 請求를 하여, 그 收單도 심사에 통과되고 받아드려지니, 啞然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시우라는 사람의 호적은 원래 本貫이 密陽으로 忠南公州가 본적지로 그의 家系는 潘南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더 볼 것이 없었는데, 本貫을 고쳐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어느 宗人이 民事訴訟에 保證을 하여 本貫을 고친 후 그 收單을 받아 드렸다함에는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門中에서 몇 번 항의도 하고 그 부당성도 지적 하였지만, 小宗 收單委員의 書名도 없이 小宗 都有司인 贊京 族叔의書名뿐이고, 또 大宗의 編纂委員들 멋대로 받는 收單이, 과연 옳은 節次인지 알고 싶다. 새 수단이 오면, 수단 하고자하는 그 문중의 심사가 우선이 아닌가 하는데, 庚申譜의 記錄에 依據하여 반대를 하여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소종중 수단위원이 서명을 반대하고, 정히 그 사람들을 받고 싶다면 別譜에 올려줌이 타탕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을 내어, 본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방법을 말 하여 보았으나, 모두 거부되고 기어이 수단인의 요구대로 이루어 졌으니, 어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 네 번째 === 이 件은 내가 말하기가 조금은 망설여져 한동안 주저 하였지만, 이미 위의 세 가지 收單을 論하였으니 이것도 이야기함이 옳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적어 갑니다.

庚申譜 1券 823페이지부터 827페이지에 걸쳐 西谿公派 宗中에 岐壽의 後孫이 庚申譜의 編纂때부터 收錄되어 있는데 雨字 行列까지 7代에 걸쳐 70輿人이 登載되었음은, 贊根과 贊鎬라는 사람의 先考되는 儀緖와 禮緖가 解放되기전에 漣川의 潘南 朴氏 집성촌에 같이 살았기에 그 선계를 모름을 딱하게 여겨 西溪宅에서 入譜를 허락 하였으나, 무슨 잘못이 있는지 小宗中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罷繼 黜蹠되니, 贊京 族叔이 제안하시기를 活塘公 宅이 冶川公의 큰집으로서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으니 받아 드리자는 의논을 鐵原 宗中을 모아하고서, 收單을 받아 드린 것 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아랫사람들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렀고, 他派 宗人들께는 眞意가 제대로 傳達되지 못한 가운데, 온갖 추측성 낭설이 퍼지며,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아무리 살아 있는 宗人을 위한 것 이기는 하지만, 後孫이 없어 말 없는 先代라고 그 家系에 收單을 揷入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이 글을 大宗中의 홈 페이지에 올려야 하는가하고 여러 날을 고심 하면서 몇몇 분들의 의견도 듣고 하였던 바, 최종적으로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이번 新譜編纂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어느 派의 宗孫이 贊京氏는 잘못이 없다는 놀라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냥 넘겨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어찌 이러한 일을 범상하게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쓰게 되었고,

또한 宗緖 大父님의 간곡한 만류를 따르지 못 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두서없는 몇 자를 끝내려 합니다.

平澤 寓居에서 辛卯 驚蟄日에 愚巷 漢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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