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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경순왕릉에서 듣는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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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2-12 20:32 조회5,1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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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경순왕릉에서 듣는 역사 얘기 spc.gif 경기 이야기 spc.gif

2007/07/25 15:50

복사http://blog.naver.com/lyhlsrn/150020433976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번지에 신라 경순왕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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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244호로 지정된 경순왕릉은 민간통제선 근처에 위치하며

능역 뒤로 지뢰밭이 깔려 있어 휴전선 주변 통제지역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 지역 일원이 유명한 공비 김신조 일당이 1968년 들어왔던 고랑포 지역인

것이다.

경순왕릉은 일찍이 그 묘를 잃었고 조선 영조 연간에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장단도호부 능실조에

"신라 경순왕릉敬順王陵의 묘가 장단부의 남쪽 8리에 있다."

고 했으므로 전혀 실전된 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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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임진왜란 연간에 묘가 실전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인구가 그리 밀집한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찾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으리라 믿어진다.


삼국유사등 여러 기록애 따르면 경순왕의 일대기는 파란했다.

그러나  고려의 마지막왕 공양왕이 이성계에 의해 피살된 것에 비하면 

다행한 삶을 누렸다.

태조 이성계가 영흥의 호족 이자춘(환조)의 아들로 문화적이며 포용적 성격이

못 되었음에 비해 고려 태조 왕건은 그 성격이 관후寬厚하여 경순왕을 살려주었고

후대까지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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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경순왕을 세운 이는 견훤이었다.
927년 견훤이 서라벌에 쳐들어와 군사를 놓아 약탈하고 왕을 찾게 했더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숨어 있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왕비를 욕보이고 부하들을 시켜 왕의 비빈들을 욕보였다.

그리고는 왕의 족제인 부傅를 세워 왕을 삼으니 경순왕이다.

견훤에 의해 즉위한 것이니 경순왕의 후견은 견훤이었다. 당시 견훤이 신라를

정복하고도 자신이 직접 통치하지 않고 경순왕을 다시 세웠는지 미스테리하다.

견훤이 아직도 자신이 신라신하라는 의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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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928년 봄 3월에 태조왕건이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서라벌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그를 맞아 대궐로 들어와서 예의를 다하고

포석정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얼근해지자 경순왕은 말했다.
  “작년 쳐들어온 견훤이 불의한 짓을 마구 하여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자 좌우 사람들도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태조 왕건도 눈물을 흘렸다. 태조 왕건은 인정이 많은 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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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5년 경순왕은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바위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마의태자였다.

그러나 생각하면 대단히 현명한 행위로 사료된다. 주변에서 그를 부추겨

신라부흥을 꾀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니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했다. 후에 법수사法水寺(성주 소재)와 해인사에 있었다 전한다.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하여 범공이 구례 화엄사에 들어갔다고 오기을 많이 하고 있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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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이 항복하자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다.
경순왕이 고마워 인사하자 태조 왕건이 말하기를,
  “원컨대 왕의 종실과 결혼해서 길이 장인과 사위의 의誼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하니 경순왕이 대답했다.
  “내 백부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심덕과 용모가 아름답습니다.”
하여  태조가 그녀에게 장가드니 그녀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가 되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경순왕이 김억렴의 조카라는 점이다.

경순왕의 아버지는 효녀 지은知恩 고사로 유명한 각간 효종랑孝宗郞이다.

효종랑은 문성왕의 후손으로 서발한(舒發翰 이벌찬의 별칭) 김인경의 아들이다.

화랑의 풍월주를 역임하여 화랑의 지지를 받고 백성에게 신망이 높았지만

당시 헌강왕계와 박씨계(신덕왕계)연합세력에 의해 배제되었다.

그가 신라왕이 되었다면 신라는 쉽게 망하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효종랑은 나중 신흥대왕新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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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나타나 태조 왕건과 결혼한 신성왕후가 김씨가 아니라 이씨라는 주장이

있다.
고려말의 대학자인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신성왕후는 본래 이씨로 경주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합천)에

있을 때 태조가 (합천)고을에 갔다가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여서 이정언을 

협주군俠州君이라 한다'고 하였다.
경북대학교 문경현 학장 같이 고려사를 전공한 많은 분들은 이 김관의의 주장을

진실로 본다.
신성왕후는 나중 아들 안종을 낳는데 이 안종의 아들이 현종이며,

이후 고려왕계는 모두 현종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고려왕들은 합천이씨(이정언)의 외손들인 것이다.

 

신라의 박씨·석씨가 모두 알에서 나왔고, 김씨는 황금궤 속에 들어있었다고

전하는 바, 이 설화는 박·석·김 성씨의 출자가 다른 것임을 알려준다.

이 3성중 하나는 경주토착 길약족이며, 한 성씨는 왜인이며, 한 성씨는

예족濊族 출자이다. 이는 묘제墓制가 증명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주에만 있는

적석목곽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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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망한 뒤 나라가 없어지니 신라 유민들이 아쉬워했다.

그 유민중 한분이 아간阿干 신회神會이다. 그가 외직(外職·경남 지방의 군주 역임)

을 그만두고 고향 임관군(울산 북구)으로 돌아온 뒤 도성인 경주가 날로 황폐됨을

보고 안타까워 했다. 신회가 신라 망국을 슬퍼하여 탄식하며 노래를 지으니

서라벌가(徐伐歌)이다.
그 노래는 고려 명종때까지 전해 왔는데 이후 사라졌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경기도 연천의 경순왕릉을 찾아갔을 때 능을 지키고 있는 이를 만났으니

박동일朴東一(일명 元雨·69세)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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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옹은 고향이 경북 예천군으로 예천공항이 있는 유천면 가리인데

건설업에 종사하다 보니 고향을 떠나 연천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대한궁도협회 연천군 지부 고문, 연천향교 장의를 맡고 있고, 연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조사연구위원, 그리고 경기도 문화유산해설사를 맡아

경순왕릉을 지키고 있다.
연천사랑이 각별한 분으로서 남다른 긍지를 지닌 박동일 옹의 건승을 끝으로

비는 바이다. [끝] 

 

한토사랑님의 블로그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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