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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태보(泰輔)선조와 인현왕후(仁顯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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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2-03 04:34 조회4,424회 댓글0건

본문

태보(泰輔)는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서인(西人)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화(禍)를 당했다.

숙종이 승지를 시켜 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여 올린 소문(疏文)을 읽게 했는데 <만일 그렇지 않고∼>란 구절 밑에 이르자 숙종의 노기가 폭발하였다.

숙종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역(大逆)에 해당된다고 태보를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네가 전날부터 이미 나에게 항거하여 독을 내뿜더니 지금 또 이같이 욕을 보여 나를 배반하고 간악한 여인에게 붙었으니 네 무슨 흉심이 있어 이같이 간특한 흉역을 하느냐"고 호통 치며 물어볼 필요도 없다면서

"이 같은 독물(毒物)은 바로 머리를 베는 것이 옳다"고 참형을 명했다.

이에 여러 조신들이 원정(原情)을 듣지 않고 죽임은 법례(法例)가 아니라고 노기를 달래어 혹독한 형이 가해졌는데, 태보가 조금도 변심 없이 태연하자 화가 난 숙종은 "내가 친국(親鞠)을 하는데 아프다는 소리가 없으니 지독히 독물이다. 더욱 엄하게 매질하라"하였다.

계속된 혹형으로 태보의 살이 저며 나와 피가 흘러 얼굴에 가득하여도 오히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임금이 더욱 화가 나서 "마땅히 역률(逆律)로 다스려야겠으니 무릎을 누르는 형틀과 화형(火刑)할 기구를 대령하라"하며,

또 무슨 대꾸를 하려고 입을 열거든 몽둥이로 입을 후려치라고 명하였다.

이미 혹형이라 하여 법적으로 폐지된 무릎 누르는 형을 가하자 비명을 기대했던 숙종은 다음과 같은 태보의 발언에 안절부절 했다.

"신은 오늘날에 죽을 것을 단정하였사오나 전하의 지나치신 처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망국(亡國)의 임금을 면치 못할까 하여 통탄하고 한스럽게 여기나이다."하고 두 차례에 걸쳐 무릎을 눌러도 아프다는 소리를 내질 않았다.

화형을 쓰라는 명이 급하게 내려 나졸들이 옷으로 불을 붙이고 태보를 거꾸로 매달아 온 몸을 지져댔다. 무릎 누르는 형이나 화형을 열세 번으로 한 차례를 삼았는데,

세 차례 네 차례 씩을 지지면서 사타구니에까지 불 인두를 대라 하니 주변의 조신들이 자고로 화형은 지지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온몸을 지져서 후세에 그릇된 전례를 남길까 두렵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형벌이 계속되어도 태보는 "이제 만일 전하의 뜻에 맞도록 의(義)를 죽이고 영합한다면 신이 죽어 지하에 들어가서 형벌에 못 이겨 거짓 자복한 귀신 됨을 면치 못하여 여러 귀신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바가 될 것이오니, 어찌 영원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길을 택하리까. 신이 살아서 전하를 바른 길로 구(救)하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엔 거적도 덮지 않은 난장(亂場)이 가해지자 정강이뼈가 부서져서 골수(骨髓)가 나왔다.

극형이 끝나자 부서진 지체(肢體)를 싸맬 베를 갖고 오도록 시켰다.

이때 어찌나 싸맬 곳이 많은지 베가 모자라자 태보는 도사에게 "내 도포소매를 찢어서 싸시오"하였다. 도사가 태보의 도포소매를 찢었으나 질겨서 잘 찢기지 않자 태보는 "칼로 실밥을 뜯고 찢으면 쉽소."하니, 도사가 마음이 흔들리고 손이 떨려 찢질 못하였다.

태보는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지휘하여 싸매고는 소매 속에 있는 부채를 꺼내면서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테니 이것을 우리 집에 전해주오"하니

그 태연함에 숙종도 어이없이 지쳐 버렸다. 태보가 진도(珍島)로 귀양 가기 위해 금부(禁府)를 나오자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얼굴을 보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눈물을 흘리며 애석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목 놓아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태보는 여러 사람 가운데 그의 참상을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돌려 울고 있는 친구를 알아보고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 유배 길에 읽겠다고 책을 꾸려들고 떠나는데, 그의 아버지 세당이 "너는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조용히 죽어서 마지막을 빛나게 하라"로 하자

"어찌 아버지의 가르침을 좇지 않으오리까?"하였다.

세당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태보는 노량진을 겨우 건너 사육신(死六臣) 묘(墓) 근처에서 유명을 달리하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기사치문(己巳置聞)에는 태보의 절의(節義)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처지를 바꾸었던들 육신(六臣)이 되었으리. / 영전(靈殿)이 어찌 또 노량(露梁)의 물가런고 / 하늘도 역시 묻히기 원하는 뜻을 알아 / 짐짓 충혼으로 육신과 이웃을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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