霜露齋에 대한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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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이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1-04 14:29 조회3,723회 댓글0건본문
霜露齋
충헌공 (錦豊君, 諱 崙壽)의 4代孫 豊緖(1868-1944, 西浦공 諱 東善 12代孫)선조가 1936년에 기록한 상로재기(霜露齋記)외에 霜露齋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霜露齋란 나주(羅州) 반남(潘南)에 있는 도선산의 재각(齋閣) 또는 재실(齋室)을 말합니다..
묘(墓)옆에 제사(祭祀)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입니다.
기록이 없으니 霜露齋란 명칭의 기원과 내력은 알 수 없습니다.
1.<霜露齋記>
“學生公 師莘(南郭公 5대손, 1680-1761))이 齋舍을 세우고, 재실은 모두 네 칸인데 영조 24년 戊辰년(1748)에 지은 것이다”
“재실의 시초는 비록 스스로 조상을 위하는 일파(一派) 자손의 정성에서 나왔지만 묘가 선영 안에 있고 재실도 분암(墳庵)의 터에 자리 잡았으니 감히 선고(先考) 사당으로만 삼을 수 없어 대종(大宗)이 치재(致齋)하는 곳으로 정하여 철따라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여기에서 보살폈다.”
2.<石泉庵重建上樑文>
“先山의 齋宮이니 守護하고 祭祀하는 諸節을 모두 이 庵子에 委託하였다.“
3.<석천암(石泉菴) 사적(事蹟)>
“실화(失火)로 祭器, 여조(麗朝)로부터 전해오던 제전(祭田) 문서,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조의 비) 인의왕후(懿仁王后, 선조의 비)가 내시에게 작성하여 발급케 한 문서, 12세손 동열(東說)이 본주 수령으로 중수한 뒤에 작성한 완문 및 곡포(穀布)를 할급해 준 문건, 여러 후손들이 참배할 때의 고문(告文) 및 전곡(錢穀)을 할급한 문서 등이 소실된 것이다.“
위 1. 2. 3.을 종합해보면
1). 평도공께서 石泉庵을 창건(1406년-추정)하신 후 340여 년 동안 도선산에는 祭室이 없었습니다.
2). 霜露齋는 贊成公(諱 世楷)(1615-1698)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贊成公의 3代손 師莘 선조가 1748년에 창건하였다가 대종(大宗)이 치재(致齋)하는 곳으로 정하여 철따라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여기에서 보살폈습니다.
3). 初期 始祖 戶長公, 2세 宜, 3세 允茂, 4세 秀, 5세 尙衷 선조님의 제사는 石泉庵에 위탁하여 모셨으며, 石泉庵은 穀數, 穀布, 등 종토를 관리하고 제기 및 각종 문서들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4).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始祖 墓域내에 있는 霜露齋는 始祖의 時祭를 모시기 위해 모인 후손들의 모임장소가 되고 지방에 내려온 方伯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友誼를 다지는 장소로 또는 宴會장소로 자연스럽게 활용되면서 대종(大宗)이
치재(致齋)하는 곳으로 정하여졌습니다,
5). 지은 지 200여 년이 지나 재각은 낡아 무너지니 1959년 대종중 10代 都有司 勝薰(活塘公后,1888-1964)선조님이 재임시에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릅니다.
(위 내용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전 大宗中 副都有司 丁緖님이 昌緖님의 카페에 올리신 글(2005.6)에서 인용했습니다. 대종중에 이에 관한 근거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확인 후 이번 세보에 기록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 찬성공(贊成公)(諱 世楷)(1615-1698) 生涯
贊成公의 行狀은 후학양성과 반남 종토관리로 요약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나주 회진 지평(持平) 임위(林瑋)댁에 장가들어 처가 인근에 기오정(寄傲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후학양성과 반남 선산관리에 生을 다 하셨습니다.
父 僉樞公 濠, 祖父 南郭公 東說의 후광이 크지만 젊어서 얻은 위병으로 出仕하지 않고 贈職만 받아 左贊成에 이릅니다.
이는 3子 判敦寧(諱 泰恒)의 영향으로 추정됩니다.
丙子년(숙종22년,1696) 야천(冶川)선조님께 文康이라는 諡號를 내릴 때, 長房(집안의 年長者)으로서 왕명을 받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익수(李益壽)로부터 寄傲亭에서 받았습니다.
※ 반남 宗土 관리 및 時祭 상황
山所....祭祀....祭室....宗土....門中은 밀접한 상관관계입니다
1). 많은 후손들이 始祖 位土 마련에 힘을 보탰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기록이 없고 南郭公이 政敵을 피해 自願하여 羅州牧이 되어 祭田을 더 장만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현 반남면사무소, 반남시장 장터, 등 반남면 일대가 반남박씨 종토였습니다.
3). 정부 수립 1년 후(1949년) 시행된 農地改革法은 地主게급의 몰락과 동시에 반남 位土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소작인이 경작하는 농토’에 한하여 정부가 5년 연부보상(年賦補償)을 조건으로 소유자로부터 유상 취득하여 농민에게 분배해 주고, 농민으로부터 5년 동안에 농산물로써 정부에 연부로 상환하게 하는 이른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은 반남위토에 큰 위기였습니다.
100% 소작인이 경작하는 농토인 위토는 전부 몰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 몰수되고 현재의 위토는 당시 위토를 지키려는 종인들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위토를 보존하기 위한 종인들의 노력이 傳言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생략합니다.
4). 해방과 정부수립, 6.25등 혼란기를 거치면서 1950년대 경제적인 문제, 교통 문제 등으로 외지에서 참사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1960년대 초부터 나주종중 下有司를 보신 衡雨(89세, 전 남곽공파 도유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羅州宗中(贊成公 후손)이 주관하여 시제를 모시고 위토를 통합 관리했다.
參祀 종인은 20~25명 정도(대부분 찬성공 후손),
外地 宗人은 5명 내외.'
1965년 처음 반남 시제에 참사하신 根緖(77세, 현 남곽공파도유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참사 종인은 30~40명, 외지 종인은 10명 이내.
통일벼가 나오면서부터(1971년) 참사 종인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와 200명을 넘어서고, 금년엔 500명 정도의 종인이 참사했습니다.
5). 1970년대 후반 반남 종토 관리권을 대종중에 이양하는 과정에서 대종중과 나주종중 사이에 격론이 벌어집니다.
핵심은 찬성공의 위토 20두락과 찬성공과 찬성공의 子 參判公(諱 泰宇)의 奉祀문제인 것 같습니다.
많은 논란 끝에 기오정을 제외한 찬성공의 위토를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대종중에서 찬성공과 찬성공의 長子 참판공을 봉사하기로 합의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6). 찬성공을 奉祀하기 위해 구성된 나주 종중은 자연 소멸됩니다.
찬성공이 세운 기오정의 관리권도 함께 이양하였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종중도 종토도 없는 기오정의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霜露齋를 설명하면서 贊成公을 美化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나 霜露齋와 贊成公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 함께 설명하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見解는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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