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평위의 향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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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1-03 12:01 조회5,023회 댓글0건본문
얼마전 금평위 휘 필성(弼成) 선조의 향년(享年)에 대해 "97세다", "아니다 96세다" 라는 논쟁아닌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의 전통적 연령 계산 방식과 서구식 만(滿)연령 계산 방식이 달라서 이따금 혼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다. 우리의 전통적 연령 계산 방식은 태어난 해(年)를 1로 시작해서 해가 바뀔 때마다 1을 더해 가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 滿연령 계산 방식은 생년 뿐만 아니라 생월과 생일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식 계산 방식에 따르면 태어나자마자 1세(한살)가 되어 아예 0세라는 것이 없지만, 만연령 계산 방식으로는 첫돐이 되어야 비로소 1세가 된다. 그러다 보니 2009년 12월 30일에 태어난 아이가 현재 만연령은 1세에 불과하지만 우리식 연령으로는 3세에 든 셈이 된다.
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금평위께서는 효종 3년 임진년(1652년?)에 태어나셔서 영조 23년 정묘년(1747년) 7월 10일에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어나신 월일(月日)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만연령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에 "壽九十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 식 계산법으로 96세에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시우 종인께서 "97세"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시우 종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몇몇 자료의 실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대종중 홈페이지 인물란에 올라 있는 금평위 관련 기록을 보자.
<17세 휘 박필성(朴弼成) 1652(효종 3)~1747(영조 23). 응복--동열--호--세모--태장--필성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几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라고 되어 있고,
찬무 종인 홈페이지 인물사전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찬무 종인 홈페이지 기록이다.
<박필성(朴弼成)에 대하여
1652년(효종 3)∼1747년(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
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几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그런데 위의 기록들은 대종중이나 찬무 종인께서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기록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오면서 그 내용을 세밀하게 확인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해, 시우 종인 역시 위의 기록들을 보시고 그대로 말씀하신 것으로 판단되는 바, 금평위의 향년을 97세로 말씀하신 시우 종인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전통적 연령 계산 방식과 서구식 만(滿)연령 계산 방식이 달라서 이따금 혼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다. 우리의 전통적 연령 계산 방식은 태어난 해(年)를 1로 시작해서 해가 바뀔 때마다 1을 더해 가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 滿연령 계산 방식은 생년 뿐만 아니라 생월과 생일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식 계산 방식에 따르면 태어나자마자 1세(한살)가 되어 아예 0세라는 것이 없지만, 만연령 계산 방식으로는 첫돐이 되어야 비로소 1세가 된다. 그러다 보니 2009년 12월 30일에 태어난 아이가 현재 만연령은 1세에 불과하지만 우리식 연령으로는 3세에 든 셈이 된다.
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금평위께서는 효종 3년 임진년(1652년?)에 태어나셔서 영조 23년 정묘년(1747년) 7월 10일에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어나신 월일(月日)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만연령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에 "壽九十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 식 계산법으로 96세에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시우 종인께서 "97세"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시우 종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몇몇 자료의 실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대종중 홈페이지 인물란에 올라 있는 금평위 관련 기록을 보자.
<17세 휘 박필성(朴弼成) 1652(효종 3)~1747(영조 23). 응복--동열--호--세모--태장--필성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几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라고 되어 있고,
찬무 종인 홈페이지 인물사전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찬무 종인 홈페이지 기록이다.
<박필성(朴弼成)에 대하여
1652년(효종 3)∼1747년(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
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几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그런데 위의 기록들은 대종중이나 찬무 종인께서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기록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오면서 그 내용을 세밀하게 확인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해, 시우 종인 역시 위의 기록들을 보시고 그대로 말씀하신 것으로 판단되는 바, 금평위의 향년을 97세로 말씀하신 시우 종인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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