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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몇 가지 모호한 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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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12-31 20:10 조회3,990회 댓글0건

본문

제가 올린 글에 대해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몇 가지 모호한 점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1.
아래 파란 색 글씨 부분은 관리자님 말씀:

“선조 호장공 사적” 중에서
영조 38년 임오년(1763년)에 18세손인 도원이 본도의 안찰사로 왔을때
도원 선조님께서
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 11월 8일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셨고
영조 37년(1761) 12월 2일 대사간으로 임명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1760~1761년 사이에 상서과 망주석을 갈아 세우신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부터 제 말씀:

도원 선조께서 상석과 망주를 갈아세우신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관리자님께서 앞서 올려 놓으신 글(<선조 호장공 사적>)의 표현이 마치 도원 선조께서 분암을 두시고 그 분암의 이름을 석천암이라고 하신 것처럼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더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분암을 처음 세우신 분은 평도공이시고 그때부터 이미 석천암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리자님께서 올리신 글 속에는 마치 도원 선조께서 분암을 세우시고 석천암이라고 부르신 것처럼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올린 글을 면밀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 말씀은 상석과 망주에 관한 것이 아니고 분암을 세운 시기와 그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2.
아래 파란 색 부분은 관리자님 말씀:

반남현이 반나부리현인 자료는 있으나
반나첨리라는 자료는 못보았습니다
를 尖로 잘못 기록한것 아닌가요

지금부터 제 말씀:

그렇다면 관리자님께서 올려놓으신 자료에 "반나첨()리현"이라고 되어 있으니 "반나부(夫)리현"으로 고치시면 되겠지요. 저한테 반문(反問)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 별 의문 없이 그냥 그대로 왔다는 것입니다.


3.
아래 파란 색 부분은 관리자님 말씀:

호장에 대한 기록을 <한산이씨보>에서 가져온 배경은
호장에 대한 인식이 고려 때의 호장과 조선시대의 호장의 차이를 설명 하려다보니
요즘 같지 않아 참고할 문헌이 많지 않아,
쉽게 찾다가 보니 한산이씨보에서 인용한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부터 제 말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신보가 1980년에 간행되었으니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조금만 노력하셨더라면 참고문헌은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기록을 현재까지도 그냥 그대로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과거의 기록에 나타나는 실수, 오류, 의문 등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더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칫 우리의 종중사(宗中史) 기록(세보, 편람의 기록 포함)을 그냥 방치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끝으로 부탁 말씀 올립니다. 제가 올린 글을 다시 한 번 더 세밀히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글의 의도에 대해 오해가 없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혹 제가 주제넘었다면 너그러운 이해를 근청(謹請)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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