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마을을 아시나요?) 영상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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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을 아십니까?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경북 영주의
시골마을입니다.
최근에는 30년 전 사라진 외나무다리까지 복원했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아름다운 풍경이 남아있는 무섬마을에 다
녀왔습니다.
물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여 무섬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진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입니다.
안동 하회, 예천 회룡포처럼 낙동강 윗줄기가 휘돌아 흐
르는 물돌이 마을입니다.
태백산 물줄기인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서천이
만나 마을을 감싸 안았습니다.
두 물줄기가 만나지만 여름철 홍수 피해는 크지 않은 편
입니다.
<인터뷰> 박종우(무섬 전통마을 보존회장) : "소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일찍 흘러. 일찍 흘러간 뒤에 태백산 물이 오
는 거야. 그래서 이 두 물이 한꺼번에 오면 범람을 많이
할 텐데 이게 시차가 나. 그래서 늘 물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야."
금모래가 빛나는 백사장 한가운데에는 130미터 길이의
외나무다리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홍수에 떠내려가기 때문에 가을부터 봄까지만
설치해놓습니다.
<인터뷰> 임지은(경기도 고양시 성사동) : "멀리서 볼 때
는 그냥 작은 다리같이 보였는데, 가까이 와서 막상 걸으
니까 물이 흐르잖아요. 그러니까 다리가 흔들흔들 거리는
게 약간 무섭습니다. (외나무다리가 실제로) 흔들리지는
않아요. 그런데 밑을 보면서 걸으니까 물이 흐르니까 이
게 다리가 흔들려 보여요."
1972년 시멘트 다리가 들어서자 외나무다리는 설 자리를
잃고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30년이 지난 뒤 외나무다리
를 되살렸습니다.
17세기 중반, 조선 현종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무섬
마을.
지금도 50여 채의 집들이 대부분 옛 모습을 지키고 있습
니다.
정사각형 기둥 대신 둥그런 두리기둥을 쓰고 마루를 높인
뒤 난간을 설치해 가옥의 품격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해 옛 고택 9채는 지방 문화재로
도 지정돼 있습니다.
<인터뷰> 김한세(무섬마을 주민) : "1850년경에 이 집을
지었습니다. 이 어른이 의금부도사를 하시고 낙향하셔가
지고 이 집에서 계속 사시면서 글공부 하시고, 더 높은 벼
슬을 내리는 것도 마다하시고."
집집마다 남아있는 아궁이에는 아직도 장작불을 지필 수
있습니다.
미음(ㅁ)자 형태의 가옥 구조는 남자들이 생활하는 사랑
채와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가 서로 나뉘어 당시 양반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터뷰> 이정호(94세) : "(어르신 시집오신 다음에는 밖
에 출타는 많이 하셨어요?) 못해요. 시집오면 방에 들어
앉아 밥이나 해먹고 문밖에는 나가지도 못해. (그럼 고향
에 한 번도 안 가보셨어요?) 친정에 간혹 가봤지. (그때는
어떻게 가셨어요?) 가마 타고 갔지."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은 일부를 현대식으로 고치
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통의 멋은 잃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류인희(무섬마을 주민) : "집을 비워놓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른들 지키던 집이니까 내려와서 살아
야죠. 그래서 사는 거고, 우리는 겨울 되면 또 서울 올라
가서 겨울은 나고 내려와요."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에 옛 마을의 기품이 살아있는 곳.
해마다 가을이면 마을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적적하던 고택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실제 사람이 사는 집 마당에서 공연을 하니 우리 가락은
더 흥이 납니다.
<인터뷰> 박건서(경기도 성남시) : "(옛날에는) 저 앞 백
사장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고택 공연을 이렇게 하니까 더
더군다나 운치도 좋고,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무섬마을은 그 자체가 전통 예술의 무댑니다.
그런데 이런 마을 풍경은 1970년대 자칫 훼손될 뻔했습니다.
물길을 직선으로 만들어 마을 뒤로 빼고 지금의 강바닥과
백사장에는 농경지를 만든다는 게 당시 정부의 방침이었습니다.
기공식까지 열렸지만 주민들이 중장비 앞에 드러눕는 바
람에 공사는 취소됐습니다.
<인터뷰> 김한세(무섬마을 주민) : "물을 끊으면 마을의
혈을 끊는다고 해서 풍수지리상 끊으면 동네가 망한다 이
렇게 해서 격렬한 항의를 하고 노인들이 가서 드러눕고
그래서 (공사를) 못 했죠. 지금 보면 대단히 잘하신 거죠.
공사를 했으면 마을 앞에는 강도 없고 백사장도 없고."
1950년대 한국전쟁의 참화 역시 주민들이 힘을 합쳐 이
겨냈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서로 인정해주고 보호해주면서 마을이 상처 입는 것을 막
았습니다.
<인터뷰> 박종우(무섬 전통마을 보존회장) : "양심의 자
유를 인정을 했어. 그건 죄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생각하
는 이상사회는 이런 사회고, 내가 생각하는 사회는 이런
사회다, 이걸 인정을 했어. 절대로 고발한다든지 이래서
비명횡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 무섬 동네의 자랑이야."
이렇게 마을의 분열을 막고 옛 가치를 지킬 수 있었던 것
은 오랜 전통 덕분이었습니다.
<인터뷰> 김광호(문화해설사) : "여기는 터 자리가 옛날
아도서숙 자리였습니다. 아도서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일제시대 때 이 마을 청년들의 만남의 장소,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그걸로 활용을 하면서 여기 모여서 무지한
농민들한테 글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그
런 장소로 활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섬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 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을 어떻게 보존하
고 바깥세상에 알릴 것인가?
2005년 외나무다리를 복원하고 축제를 열기 시작한 이윱니다.
새신랑이 말을 타고 물을 건널 때 몸종은 고삐를 잡고 외
나무다리를 건넙니다.
새색시도 가마를 타고외나무다리를 건너 시집을 옵니다.
신부의 고향이 바로 이곳 무섬마을.
실제 부부인 이들은 지난해 신종플루 때문에 마을 잔치를
열지 못하자 1년을 기다린 뒤 올해 전통혼례를 올렸습니다.
<인터뷰> 안용수(신랑) : "10년 후에 제가 여기 들어오려
고요. 그래서 조금 사고를 쳐도 크게 치려고. 마을 주민
여러분께 눈도장 찍으려고 여기서 결혼식을 하려고 일부
러 결심했습니다. (여기 들어와 살 예정이세요?) 네."
백년해로한 뒤 저승에 가려면 이번에는 상여를 타고 다리
를 건넙니다.
상여꾼들이 힘이 빠질 때 외나무다리는 버팀목이 됐고 망
자도 외나무다리에 몸을 기대 쉬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우병기(이웃마을 주민) : "(해보니까 어떠세
요?) 힘들죠. 힘들어요. 한 번 벗겨 보여줄게. (많이 들어
가셨네요?) 들어간 게 아니고 이렇게 여기가 벌게진다고
하면. (많이 무거우세요?) 그렇게 무거운 건 아닌데 해보
면, 이게 한 30여 명이 힘을 같이 합쳐야 되거든요. 근데
이런 건 보면 힘을 합친다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사실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외나무다리를 오가며 일어났기
에, 주민들에게 축제는 추억 여행이기도 합니다.
여름에 물이 불어 외나무다리가 치워지면 헤엄을 쳐서 강
을 건너거나, 아니면 마을 뒤쪽으로 30리 먼 길을 돌아다
니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인터뷰> 자은 스님 : "어릴 때는 이 외나무다리가 굉장
히 좁았어요. 우리 손바닥만 한 것. 그때는 나무를 직접
베어서 도끼로 짜서 이렇게 놨거든요. 그래서 이게 굉장
히 좁아서 조금 위험하고 이랬는데 요즘은 넓어서 다니기
쉬워요. (어렸을 때 비 오면 헤엄쳐서 학교 다니시고요?)
네. 비 오면 이제 헤엄쳐서 가기도 하고 소꼬리 붙들고,
소를 타고 건너기도 하고, 아니면 소꼬리를 붙들고 따라
건너기도 하고 그렇게 했어요."
현대화와 산업화의 바람을 비켜선 탓에 마을이 쇠락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컸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지켜온 덕
분에 다시 가치를 인정받게 된 무섬마을.
보존도 개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잔잔히 일깨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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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경북 영주의
시골마을입니다.
최근에는 30년 전 사라진 외나무다리까지 복원했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아름다운 풍경이 남아있는 무섬마을에 다
녀왔습니다.
물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여 무섬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진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입니다.
안동 하회, 예천 회룡포처럼 낙동강 윗줄기가 휘돌아 흐
르는 물돌이 마을입니다.
태백산 물줄기인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서천이
만나 마을을 감싸 안았습니다.
두 물줄기가 만나지만 여름철 홍수 피해는 크지 않은 편
입니다.
<인터뷰> 박종우(무섬 전통마을 보존회장) : "소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일찍 흘러. 일찍 흘러간 뒤에 태백산 물이 오
는 거야. 그래서 이 두 물이 한꺼번에 오면 범람을 많이
할 텐데 이게 시차가 나. 그래서 늘 물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야."
금모래가 빛나는 백사장 한가운데에는 130미터 길이의
외나무다리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홍수에 떠내려가기 때문에 가을부터 봄까지만
설치해놓습니다.
<인터뷰> 임지은(경기도 고양시 성사동) : "멀리서 볼 때
는 그냥 작은 다리같이 보였는데, 가까이 와서 막상 걸으
니까 물이 흐르잖아요. 그러니까 다리가 흔들흔들 거리는
게 약간 무섭습니다. (외나무다리가 실제로) 흔들리지는
않아요. 그런데 밑을 보면서 걸으니까 물이 흐르니까 이
게 다리가 흔들려 보여요."
1972년 시멘트 다리가 들어서자 외나무다리는 설 자리를
잃고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30년이 지난 뒤 외나무다리
를 되살렸습니다.
17세기 중반, 조선 현종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무섬
마을.
지금도 50여 채의 집들이 대부분 옛 모습을 지키고 있습
니다.
정사각형 기둥 대신 둥그런 두리기둥을 쓰고 마루를 높인
뒤 난간을 설치해 가옥의 품격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해 옛 고택 9채는 지방 문화재로
도 지정돼 있습니다.
<인터뷰> 김한세(무섬마을 주민) : "1850년경에 이 집을
지었습니다. 이 어른이 의금부도사를 하시고 낙향하셔가
지고 이 집에서 계속 사시면서 글공부 하시고, 더 높은 벼
슬을 내리는 것도 마다하시고."
집집마다 남아있는 아궁이에는 아직도 장작불을 지필 수
있습니다.
미음(ㅁ)자 형태의 가옥 구조는 남자들이 생활하는 사랑
채와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가 서로 나뉘어 당시 양반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터뷰> 이정호(94세) : "(어르신 시집오신 다음에는 밖
에 출타는 많이 하셨어요?) 못해요. 시집오면 방에 들어
앉아 밥이나 해먹고 문밖에는 나가지도 못해. (그럼 고향
에 한 번도 안 가보셨어요?) 친정에 간혹 가봤지. (그때는
어떻게 가셨어요?) 가마 타고 갔지."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은 일부를 현대식으로 고치
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통의 멋은 잃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류인희(무섬마을 주민) : "집을 비워놓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른들 지키던 집이니까 내려와서 살아
야죠. 그래서 사는 거고, 우리는 겨울 되면 또 서울 올라
가서 겨울은 나고 내려와요."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에 옛 마을의 기품이 살아있는 곳.
해마다 가을이면 마을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적적하던 고택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실제 사람이 사는 집 마당에서 공연을 하니 우리 가락은
더 흥이 납니다.
<인터뷰> 박건서(경기도 성남시) : "(옛날에는) 저 앞 백
사장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고택 공연을 이렇게 하니까 더
더군다나 운치도 좋고,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무섬마을은 그 자체가 전통 예술의 무댑니다.
그런데 이런 마을 풍경은 1970년대 자칫 훼손될 뻔했습니다.
물길을 직선으로 만들어 마을 뒤로 빼고 지금의 강바닥과
백사장에는 농경지를 만든다는 게 당시 정부의 방침이었습니다.
기공식까지 열렸지만 주민들이 중장비 앞에 드러눕는 바
람에 공사는 취소됐습니다.
<인터뷰> 김한세(무섬마을 주민) : "물을 끊으면 마을의
혈을 끊는다고 해서 풍수지리상 끊으면 동네가 망한다 이
렇게 해서 격렬한 항의를 하고 노인들이 가서 드러눕고
그래서 (공사를) 못 했죠. 지금 보면 대단히 잘하신 거죠.
공사를 했으면 마을 앞에는 강도 없고 백사장도 없고."
1950년대 한국전쟁의 참화 역시 주민들이 힘을 합쳐 이
겨냈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서로 인정해주고 보호해주면서 마을이 상처 입는 것을 막
았습니다.
<인터뷰> 박종우(무섬 전통마을 보존회장) : "양심의 자
유를 인정을 했어. 그건 죄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생각하
는 이상사회는 이런 사회고, 내가 생각하는 사회는 이런
사회다, 이걸 인정을 했어. 절대로 고발한다든지 이래서
비명횡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 무섬 동네의 자랑이야."
이렇게 마을의 분열을 막고 옛 가치를 지킬 수 있었던 것
은 오랜 전통 덕분이었습니다.
<인터뷰> 김광호(문화해설사) : "여기는 터 자리가 옛날
아도서숙 자리였습니다. 아도서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일제시대 때 이 마을 청년들의 만남의 장소,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그걸로 활용을 하면서 여기 모여서 무지한
농민들한테 글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그
런 장소로 활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섬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 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을 어떻게 보존하
고 바깥세상에 알릴 것인가?
2005년 외나무다리를 복원하고 축제를 열기 시작한 이윱니다.
새신랑이 말을 타고 물을 건널 때 몸종은 고삐를 잡고 외
나무다리를 건넙니다.
새색시도 가마를 타고외나무다리를 건너 시집을 옵니다.
신부의 고향이 바로 이곳 무섬마을.
실제 부부인 이들은 지난해 신종플루 때문에 마을 잔치를
열지 못하자 1년을 기다린 뒤 올해 전통혼례를 올렸습니다.
<인터뷰> 안용수(신랑) : "10년 후에 제가 여기 들어오려
고요. 그래서 조금 사고를 쳐도 크게 치려고. 마을 주민
여러분께 눈도장 찍으려고 여기서 결혼식을 하려고 일부
러 결심했습니다. (여기 들어와 살 예정이세요?) 네."
백년해로한 뒤 저승에 가려면 이번에는 상여를 타고 다리
를 건넙니다.
상여꾼들이 힘이 빠질 때 외나무다리는 버팀목이 됐고 망
자도 외나무다리에 몸을 기대 쉬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우병기(이웃마을 주민) : "(해보니까 어떠세
요?) 힘들죠. 힘들어요. 한 번 벗겨 보여줄게. (많이 들어
가셨네요?) 들어간 게 아니고 이렇게 여기가 벌게진다고
하면. (많이 무거우세요?) 그렇게 무거운 건 아닌데 해보
면, 이게 한 30여 명이 힘을 같이 합쳐야 되거든요. 근데
이런 건 보면 힘을 합친다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사실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외나무다리를 오가며 일어났기
에, 주민들에게 축제는 추억 여행이기도 합니다.
여름에 물이 불어 외나무다리가 치워지면 헤엄을 쳐서 강
을 건너거나, 아니면 마을 뒤쪽으로 30리 먼 길을 돌아다
니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인터뷰> 자은 스님 : "어릴 때는 이 외나무다리가 굉장
히 좁았어요. 우리 손바닥만 한 것. 그때는 나무를 직접
베어서 도끼로 짜서 이렇게 놨거든요. 그래서 이게 굉장
히 좁아서 조금 위험하고 이랬는데 요즘은 넓어서 다니기
쉬워요. (어렸을 때 비 오면 헤엄쳐서 학교 다니시고요?)
네. 비 오면 이제 헤엄쳐서 가기도 하고 소꼬리 붙들고,
소를 타고 건너기도 하고, 아니면 소꼬리를 붙들고 따라
건너기도 하고 그렇게 했어요."
현대화와 산업화의 바람을 비켜선 탓에 마을이 쇠락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컸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지켜온 덕
분에 다시 가치를 인정받게 된 무섬마을.
보존도 개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잔잔히 일깨우고 있습니다.
입력시간 2010.10.18 (07:33) 박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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