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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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9-23 23:32 조회4,125회 댓글0건본문
秋夕한가위 대보름 明節 有來는
경향신문 1981년9월12일 여류소설가 박기원(朴基媛)과 언론인 조풍연(趙豊衍)이가 秋夕날 대담한 중에서..........
朴:趙先生任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고유명절인 秋夕날이고해서 옛날의 秋夕이야기를 듣고싶어서 모셨습니다. 고속시대의 바쁜 생활이기는 하겠지만 해마다 우리전통명절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갑습니다. 한가위秋夕유래는 언제부터라고 할까요?
趙:한가위유래는 서기30-40년경 신라(新羅)三代 유리왕(儒理王)시대(時代)부터라고 하니까. 거의 2千年의 역사(歷史)를 갔고 있습니다. 당시 王이 전국민의 축제행사 하나로 부녀자가 길쌈을 하는 대회를 연 것입니다. 음력(陰曆)八月대보름을 한달앞두고 國土를 둘로 나누어서 각 편의 대장을 공주로 정해 한달동안 길쌈짜기 경쟁을 벌안 것입니다.
각 팀에 부녀자들은 한달동안 거의 다른일을 하지않고 밤낮으로 길쌈짜는 일에 매달려 한달동안 의류를 장만했다고 합니다. 八月대보름날아침 王이 직접 양팀이 짜낸 길쌈을 심사했다. 이때 진팀은 이긴팀에게 하루동안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잇어요.
재미있는 것은 길쌈대회기간동안 남자들은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렸다는 것입니다. 패배한팀에는 애절한 사연도 많았는데 그 중 집안이 가난해 승리한 팀에게 식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함을 안타갑게 여겨 하소연하는 회소곡(會篠曲)이라는 애절한 노래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기도 하죠.
朴:일종의 국가적인 카니벌행사 같은 것 같군요. 그런데 이秋夕의 유래를 일종에 살펴보면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고 생산과 직결되는 근로행위를 연결 식킨점이 특색이 있는 것 갔습니다.
趙:秋夕명절은 단순한 축제행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농업시대에 일종의 공업생산 행위를 경기종목으로 채택한 것이 특색입니다. 특히 여자를 국가적인 축제행사에 주인으로 추대했다는 점은 세계역사상 드물 것입니다. 생산능률을 높이고 함께 여흥까지 즐길수 있도록 마련한 축제라고 할수있지요. 선조들의 현명한 사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朴: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당시 대보름날밤에는 望月이래서 남녀가 손에손을 잡고 望月놀이하는 독특한 유희를 즐겼다고 하던데 당시 놀이는 어떤 것일가요.?
趙: 望月놀란 것은 오늘날의 강강수월래와 비슷한 놀이지요. 젊은 남녀가 좌우로 나란히 서서 서로 손을 잡고 노래를 합창하면서 춤을추는 놀이 이날놀이는 젊은 남녀가 배우자를 고르는 일종의 상회(相會)카니벌이라고 나 할까요.?
아마도 당시에는 남녀관계가 상당히 개방된 대회를 열어 즐긴것 갔습니다.
朴:그려면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秋夕은 어느시대부터 변형된 것일까요?
趙:정확한 年代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아요. 조선시대 와서 일년동안에의 수확을 조상님에게 감사하는 날을 八月대보름으로 맞춘 것 같아요. 秋夕이 국가적인 명절로 된 것은 얼마 되지않습니다. 이날을 즐기는 것은 지방마다 달라 북쪽은 거의 秋夕을 명절로 치지 않아요.
朴: 벼 수확기가 지방마다 달라 秋夕명절도 지역적으로 시기가 다르다고 배운적이 잇습니다. 남한지역은 음력(陰曆)八月보름을 秋夕날로 잡고 잇지만 북한지역은 十月에 秋夕을 지낸다고 하더군요.
趙;북한 사람들은 추석날보다는 단오절을 더 중요하게 명절을 친다고 합니다. 북쪽은 산악지역이라 조상에게 감사할 수확이 많이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쪽도 지역마다 추석차래를 지내는 방법이 지방마다 다르지요. "에를 들어 전남무안(全南務安)지방의 경우
秋夕날 큰방을 골라 차래를지내는 방으로 정하고 이방에서만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慶尙道지방은 지방(신주모시는위패)없이 차래만 지내는 특색이 있고 북한의 강계(江界)
같은 지역에서는 20-30가구가 모여서 집단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趙:사실 서울도 옛날에는 秋夕을 그렿게 큰 명절로 치지 않았습니다. 옛날 서울사람들은 대부분 농촌에 소작을 준 부재지주였기 때문에 가을 수확이 서울까지 전달되자면 남쪽지방보다 한 두달은 늦어지고 농사를 짖지않은 사람들이 조상에게 수확에 대한 감사제를 올린다는 것은 부재지주였기 때문에 좀 어색했겠지요, 추석명절이 국가적인 명절로 된 것은 6,25사변 이후라고 할수 있습니다. 6,25당시 남쪽으로 피난간 사람이 서울사람들이라 그곳에서 화려한 추석명절을 보고 배웠으며. 많은 남쪽사람들이 서울로 유입되면서 서울사람들이 그들의 관습에 동화되었다고나 할 수 있습니다. 壹千萬以上의 서울시민중 순수한 서울사람은 28만내지30만에 불과한데 남쪽지방 관습에 자연 동화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지금은 추석이 대명절로 부상하여 고향가는 길이 막히고 선물꾸려미를들고 고향가는 年禮 行事가 되어서 八月보름이 이제는 국가적인 대명절이 되었지요.
朴: 지금까지 전해저 내려오는 추석놀이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趙: 놀이도 지방에 따라 다르더군요. 얼마전 京畿道 이천(利川)지방에서 직접 노는 것을 본것 인데 거북놀이라는 재미있는 놀이는 수숫대로 거북이 모양을 만든 탈을 쓰고 집집마다 돌면서 飮食을 어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놀이였습니다.
진주(晋州)지방에서는 소싸움이 떠들석하게 벌어지면서 놀고 북쪽에서는 닭싸움이 성행 합니다.
경향신문 1981년9월12일 여류소설가 박기원(朴基媛)과 언론인 조풍연(趙豊衍)이가 秋夕날 대담한 중에서..........
朴:趙先生任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고유명절인 秋夕날이고해서 옛날의 秋夕이야기를 듣고싶어서 모셨습니다. 고속시대의 바쁜 생활이기는 하겠지만 해마다 우리전통명절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갑습니다. 한가위秋夕유래는 언제부터라고 할까요?
趙:한가위유래는 서기30-40년경 신라(新羅)三代 유리왕(儒理王)시대(時代)부터라고 하니까. 거의 2千年의 역사(歷史)를 갔고 있습니다. 당시 王이 전국민의 축제행사 하나로 부녀자가 길쌈을 하는 대회를 연 것입니다. 음력(陰曆)八月대보름을 한달앞두고 國土를 둘로 나누어서 각 편의 대장을 공주로 정해 한달동안 길쌈짜기 경쟁을 벌안 것입니다.
각 팀에 부녀자들은 한달동안 거의 다른일을 하지않고 밤낮으로 길쌈짜는 일에 매달려 한달동안 의류를 장만했다고 합니다. 八月대보름날아침 王이 직접 양팀이 짜낸 길쌈을 심사했다. 이때 진팀은 이긴팀에게 하루동안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잇어요.
재미있는 것은 길쌈대회기간동안 남자들은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렸다는 것입니다. 패배한팀에는 애절한 사연도 많았는데 그 중 집안이 가난해 승리한 팀에게 식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함을 안타갑게 여겨 하소연하는 회소곡(會篠曲)이라는 애절한 노래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기도 하죠.
朴:일종의 국가적인 카니벌행사 같은 것 같군요. 그런데 이秋夕의 유래를 일종에 살펴보면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고 생산과 직결되는 근로행위를 연결 식킨점이 특색이 있는 것 갔습니다.
趙:秋夕명절은 단순한 축제행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농업시대에 일종의 공업생산 행위를 경기종목으로 채택한 것이 특색입니다. 특히 여자를 국가적인 축제행사에 주인으로 추대했다는 점은 세계역사상 드물 것입니다. 생산능률을 높이고 함께 여흥까지 즐길수 있도록 마련한 축제라고 할수있지요. 선조들의 현명한 사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朴: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당시 대보름날밤에는 望月이래서 남녀가 손에손을 잡고 望月놀이하는 독특한 유희를 즐겼다고 하던데 당시 놀이는 어떤 것일가요.?
趙: 望月놀란 것은 오늘날의 강강수월래와 비슷한 놀이지요. 젊은 남녀가 좌우로 나란히 서서 서로 손을 잡고 노래를 합창하면서 춤을추는 놀이 이날놀이는 젊은 남녀가 배우자를 고르는 일종의 상회(相會)카니벌이라고 나 할까요.?
아마도 당시에는 남녀관계가 상당히 개방된 대회를 열어 즐긴것 갔습니다.
朴:그려면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秋夕은 어느시대부터 변형된 것일까요?
趙:정확한 年代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아요. 조선시대 와서 일년동안에의 수확을 조상님에게 감사하는 날을 八月대보름으로 맞춘 것 같아요. 秋夕이 국가적인 명절로 된 것은 얼마 되지않습니다. 이날을 즐기는 것은 지방마다 달라 북쪽은 거의 秋夕을 명절로 치지 않아요.
朴: 벼 수확기가 지방마다 달라 秋夕명절도 지역적으로 시기가 다르다고 배운적이 잇습니다. 남한지역은 음력(陰曆)八月보름을 秋夕날로 잡고 잇지만 북한지역은 十月에 秋夕을 지낸다고 하더군요.
趙;북한 사람들은 추석날보다는 단오절을 더 중요하게 명절을 친다고 합니다. 북쪽은 산악지역이라 조상에게 감사할 수확이 많이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쪽도 지역마다 추석차래를 지내는 방법이 지방마다 다르지요. "에를 들어 전남무안(全南務安)지방의 경우
秋夕날 큰방을 골라 차래를지내는 방으로 정하고 이방에서만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慶尙道지방은 지방(신주모시는위패)없이 차래만 지내는 특색이 있고 북한의 강계(江界)
같은 지역에서는 20-30가구가 모여서 집단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趙:사실 서울도 옛날에는 秋夕을 그렿게 큰 명절로 치지 않았습니다. 옛날 서울사람들은 대부분 농촌에 소작을 준 부재지주였기 때문에 가을 수확이 서울까지 전달되자면 남쪽지방보다 한 두달은 늦어지고 농사를 짖지않은 사람들이 조상에게 수확에 대한 감사제를 올린다는 것은 부재지주였기 때문에 좀 어색했겠지요, 추석명절이 국가적인 명절로 된 것은 6,25사변 이후라고 할수 있습니다. 6,25당시 남쪽으로 피난간 사람이 서울사람들이라 그곳에서 화려한 추석명절을 보고 배웠으며. 많은 남쪽사람들이 서울로 유입되면서 서울사람들이 그들의 관습에 동화되었다고나 할 수 있습니다. 壹千萬以上의 서울시민중 순수한 서울사람은 28만내지30만에 불과한데 남쪽지방 관습에 자연 동화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지금은 추석이 대명절로 부상하여 고향가는 길이 막히고 선물꾸려미를들고 고향가는 年禮 行事가 되어서 八月보름이 이제는 국가적인 대명절이 되었지요.
朴: 지금까지 전해저 내려오는 추석놀이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趙: 놀이도 지방에 따라 다르더군요. 얼마전 京畿道 이천(利川)지방에서 직접 노는 것을 본것 인데 거북놀이라는 재미있는 놀이는 수숫대로 거북이 모양을 만든 탈을 쓰고 집집마다 돌면서 飮食을 어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놀이였습니다.
진주(晋州)지방에서는 소싸움이 떠들석하게 벌어지면서 놀고 북쪽에서는 닭싸움이 성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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