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옹주 ․ 금성위 박명원 묘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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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9-13 13:13 조회6,029회 댓글0건본문
<전면 양기>
有明朝鮮王女和平翁主
之墓
錦城尉諡忠僖朴公明源
【번역문】
유명조선국 왕녀 화평옹주와 금성위 시(諡) 충희 박공 명원의 묘
<후면 음기>
御製御筆
我女和平翁主卽第三女而暎嬪李氏長女也卽祿三年丁未四月二十七日生於昌慶宮集福」
軒而卽祿二十四年戊辰六月二十四日卒于北部順化坊濟生洞本第享年二十二歲嗚呼忍」
錄仝年八月二日葬于坡州馬山壬坐丙向原辛亥封爵戊午下嫁錦城尉朴明源卽錦陽尉朴瀰」
五代孫參判師正四子也乙巳十月二十四日生其十二代祖卽開國功臣六代祖錦溪君」
東亮卽扈 聖功臣代代簪纓喬木也臣錦城初封順義階其年又加資義卽親授也其後奉憲」
通憲明德皆親授也辛未加靖德其年又加成祿壬申加綏祿庚戌三月二十五日卒享年六十」
六世仝年五月十六日葬于同乘繼子相喆卽錦城伯兄興源第三子也特命立後而宅乘且買」
與者相喆娶金簡行女繼子紭壽卽相喆伯兄宗德第二子也賜名定後而紭壽娶李海重女有」
一男二女子齊一娶兪民柱女女李羲先洪正圭噫自初允請必也親書而旣書前面宜書後面」
飮涕相自寫于支月日後當塡書與嗚呼日後何復餘憾焉」
【번역문】
왕이 직접 짓고 직접 씀
왕의 딸 화평옹주는 선왕 영조의 셋째 딸로 영빈이씨의 장녀이다. 정미년(영조 3년, 1727) 4월 27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나 무진년(영조 24년, 1748) 북부 순화방 제생동 자기 집에서 향년 22세로 죽었다. 아아! 생전에 그 모습 떠올리니 차마 기록할 수가 없구나! 세상을 떠난 그 해 8월 2일 파주 마산의 임좌 병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신해년(영조 7, 1731) 옹주로 봉작되고 무오년(영조 14, 1736) 금성위 박명원에게 시집가니, 그는 금양위 박미(朴瀰)의 5대손이 되며 참판 사정(師正)의 넷째 아들로 을사년(영조 원년, 1725) 10월 24일에 태어났다. 그의 12대조는 개국공신이며 6대조 금계군 동량(東亮)은 호성공신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여러 대에 배출한 명문가이다.
금성위 박명원은 옹주와 결혼하여 처음에 종실 부마 종2품 하계의 벼슬인 순의대부에 봉해졌고 그 해 또 자의대부 오르니 영조께서 친히 내리신 것이다. 그 후 봉헌대부 ․ 통헌대부 ․ 명덕대부의 품계로 올랐고, 신미년(영조 27, 1751년) 정덕대부가 되고 또 그 해에 성록대부를 거쳐 임신년(영조 28, 1752) 수록대부에 올랐다. 경술년(정조 14, 1790) 3월 25일 죽으니 향년 66세였고 그해 5월 16일 옹주와 합장하였다.
자식이 없어 상철(相喆)을 계자로 삼으니 그의 맏형인 흥원(興源)의 셋째 아들이다. 이는 후사를 잇고 제사를 받들라는 나의 특명 때문이다. 상철은 김간행(金簡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어 횡수(紭壽)를 양자로 하니, 상철의 맏형 종덕(宗德)의 둘째 아들로 내가 그 이름을 지어 내려주었다. 뒤에 횡수는 이해중(李海重)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제일(齊一)로 유민주(兪民柱)의 딸과 결혼하였다. 두 딸은 이희선(李羲先)과 홍정규(洪正圭)에게 시집갔다.
아! 처음부터의 이 모든 사실을 진실로 알린다! 완성되어 지어진 비문과 나의 친필은 비석의 앞면에 큰 글자로 쓰고 뒷면은 눈물을 머금으며 모월 모일에 쓰니 훗날 마땅히 돌에 새겨 남기라! 아아! 앞으로도 어찌 다시 두 사람에 대한 애절하고 섭섭함 마음이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좌측면 추기>
自有字至墓字及小字二字
英宗大王御筆戊辰刻
自錦字至源字
當宁御筆庚戌刻
【번역문】
묘비 전면 ‘유(有)’자에서 ‘묘(墓)’자까지의 12자와 작은 글씨 2자는 영종대왕 어필로, 무진년(영조 24, 1748)에 비에 새긴 것이고,
또 다른 행의 ‘금(錦)’자에서 ‘원(源)’자까지는 지금 정조의 친필로 경술년(정조 14, 1790)에 새긴 것이다.
<우측면 추기>
陰記
英宗大王御製御筆戊辰 書下辛酉刻
原本書下時爲日後年月日及子孫錄之追塡者預有屢十字 書下者謹遵 聖意
御筆中集字塡刻而至於側室子女則 御製 聖意專以 妣位爲主故不敢添入耳
【번역문】
음기
영종대왕 어제어필은 무진년(1748년) 글씨이고, 아래에 추가로 돌에 새긴 것은 신유년(순조 1, 1801)에 새긴 것이다.
원본의 글씨는 뒷날 어느 해 월 일의 때가 되고 또한 자손의 기록이 추가로 보태질 것을 생각하여 10여자의 여백을 남겨 놓았으니 아래에 추가 기록하려는 자는 성상(정조)의 뜻을 삼가 지키라.
임금의 글씨 가운데 집자하여 보태어 새긴 글 중에 측실(첩) 자녀는 임금께서 직접 비문을 지으신 성스러운 뜻을 전하고, 선조 각 대의 돌아가신 할머니들에 대한 존엄함과 올바른 법도가 되므로 감히 비문에 더하지 않은 것이니, 후손들은 들은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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