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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남곽공(南郭公) 휘(諱) 동열(東說)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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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8-13 13:09 조회4,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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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남곽공(南郭公)
     휘(諱) 동열(東說) 행장(行狀)
     
  • 아! 우리 중씨(仲氏)께서는 훌륭하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어질고 믿음직한 덕을 지니셨다. 그래서 세상에서 한 때의 재사(才士)를 이야기하고 정승의 그릇을 논할 때면 반드시 우리 중씨를 거론하였다. 이는 대개 품행이 순수하여 명성과 실질이 모두 성대함이니 하시는 일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이 모두 내면에서 온축하여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아닌 것이 없다. 대업으로 확장해 갔다면 진실로 부족한 바가 없었을 것인데, 수명은 60년도 채우지 못했고 지위는 공이 가진 덕에 미치지 못했으며 병으로 10년을 앓아 조그만 사업도 펴지 못하였다. 나실 때는 하늘이 세상에 크게 쓰려는 듯했으나 돌아가실 때에는 마치 곤액을 당하게 하여 목숨을 빼앗아가 대략 조금도 아끼지 않는 듯한 것뿐만이 아니었으니 하늘이 흐릿하고 믿을 수 없으니 선을 행하는 이들이 누구를 믿겠는가.
  • 중씨가 막 임종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은 공을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들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였다. 분주하게 노력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애초에 염(殮)하기도 어려웠으나, 다른 사람들이 부의(賻儀)를 후하게 했던 덕택에 결국 유감없이 상례를 마칠 수 있었다. 이것은 비록 상례(喪禮)의 말단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공이 태어났을 때는 기대를 하였으며 세상을 끝마칠 때에는 애석해 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중씨의 평소 언행과 출처(出處)에 대해 모두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중씨의 친구들 가운데 당세에 도덕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어 입언(立言) 군자가 될 수 있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신현헌(申玄軒)ㆍ이월사(李月沙) 같은 분들과는 40년간 사귀면서 한결같이 행동하였다. 그러니 친척들보다도 가까웠으니 이 불후의 일을 위촉할 때 차마 한 마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같은 재주 없는 동생은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저 선계(先系)의 내력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일을 기록할 뿐이다. 눈물을 훔쳐내며 형님의 일을 차례대로 기록하여 감히 돌아가신 형님의 혼령의 도움을 구하고 집사들을 번거롭게 할 뿐이다.
  • 우리 박씨(朴氏)는 본래 신라의 후예이다. 나주(羅州)에 흩어져 살다가 반남현(潘南縣) 사람이 되었다.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낸 반남선생 상충(尙衷)은 고려 말에 세상에 명성이 있었다. 조선에 들어와 좌의정(左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은(訔)이 공업을 세워서 더욱 융성하였는데, 이 분이 8대조이다. 이후로도 세대를 거듭하면서 대대로 문장으로 명성이 있는 선비들이 나오셨다. 증조부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조년(兆年)이다. 조부는 사간(司諫)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야천(冶川) 선생 소(紹)이다. 기묘년(1519) 대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김안로(金安老)는 간사한 사람이므로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을 하시다가 그들 무리의 분노를 사서 영남 지방으로 유배를 갔다가 돌아가셨다. 선고(先考)는 응복(應福)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영의정 및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이다.
  • 중씨는 가정(嘉靖) 갑자년(1564) 4월 23일에 태어났다. 휘는 동열(東說)이고 자는 열지(說之)이며 호는 남곽(南郭)이다. 어렸을 때 놀이를 별로 즐기지 않았고 영리함이 보통 아이들과는 남달랐다. 5세에는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당시 숙부인 남일(南逸) 선생은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공무에 여가가 생기면 번번이 여러 조카들을 불러다가 《시경(詩經)》ㆍ《예기(禮記)》 등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다. 중씨 역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와 학문을 배우려 하였다. 숙부께서는 기쁜 모습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너는 장차 여기에 뜻을 두려고 하는가?”
  • 조모인 정경부인 홍씨는 여든의 나이였는데, 안팎의 여러 손자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하루는 여러 손자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너희 할아버지께서는 장원급제를 하셨는데 누가 그 자취를 이을 수 있겠는가?” 중씨가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할아버지의 자취를 이을 수 있습니다.” 작은아버지인 국구(國舅) 반성공께서 그 일을 듣고서는 기이하게 여기고, 데려다가 4~5년을 가르쳤다. 화려한 의복과 음식이 갖춰졌고 수많은 노복들이 있었는데도 중씨는 담박하고 화평하게 지냈다.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 피하려는 기색도 없었지만 또한 출세를 부러워하는 마음도 없었으니, 위아래가 모두 마음이 잘 맞았고 모두들 기뻐하였다. 반성공은 그런 중씨를 더욱 아끼며 필시 큰 그릇이 되리라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 학문은 날로 진보하였고, 화려한 문장이 날로 유창해졌다. 과거 시험을 보는 날이어서 많은 선비들이 모이면 반드시 그 명의(命意)와 운사(運思)가 어떠한지를 묻고서야 물러갔다.
  • 신사년(1581)에는 한성에서 치른 시험에 급제하였다. 백부인 사재감정공(司宰監正公)께서 말씀하시길, “아무개의 재주로는 당연한 일이다. 다만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 을유년(1585)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전고(典故)에 이르기까지 빠짐 없이 넘나들며 공부하였다. 사람들은 중씨를 마치 태산북두처럼 우러렀고, 난새나 봉새처럼 본보기로 삼았으며. 혹 자신에 대해 한 마디 허여하는 말이라도 들으면 번번이 영광으로 삼았다.
  • 기축년(1589)에 역변(逆變)이 일어났다. 선조(宣祖)께서 역적 집안에서 다른 이들과 왕래한 편지를 얻어 살펴보니 공경대부에서부터 포의(布衣)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교유를 맺고 서로 친밀하게 지낸 것을 드러낸 말들이 많았기에 임금의 노여움이 엄청났다. 의심과 신뢰가 서로 뒤섞이자 임금께서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몰래 자문을 구해 중씨를 사건을 처리할 적임자로 임명했다. 중씨가 그들을 대신해 글을 올려 안정과 화합을 이끌어 내는 데에 힘쓰자, 피차의 사림들이 크게 안심하였다. 일은 비밀에 부치고 공개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정국이 급변하던 시기에 장차 상소를 올리는 일이 있을 듯하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논의가 더욱 엄하여 유림들은 두려워하여 얼굴에 핏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중씨가 오는 것을 보고서야 서로들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제야 걱정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중씨는 과연 문제를 잘 처리하여 제멋대로인 의론이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 임진년(1592)에는 대부인과 반성부인을 모시고 병화(兵火)를 피해 산골짜기로 숨었다. 반드시 공족(公族)들을 피해야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으므로,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 할지라도 함께 가려는 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다른 이들보다 더욱 고생하고 떠돌았다. 창졸간에 사람들 사이의 정과 예가 다 없어졌고, 시간이 오랠수록 더욱 심해졌다.
  • 갑오년(1594)에는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이때 어느 한 구상(舊相)이 귀양을 가 있었는데, 그의 처남이 이조판서가 되자 관직에서 쫓겨났던 70세의 구상을 다시 벼슬에 쓰고자 하였다. 그가 대사간이 되어서는 나이 어린 관리들의 집을 밤에 바삐 돌아다니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무고(誣告)하는데 영합시키고자 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로써 구상을 끌어들이는 계제로 만들려 한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 이런 의론을 꺼내자 중씨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묘년(1591)에 정철을 유배 보낸 일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인년(1590)에 임금의 물음에 답할 때, 최영경에 대해 효행이 있고 우애가 있으며 공무를 잘 집행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겉으로는 도와주는 척하고 속으로는 함정을 판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중씨가 웃으며 말하기를, “겉으로만 도와주고 속으로 함정을 판 것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여러 사람들의 눈을 다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단독으로 장계(狀啓)를 올려 그 억울한 상황을 열거하였는데, 그 언사와 뜻이 모두 정대하고 엄중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체직하라고 비답(批答)하셨다. 당시에 홍익성(洪益城)은 병이 위중하였는데 탄식하며 말했다. “박 아무개가 인물이로구나. 내가 그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
  • 얼마 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해주(海州)의 관청으로 갔다. 을미년(1595)에 조정으로 돌아왔고, 병신년(1596)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제수되었다.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다시 영남(嶺南)에 내려갔다. 정유년(1597)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영변판관(寧邊判官)이 되었다. 영변은 중국으로 가는 경로에 있었으므로 공억(供億)과 비만(飛輓)의 일이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중씨는 인구수를 잘 헤아려 일과 휴식을 번갈아가며 하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고, 장수들과 수자리 나가 있는 병사들에게 병량이 잘 공급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웃한 마을은 모두 무너져 우물이 마르고 성이 텅 비게 되었으나, 유독 영변부만은 평안하였으니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일을 칭찬하고 있다.
  • 무술년(1598)에 부친상을 당했다. 경자년(1600)에 탈상을 하고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신축년(1601)에 홍문관의 수찬ㆍ교리가 되고 문학ㆍ사헌부지평을 역임한 뒤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겨울에 원접사 종사관으로 용만(龍灣)에 갔다가 모친의 병환 소식을 전해 듣고 먼저 돌아왔다.
  • 임인년(1602)에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이 되었고, 다시 사성(司成)ㆍ상례(相禮)ㆍ통례(通禮)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정에 가자되고 황주목사(黃州牧使)에 제수되었다. 황주는 우리나라의 서쪽 관문이라서, 중국의 사신들이 거쳐 가고 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지나는 길이었다. 또한 땅은 넓고 백성과 물산이 풍부하여 처리해야 할 관아의 장부와 문서가 무척 많은 곳이었다. 황주는 날로 병폐가 늘어가고 있었는데, 중씨가 부임하여 고을의 한 해 동안의 살림살이를 헤아리고 곡물 남은 것을 헤아려 그 일을 모두 통판(通判)에게 맡겼다. 또한 당시에 엄격하게 삼가하여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킬 때에는 비록 아주 세미한 일이더라도 손수 장부에 기록하였다. 크고 작음을 헤아리고 멀고 가까움을 분간하여 기한을 확정하고 법도를 정하여 털끝만한 오차도 없게 하였다. 심지어는 땔나무 하는 일과 같은 하찮은 사안에 대해서도 반드시 그에 맞는 법도를 세웠다. 한 해가 지나자 모든 사무에 알맞은 조리가 생겼으므로 백성들은 병들지 않았고 관아에는 넉넉한 재정이 생겼다. 정치가 맑아지고 송사가 사라졌으며 모든 일들이 알맞게 시행되었으니 백성들은 “백 년 이래 이렇게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암행어사와 방백(方伯)이 탁월한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임금께서 옷감을 주어 표창하였다.
  • 병오년(1606)에 중국의 사신으로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과 급사중(給事中) 양유년(梁有年)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고을의 백성들이 더 머물러주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1년을 더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예조참의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갈 때, 황주의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중씨를 기렸다. 중씨가 훗날 방백이 되자 이 송덕비를 없앴는데, 중씨가 돌아간 뒤에 백성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 얼마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다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당시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임금께서는 하교를 내려 방책을 구했다. 당시는 최영경(崔永慶)이 국권을 잡은 지 6년이 되던 때로, 조정을 어지럽히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세상에서는 감히 이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중씨는 왕의 말씀을 대신하여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그 위급한 상황에 대해 극렬하게 간언하였다. 그 말이 통렬하고 절실하여 보는 이들이 흥원(興元)의 진실하고 통렬한 상소문에 비교하였다. 사당(邪黨)들은 분노하여 중씨를 제거하려 하였다. 중씨와 같은 부서에 있던 동료 가운데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 역시 그 사당의 무리였는데, 중씨를 위해 그 위험을 알려주고 도망갈 것을 권했다. 중씨는 웃으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끝내 그들도 중씨를 어찌하지 못했다.
  •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세상을 안정시킬 포부를 지니고 업무를 돌보고 정치의 대체를 견지하는데 힘썼으며 청렴하고 부지런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탐관오리들을 뿌리 뽑았다. 관리들의 고과(考課)는 한결같이 지극히 공평한 마음으로 시행하였고 친척이나 권세가에게도 용서하는 바가 없었으니 황해도 전체가 엄숙해졌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년(同年) 가운데 한 명이 성격이 광포하며 무뢰하였는데,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등용되어 우리(郵吏)에 임명되었다. 중씨는 길가의 무너진 역이 만약 그의 수탈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사자(使者)를 보내어 중도에 끊어버리고 계문(啓文)이 올라오기 전에 교체시키니 당시의 의론이 시원하다고 생각하였다.
  • 무신년(1608) 가을에 조정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다.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충주목사(忠州牧使)에 보임되기를 청하여 충주목사가 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했다. 신해년(1610)에 상복을 벗고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퇴계 선생과 회재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있는 힘껏 제멋대로 주장하였다. 선비들이 모두 분노하여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들추어 아뢰자 임금이 노하여 그 우두머리를 탄핵하고 벌을 주려 하였다. 제생들이 서로 앞을 다퉈 옥에 갇히겠다고 청하고서는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중씨는 요속(僚屬)들을 인솔하여 군주는 유생들을 예로 다스려야지 위세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중씨는 다시 상소를 올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예조참의에 임명되자 시사(時事)가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방황하고 탄식하였다. 조정에 남아 있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다가 외직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
  • 계축년(1612) 4월에 반적 박응서(朴應犀)가 변란을 일으켜 나라에 큰 옥안이 되었다. 나 동량(東亮)은 정협(鄭浹)의 무고(誣告)를 받아 하옥되었고, 장차 헤아릴 수 없는 큰 화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그 일의 곡절을 밝혀 보고서는 내가 알 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 석방하였다. 중씨는 먼 지방에 계시면서 걱정하는 마음을 풀 길이 없었기에 사람들만 만나면 번번이 술을 내어 대취하고는 하였다.
  • 6월에 적노(賊奴) 김응벽(金應璧)을 붙잡아 나주에 가두게 되었다. 김응벽이 중씨에게 술과 음식을 청했으나, 중씨는 주지 않고서 말하길, “죄인은 그저 굶주림과 갈증을 면하여 죽지만 않으면 충분하다. 어찌 감히 도리어 방자하게 구는가.”라고 하였다. 김응벽은 조정에서 추국(推鞫)을 당할 때에 평소에 원망하고 질시하던 수령과 방백들을 일일이 거론하였다. 다만 공에 대해서는 성명을 알지 못하고 “현재 나주목사를 맡고 있는 자입니다.”라고만 언급하였다. 임금은 다른 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중씨만을 불러들였다. 중씨가 서울로 올라올 때 날씨가 무척 더워서 금석도 모두 녹아버릴 정도였고, 여정도 길었기에 기력이 모두 다해 버렸다. 중씨가 옥에 갇히던 날 밤에 큰 비가 쏟아져 땅이 흠뻑 젖었다. 다음날 형틀을 목에 매고 공초하는 곳에 불려갔는데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갑자기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손발이 말을 듣지 않으며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눕게 되었다. 임금이 친히 살피고서는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7~8년간 철석(鐵石)으로 목욕을 하며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올해(1622) 7월 병인일에 일어나지 못하게 되셨다. 아 이것은 시운(時運)인가 아니면 명운(命運)인가? 아! 애석하구나.
  • 중씨는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되셨다. 이 해 9월 병오일에 양주(楊州) 금촌(金村)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신씨(申氏)로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따님이다. 덕성이 진실하고 청순하며 바르고 온화하였다. 평소에 먹을 것이 없어도 가난한 것으로 개의치 않았으며 음식을 만들고 집안 일을 다스리는데 한결같이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중의 사람들이 모두들 사모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 아들은 셋을 두었다. 장남 호(濠)는 진사로 판서 신흠(申欽)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고, 후배(後配)로 윤헌민(尹獻民)의 딸과 결혼했다. 차남 황(潢)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지냈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다. 참판에 추증된 종형 봉산공(鳳山公)이 후사로 취했다. 삼남 정(渟)은 참판 송일(宋馹)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두었다. 딸은 두 명을 두었는데, 장녀는 전적(典籍) 윤순지(尹順之)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승문저작(承文著作) 이행원(李行遠)에게 시집을 가서 1녀를 두었다.
  • 중씨는 타고난 성품이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너그러워 포용력이 있었고 굳세되 화합할 수 있었다. 말씨에 비근하거나 천근한 빛이 없었고 흠이 있으면 덮어주려고 하였다. 간혹 친구 가운데 실수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책망하기만 하지 않고 이끌고 깨우쳐 주기를 잘했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의 잘못을 재빨리 고치지는 못했다고 하여도 이치에 크게 어긋나게 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순박하고 어눌한 것처럼 보였으나 심중은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선대부께서는 자제들에게 성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학문을 하도록 하였는데, 중씨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는 법이 없었다. 어려서 스승에게 아직 나아가지 않을 나이에는 스스로 가정에서 배움을 얻었다. 아침이면 일어나 책을 암송하였는데, 반드시 남보다 앞섰다. 친구들이 장난을 쳐 수업 받은 책을 숨겨놓고 복습하지 못하게 해도 수업을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제자서(諸子書)와 역사서를 섭렵하여 한 번에 여러 줄을 읽어내려 갔으며, 주제에 임해 글을 엮어낼 때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월등하게 뛰어넘었으니, 문사들도 감히 함부로 자신을 견주지 않았다.
  • 몇 년 동안 시험을 봐 글을 지을 때 번번이 높은 등수에 올랐다. 회시에 대여섯 번 응시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선대부께서는 조금도 굴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큰 재주를 가진 이는 늦게 성공한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선배들은 수치로 여겼다.” 정시(庭試)에 장원하였을 때 숙부(叔父)와 같이 이름이 올랐다. 나 역시 승지의 직책으로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 선대부께서는 극성(極盛)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관직에 임해서 지켜야할 도리로써 경계하셨다. 얼마 후에 홀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후에 이시언(李時彦)ㆍ이경함(李慶涵)ㆍ조수익(趙守翼)ㆍ이시발(李時發)ㆍ신경진(辛慶晋) 등이 뒤를 이어 상소하였다. 신경숙(申敬叔)ㆍ정시회(鄭時晦) 역시 중씨를 무리의 영수(領袖)로 여겼다. 후에 예견이 확산되자 무리의 이 일로 인해 더욱 중씨를 중요하게 여겼다.
  • 전례에 의거하면 이조(吏曹)에 둔 낭관(郞官)이 다 결원이 되면 가랑(假郞)을 두는데 반드시 용렬한 이로써 임명하는 것이 유래가 오래 되었다. 중씨는 임진년(1592)에 정주(定州)에 있었는데, 어떤 이름난 재상이 수군(水軍) 대장(大將)으로 이 성에 주둔하였다. 그는 당시에 다른 이들로부터 배척받았던 것인데 중씨와 친숙하였다. 그가 갑오년(1594)에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을 때 중씨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쏟았으며 그릇되게도 지기(知己)라고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좇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욕을 주고자 계(啓)를 올려 중씨를 가랑으로 삼았으니, 이조(吏曹)의 서리들이 모두들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중씨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 나아가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행하자 이조판서가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였다. 하루는 정무를 처리하는 자리에서 천천히 말하기를, “공은 가랑의 관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관안(官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개는 대간(臺諫)에 적당하고, 또 아무개는 시종(侍從)에 합당합니다. 공께서도 시험 삼아 말씀해 보시지요.” 중씨가 웃기만 하고 그 말에 응하지 않으니 갑자기 말했다. “내가 실언을 했나 봅니다. 내가 실언을 했나 봅니다. 내가 정성을 들여 물어본 것이니 공께서는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중씨는 이번에도 웃기만 하고 응대하지 않았다. 이 일을 들은 이들이 말했다. “정문익공(鄭文翼公)이 폄직되어도 물러나지 않았던 일과 비교해 보면, 그 덕량(德量)은 거의 같으며 변고를 처리하는 태도는 문익공을 뛰어넘는다.”라고 하였다.
  • 한 번은 홍문관교리로서 강연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했는데, 보던 이들이 물러나 말하기를 “평상시에 책을 읽을 때에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 음성이 크고 화창하며 비유를 끌어 깨우침이 완곡하고 진지하니 실로 겁이 없다고 할 만 하다.”라고 하였다. 중씨가 그 말을 듣고서 웃으며 말했다. “경연의 자리에서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평상시에 갈고 닦는 것이다. 어찌 위축되어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겠는가!”
  • 난리가 일어나자 전랑(銓郞) 직에 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무인(武人)과 음관(蔭官)을 천거하여 수령을 삼았는데, 서로들 찬미하고 기리는 모습이 마치 잘 아는 사인(私人)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중씨는 매번 이들에게 염증을 내고 싫어하였다. 정조(政曹, 이조와 병조)에 있을 때는 당상관(堂上官)들의 의론 가운데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처리하여 절대로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당상관들이 또한 탄식하며 말했다. “옛날 낭관들의 훌륭한 풍모를 다시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 중씨와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가장 친한 이가 있었는데, 겉으로는 청렴한듯하나 실제로는 좋은 관직에 뽑히는 일을 꾀하는 이가 있었다. 중씨는 내심 그를 경박하다고 여겼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관직에 추천하는 때가 되었는데 중씨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처리하였다. 그 사람이 공이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중씨를 원망하고 원수처럼 미워했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중씨는 매번 이 일을 불행으로 여기며 말하길, “예전에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전랑의 관직을 거치면, 크게는 화를 면치 못하고 작게는 원수가 많아진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구나.”라고 하였다. 성이민(成以敏)이 왜의 병영에서 도망친 뒤로 그의 임무를 대신한 자는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겨 지체하고 물러서며 앞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 중씨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막하에 있다가 이치와 형제가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다는 점으로써 사람들을 깨우쳤고 음빙(飮氷)의 의리로 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즉석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사람에게 주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마침내 떠났다. 오성은 자주 중씨에 대해 사람을 잘 다룬다고 칭찬하였다.
  • 승정원에 있을 때는 권세 있는 대신[權相]이 국정을 맡았는데,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가강(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는 “임진년의 일은 저희가 알 바가 아니니 청컨대 사신을 보내어 예전의 우호를 회복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권상은 시종 화친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임금의 은전을 입은 뒤 이 일을 거절하면 임금과 틈이 생길까 걱정하였다. 우선 임금의 뜻을 넌지시 살펴보려고 먼저 그의 족제(族弟)로서 방백인 자에게 우호를 맺는 일이 때에 맞는 권도로 처리한다면 안 될 것도 없다고 아뢰게 하였다. 권상 역시 스스로 의견을 건의하여 진술하기를, “임금의 능을 훼손한 원수들은 만 년이 지나더라도 잊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왕릉을 침범한 왜적들을 포박해서 보내오면 화의(和議)를 허락하는 데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왜구는 곧바로 병졸 둘을 포박해서 데려와서는, “이들이 그 도적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반색을 하고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수치를 시원하게 설욕하였으니 이 어찌 어진 재상의 덕택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권상 역시 요란하게 자신의 공을 일컫고 장차 종묘에 아뢰어 축하를 드리고 경사를 공표하며 한편으로 공훈을 기록하려 하니 그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 중씨만이 홀로 이 일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저들 왜적은 교활하고 기만하는 데 능합니다. 만일 그날 흉악한 일을 했던 왜적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속임을 당한다면 사방의 비웃음을 살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저들을 국경에서 목을 베어 미리 그들의 간교함을 꺾어버려야 옳을 것입니다.” 임금께서 변방을 맡은 여러 신하들에게 함께 의논하게 하였는데 오직 오성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제관(祭官)과 사관(史官)은 속이는 말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박동열이 올린 상소는 실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말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위축되어 감히 논박하지 못했다. 마침내 도적들을 불러다가 물으니 한 명은 본래 병이 있어서 바다를 건너 종군하지도 못했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나이가 겨우 20살 남짓이었다. 임진년의 나이로 계산하면 10살도 안 되었을 때니, 모든 이들이 중씨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나 동량은 당시에 기성(箕城)에 있었는데, 오성이 편지를 보내어 그 일을 다음과 같이 축하하였다. “박동열의 이번 일은 사람들을 상쾌하게 하고 기운을 북돋운 것이니, 어찌 그리 장하던가!”
  • 중씨는 평생 동안 자연에 마음을 두었고 시비에 맞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조금도 사심(私心)을 가지고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았다. 나주(羅州)에 있을 때 선비들 가운데 당숙(堂叔)과 종질(從姪)이 서로 원수 사이로 지내던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선영(先塋)을 서로 파헤치기까지 하였다. 각기 조정 대신과의 인연을 앞세워 위세를 빌려 서로 폭로하는 일이 이어졌다. 중씨는 부임하자마자 마을의 장로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숙과 종질은 서로 가까운 친척이므로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선조가 같다. 그러니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서로 덮어주어야 하는데, 저들은 서로 악행을 일삼으니 어찌 단지 한 가문의 수치로만 그치겠는가? 반드시 극악한 죄로 서로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니 옥안(獄案)을 갖추어 조정에 올려 풍속을 올바로 바로잡을 것이다. 전날의 화목함을 되찾도록 더 이상 권할 수가 없구나.” 나주 사람들은 모두들 그 가르침에 기뻐하고 위세에 습복(慴伏)하였다. 중씨가 임소(任所)에 있는 동안 아무도 감히 한 마디 말이라도 중씨에게 간여하는 이가 없었다.
  • 나주는 호남 지방의 큰 고장이라서 좋은 물산(物産)이 모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팔도 가운데 으뜸가는 곳이었다. 또한 눌재(訥齋) 박상(朴祥)ㆍ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과 같은 문장과 절의(節義)를 지닌 선비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변란 후 풍습이 변하여 크게 무너졌으니, 오직 당을 지어 배격하는 일을 일삼으며 지나칠 때는 등지면서 같은 곳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대 현인들의 유풍이 날로 사라져갈 지경이었다. 중씨는 이를 바로잡고자 하여 고장의 훌륭한 선배들을 모범으로 삼고 여러 유자들을 모아서 뛰어난 자들은 시험을 보게 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광주(光州)의 선비들과 교류하여 문예를 겨루는 모임을 갖게 하여 스스로들 힘쓰도록 하였다. 한 번은 어느 산사(山寺)에 모였는데 서로들 말하기를, “우리가 이전에는 서로 파(派)를 나누고 추향하는 바를 달리 하였는데 과연 어째서 그랬을까? 이런 수령이 없으셨다면 이런 모임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시의 풍격(風格)은 청신하였고 진부한 말은 힘써 제거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을 때 중씨는 이자민(李子敏)ㆍ홍휘세(洪輝世)와 함께 종사(從事)가 되었고, 권여장(權汝章) 역시 포의의 신분으로 막하에 들어갔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황주(黃州) 시절의 작품을 보고서는 중씨의 시를 문단을 주름잡을 작품이라고 허여하였다. 당시에 최동솔(崔東率)이 평양(平壤)에 우거했는데 강운(强韻)으로 화답을 구하다가 중씨의 시를 읽고서는 역시 찬탄을 금치 못했다.
  • 고명(誥命)을 기초(起草)할 때에는 엄정하고 장중하였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영남의 방백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위험에 임해서 명을 받았으니, 경은 자신의 몸도 잊고 늙을 때까지 양친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실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로구나.” 방백이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내는 글의 체격을 깊이 터득한 글이다.”라고 하였다.
  • 나 동량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길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중씨의 병이 더욱 심해져 더 이상 서울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송추(松楸) 근처에 초가를 만들어 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오성 역시 독포(禿浦)에 은거하였으니, 서로 간에 거리가 10리가 채 되지 않았으므로 이따금 지팡이를 짚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서로 오가기도 하였다. 오성이 북쪽 지방으로 귀양갈 때, 중씨가 절구시 한 수를 지어 읊조렸다. “저물녘 온 산에 눈이 쌓였는데, 차가운 매화나무 한 그루 피어 있네.【당시 오성의 집에는 화분에 매화가 성대하게 피어 있었다】평생을 대나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았는데, 자릉대(子陵臺)에서 서로 이별하네.” 이는 사고(謝翶)가 문산(文山)을 보내면서 통곡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오성은 그 시를 기쁘게 받아들고서 말했다. “시어와 뜻이 모두 잘 갖춰졌으니, 훗날 이 시에 화운(和韻)하겠다.” 얼마 후에 오성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평소에 지었던 시문(詩文)들은 수습되지 못하고 흩어져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 내면의 수양에 돈독하였고 시종일관 같은 모습이었다. 당형(堂兄)인 활당공(活堂公)이 집을 떠나 먼 곳에 머물 때 병에 걸렸는데 열이 무척 심하셨다. 자제들은 모두 먼 곳에 있었고 동복(童僕)들도 모두 누워 있었는데, 중씨가 손수 약을 지어 먹이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활당공이 돌아가셔서 염을 하고서야 떠났다.
  • 둘째 아들 황(潢)은 오래 전에 홍휘세(洪輝世)의 집안과 결혼을 약조하였다. 임자년(1612)의 옥사 때에 홍휘세 집안은 원수 집안의 무고(誣告)를 받아 화를 가장 혹독하게 입게 되었다. 그런데 황은 출계하여 반성군의 제사를 모셨다. 궁중에서는 화를 입은 집안의 자손이 국구(國舅)의 제사를 모셔서는 안 된다고 하며 여러 방법으로 으르고 협박하였다. 중씨는 처음에는 그 말을 좇는 듯이 하였으나 몇 년 후부터는 결연한 모습으로 홍씨 집안과 혼인의 예를 행했다. 사람들은 이를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 재산을 나누던 날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선대의 재산은 본래 적은데,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대부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니 어찌 늙은 누이와 과부 형수님에게 관습에만 의거하여 재산을 나누어 주겠는가.”라고 하고는 재산을 모두 두 집안에 귀속시키고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친척을 보살펴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우하여,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구제하고 위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왔다.
  • 자제들에게 학문을 성실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어맞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자제들을 불러 읽게 하고는 그 지취(志趣)를 깨우쳐 주었다. 만약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가려 뽑아 자제들로 하여금 익숙하게 외도록 하였다. 쓸 데 없이 넓게만 교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말씀하길, “실질적인 보탬은 없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을 수 있다.”라고 하셨다.
  • 선대부께서는 왕실의 인척이 된 뒤로는 공무에서 물러나 전연 참여하지 않았다. 중씨는 가훈을 잘 받들었으며, 확실하게 지키는 바가 있었다.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당시 의론이 어지러워 한 걸음을 걷는 사이에도 자세히 살피는데 이르렀다. 이 때문에 주저하다가 용만(龍灣)의 역려(逆旅)에서 인사를 올렸고 나아가 배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반드시 한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계 선생도 중씨를 자주 허여하며 말세의 인물이 아니며, 비록 재상의 자리에 기용하더라도 지나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이 돕지 않아 오래 고생하다가 빨리 데려가셨으니, 애통한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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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우 오창공(梧窓公) 동량(東亮)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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