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영(泳)자 항렬과 승(勝)자 항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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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6 10:35 조회2,457회 댓글0건본문

1825년간행 을유보 항렬강정도 001.jpg
24세 영(泳)자 항렬과 승(勝)자 항렬에 대하여
시중(市中) 또는 문중(門中)에 흘러다니는 이야기로
“김옥군, 홍영식, 박영효, 서광법, 서재필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의 혁명(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래서 김옥균(안동김씨)의 균자 항렬자는 규(圭)로
홍영식(남양홍씨)의 植자 항렬은 杓로
박영효(반남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라고 기록한 책이있고
( 한국인의성보-삼안문화사 1986발행 자랑스러운 나의 족보-뿌리찾기 운동본부-)
또 그런 말들이 널리퍼져있는데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집안에서는 항렬자를 바꾸었는지는 모르나 우리 반남박씨 집안에서는 바꾼일이 전혀 없는데도 바꾼것 같이 알려져있고
지난 21호 종보에서도 작가분이 쓰신 글중에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영(泳)자 항렬에서 승(勝)자 항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문중의 모든 종원들도 이를 사실로 믿고
또 우리 반남박씨 역사에 대해서 통달하신 분들까지도
“泳(영)“字에서 항렬에서 勝(승)“ 字로 항렬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기에 이를 바로 고치려고 한다
금릉위 박영효는 철종의 범씨 소생 외동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전통적으로 역적이거나 역적으로 몰리면 역적인 그분의 문중에서는 문중의 명예를 위해서
항렬을 바꾸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우리문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기에
금양위 경우도 그렇게 항렬을 바꾸었다고 믿고 그런 소문이 시중에 흘러다닌다
그런데1. 옛날족보 을유보(1825년 발간) 서문중
양자(陽字) 하행렬강정도(下行列 講定圖 )에
의하면 24세 승자 25세 서자 항렬이 결정되어 있으며,
( 23世 “양”자항렬 이후의 항렬표 ) 의하면
박 勝 ㅇ 24세
박 ㅇ 緖 25세
박 贊 ㅇ 26세
박 ㅇ 雋 27세
박 持 ㅇ 28세 로 1825년에 공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승자항렬 사용은 족보에 의하면 1800년 이전부터 사용한 기록이 있다
朴勝顯(1792년) 증 중추원의관 8권240
朴勝宇(1818년) 노직 가선 동추 6권382
朴勝昌(1816년) 관 통정 8권373
朴勝文(1817년) 8권847
2. 영자 항렬은 금양위 자손중에서 많은 분이 사용했으나 반남박씨중 다른 문중에서는 몇 몇 몇분 있다.
3. 판관공파 후손에서 몇분 발견되는데, 사용한 이유가 분명치 않다.
판관공파 어른께 여쭈어 보았으나 확실한 이유는 없고
승자 항렬에 동명이인이 많기에 같은 이름을 피하기 위해 쓴것이 아닌가 한다.
판관공파의 영진이란 분이 사마시합격당시는 영자 항렬인데
족보에는 승진으로 기록이 되어있음
4. 그런데 금양위 종손은 승문(1824-1843)으로 승자항렬을 사용했다.
세교-태두-필하-사익-대원-상로-宗壽-제상-정양-승문
5. 영자 항렬은 영학(1824-1885)으로 부터 사용
세교-태두-필하-사설-도원-상면-남수-제현-경양-영학(1824-1885)
6. 금양위 후손중에 참봉공댁으로 양자간분은 승자 항렬을 쓰고
出 勝肇(조) <-準陽(세성-태식--사윤--종면-홍수-제정 (족보1권 578)
7. 참봉공댁에서 금양위 댁으로 양자 온 분은 영자항렬과 용자 항렬을 사용했으나
한집안인 4형제중 3형제가 금양위댁의로 양자를 갔는데
참봉공댁에 남아있는 첫째분만 승자항렬로 남아 있고
양자간분 세분은 항렬을 바꿈
영준 1권 581(족보)
영건 1권 581
用厚(1848-1903) 원릉참봉
<-봉양<-제형<-붕수<-종원<-사한<-필정<-태적<-세성 (1권 581)
8. 영(泳)자 항렬에서 승(勝)자가 안닌 용(用)자 항렬로 바뀐 예는 몇 곳에 나타난다
용우(用雨)라는 분은 초명이 泳珏이였다가 용자항렬로 바꿈
영훈(泳薰)이란분은 사마시, 문과방목에는 영훈으로 기록되고
1887년 이후에는 용원이란 이름으로 계속 벼슬을 지냄
9. 용자항렬을 쓰시는 분중에는 벼슬한분이 많음
. 금양위 후손중 경신보 기록에 용자 항렬쓰는 분은 8 분으로
용우; 초명 영각
用悳; 淮陽郡守
용원; 부제학
용후; 원릉참봉
용면 용기 용하 용석
10 위에 예로 보면 영자항렬에서 승자항렬로 바꾼것이 아니라 용자항렬로 바꾼것이 안닌가 의심이간다.
가. 이상의 조사는 경신보에 기록된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나. 경신보에서는 어디에도 영자항렬이 승자로 바뀐 흔적이 없다.
(승자항렬로 초명이 영자항렬로 기록된분이 없으며
20세 상(相)자항렬에서 종(宗)자 항렬로 바꾸었을때는
20세 종자항렬 사용하신 분들에서게 상자 항렬 초명이 다수기록됨)
상덕-> 종덕 상갑->종갑 상록->종록
다. 오히려 영자항렬에서 용자항렬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라. 벼슬을 하신분중 금릉위 영효와 같은 영자 항렬을 피하기 위해
용자 항렬을 쓴것이 안닌가 의심이 된다
마. 경신보 3권1-136 쪽에 영(승)자 항렬 269분중 승자항렬이 120 분이 된다
바. 영자항렬은 최근까지 사용함 영운(1972년생)
사. 갑자보나 무술보 의 기록을 확인 하지 못한점이 아쉽고 빠른 시일내에
갑자보를 구입해서 더 확실한 결과를 얻도록 노력하겠슴
아. 시중에서나 종중의 종원들이 말하는 영자항렬에서 승자항렬로 바꾸었다는 근거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많은분들이 문서나 기록에 나온 이야기가 아닌 윗 어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그것을 윗분들 말한 이야기이니까 절대불변의 진실로 알고 있기에 이를 고치고저 합니다.위의 일들은 선조님들의 行蹟과 事蹟을 족보.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기타자료에서 추적하던중
발견한 것으로 반남박씨의 항렬. 항렬의 바뀐 이유에 대한 기록은 찾지를 못했고,
제 개인적인 생각데로 쓴것이기에 이것이 꼭 옳다고 할수없느며
이에대해서 반론이나. 좋은 자료가 있으신분은
반남박씨 대종중 홈페이지를 통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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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공파 박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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