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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6-29 16:52 조회1,677회 댓글0건본문
상로재기(霜露齋記)
상로재(霜露齋)는 우리 박씨의 재실으로서 나주(羅州) 반남(潘南)의 자미봉(紫薇峯) 아래에 있으니 이는 바로 우리 선조의 장지(葬地) 봉현(蜂峴)의 서쪽이다. 선조를 처음 이 곳에 장사지낸 뒤로 손자 참의공(參議公)을 합장하였고 그 뒤에 3세(世)만에 평도공(平度公)에 와서 고려의 옛 풍속을 따라서 분묘에 암자를 두고 승려로 지키게 하여 나무 채벌을 금하며 제사를 돕게 하였다. 또 7世만에 남곽공(南郭公)이 주목(州牧)이 되어서 제전(祭田)을 더 장만해 주었는데, 이를 이어 자손들이 점점 번성해서 더욱 경건하게 받들었다. 무덤을 지키는 호구도 있고 찬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 암자는 의관(儀觀)을 씩씩하게 하고 순찰을 돕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그 후에 남곽공(南郭公)의 손자 찬성공(贊成公)이 회진(會津)에 우거할 때 풍수설을 듣고서 그 암자를 동쪽 기슭 취봉(鷲峯) 아래로 옮기고 그 터를 장지로 삼았다. 자손들이 그 아래에 대대로 살았는데 학생공(學生公) 사신(師莘)이 이 재실을 세우고 청하공(淸河公) 충수(忠壽)가 이 편액을 써 붙였다.
재실의 시초는 비록 스스로 조상을 위하는 일파(一派) 자손의 정성에서 나왔지만 묘가 선영 안에 있고 재실도 분암(墳庵)의 터에 자리 잡았으니 감히 아버지 사당으로만 삼을 수 없었기에 대종(大宗)이 치재(致齋)하는 곳으로 정하여 철따라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여기에서 보살폈다. 파손되면 보수하는 것에서 대종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도리와 사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산 아래 사는 자는 오직 남곽공 일파뿐이나 종중의 일을 관리하는 데는 서울에 있는 여러 후손이 번갈아 멀리서 주관하였으니 그들은 멀리 살아서 비록 시절에 따라 성묘하며 머물러 있지는 못하였지만 먼 지방에 와서 제물을 갖추었다. 대대로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첨정공(僉正公) 필규(弼揆), 참판공(參判公) 필명(弼明), 동돈공(同敦公) 사옥(師沃), 대헌공(大憲公) 도원(道源) 같은 이가 전후로 서로 이었다. 우리 고조부 금풍(錦豊) 충헌공(忠憲公)이 이 도에 안찰사로 오셨을 때 동족으로서 도내 육군(六郡)의 수령인 이들이 일시에 와서 성묘하고 묘소 주변의 나무를 돌아보고 친목을 강론하며 시로써 기록하였는데, 六符[六郡 守令] 一節[一按察使]의 요목이 있어 지금까지 전해서 외운다. 요사이 수십 년 전부터는 서울에서 한 사람을 정해서 보내와 10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는데 원근의 여러 종족이 모두 다 모인다. 제사를 지내고 물러 나와서는 음복의 예를 행하며 여기에 모여서 친목을 돈독히 하여 하나의 근본에서 나온 의리를 밝히고 백세로 길이 이어갈 우의를 다진다. 주(周) 사람들이 제사를 마치면 연회를 베풀었으니 고사(古事)에서 이 일을 상고할 만하고 진(晉)의 장로(張老)가 제실에서 족인(族人)들을 모았다고 하였으니 이 송(頌)을 훌륭한 송이라 할 만하다. 재실은 모두 네 칸인데 영조 24년 무진년(1748)에 지은 것이다. 지금까지 수백 년이 되었으나 아직 사적을 기록한 글이 없으니 찬성공(贊成公)의 후손으로 선산 일을 하는 정서(鼎緖)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징험할 수 없을까 걱정해서 충헌공의 후손 풍서(豊緖)에게 알려서 이와 같이 그 사적을 대강 쓴 것이다.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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